심리학자 김태형이 저술한 『자살공화국』에 따르면 한국인들은 굶주림의 고통으로 자살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의 파탄이 초래하는 정신적 고통으로 인해 자살한다. 한마디로 배고픔이 충족된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타인과의 건강한 관계이며, 그 속에서 관심과 사랑을 받을 수 있는지의 여부가 삶의 질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울증을 앓는 내게 타인과의 관계는 더욱 소중했고 한편으론 무척 조심스러웠다. 그런데 지속해야 할 관계와 그렇지 못한 관계는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사랑과 관심을 얼마큼 주느냐, 하는 추상적인 지표만으로는 어떤 관계도 함부로 재단할 수 없지 않은가.
얼마 전, 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관계를 이어오던 친구들과 연을 끊었다. 그들에겐 나의 절교 선언이 충동적으로 느껴질 수 있겠지만 나는 오랜 시간 고민했고, 또한 그들에게 많은 언질을 주었다고 생각했다. 그들과의 관계에 대해 고민하면서 나는 좋은 관계와 그렇지 못한 관계를 구분하는 하나의 기준을 세우게 되었다. 그건 바로 공감 가능성이었다. 공감의 불능은 무관심과 사랑의 붕괴를 초래하는데, 이것은 특히 우울증에 걸린 사람에게는 몹시 치명적이다. 기본적으로 우울증에는 타인을 배척하려는 태도가 내재되어 있다. 바꾸어 말하면 우울증을 이겨내려고 하는 사람은 타인과 멀어지려는 척력을 어떻게든 인력으로 바꾸어 보려고 사력을 다하는 자이다. 그런 사람에게 공감의 불능이 초래하는 무관심과 사랑의 붕괴는 조금 과장하자면 그 사람으로 하여금 당장 자살 기도를 하게 만들 만큼 위험하다. 내게는 고등학교 친구들이 그랬다.
내가 중증의 우울증을 겪고 있다고 처음 고백했을 때 그들은 심드렁했다. 거창한 것을 바랐던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다음과 같은 말을 해주지 않을까, 나는 예상했다. “지금은 좀 괜찮아?”, “그동안 많이 힘들었겠다.", "도와줄 게 필요하면 언제든지 연락해.” 그러나 그들은 우울증에 걸린 나를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봤고, 심지어 내가 자초한 일이라며 거세게 비난하기까지 했다. 나를 도저히 좋게 볼 수가 없다고. 왜 사람들을 만나러 밖에 나가지 않냐고. 왜 규칙적인 생활을 하지 않냐고. 그들은 계속해서 나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자신의 정신적 우월함을 공표하는 것 같았다.
그들의 지적이 정당한지 아닌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여기에는 공감이 결여되어 있었다. 물론 우울증을 앓아본 적이 없으니 그 상태로 타인과 접촉한다는 게 얼마나 지난한 일인지 알 수 없겠지. 그러나 공감은 애초부터 타인에 대한 완벽한 이해를 목표로 두지 않는다. 공감이란 지금의 위치에서 타인의 감정에 접속할 수 있는 데까지 한번 들어가 보는 것, 그게 불가능하다면 그러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과정만으로도 공감은 충분히 가능하다. 위대한 시인 윤동주는 『병원』이라는 시에서 공감이란 무엇인지 일찍이 지적한 바 있다. 『병원』에서 알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는 화자는 병원 뒤뜰에 누워 있는 여환자의 건강이 속히 회복되기를 기원하며 그녀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 본다. 여기에는 공감의 두 가지 요소가 명징하게 드러나 있다. 나의 고통이 타인의 고통과 같지 않음을 인정하는 것, 내가 온전히 타인이 될 수는 없을지라도 그 사람이 있었던 자리에 머물러 보는 것. 모든 공감은 타인의 처지를 이해해보려는 작은 시도에서 시작된다.
주체가 누구든지 공감이 불가능하다면 관계는 필연적으로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부정적 관계의 하중은 오롯이 본인이 짊어져야 한다.그렇기에 그걸 잘라내는 훈련도 필요하다. 이때 관계의 지속 기간이나 만남의 빈도 같은 피상적인 지표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서로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받지 못한다면 그건 이미 붕괴된 관계에 지나지 않는다. 폐허 속에서 망가진 철근과 콘크리트로 뼈대를 다시 세우려고 노력해봤자 이내 기둥은 휘어지고 말 것이다.
불행이 찾아왔을 때 좋은 점은 내게 중요한 관계가 무엇인지 판가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울증으로 고통스러워할 때, 그리고 최근 연인과의 이별을 겪으며 더 큰 우울감에 휩싸였을 때, 나를 진정으로 걱정해주고 찾아주었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중에는 평소에 연락을 거의 주고받지 않음에도 먼저 위로의 메시지를 보낸 사람도 있었다. 또한, 당장 시간을 내서 보자는 사람도 있었고, 전화를 걸어와 길게 내 이야기를 들어준 사람도 있었다. 이러한 관계의 재발견은 절연의 아픔을 깨끗이 잊게 해주었고, 한편으론 삶의 안정감을 느끼게 해주었다.
나이를 먹을수록 타인과 새로운 관계를 맺는 일이 가장 어렵고 힘든 일이라는 것을 피부로 느낀다. 그러나 내게는 이제 명확한 기준이 생겼다. 그렇기에 전보다 수월하게 관계 맺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 낙관적으로 예단해본다. 열린 마음으로 타인과 대면하되 공감의 가능성이 결여된 사람과는 깊이 관계 맺지 않는 것. 이런 깨달음을 얻을 때마다 불행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불행은 때로 삶의 방향성을 정해주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