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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섀도우 Jun 14. 2021

[에필로그] 묘비명

코로나병동, 미처 못다한 이야기

 https://youtu.be/QEDUcYyCClQ

쇼스타코비치는 자신의 곡이 사람들의 묘비와 같다 하였다. 피아노협주곡 2번 2악장 안단테


R.I.P.


 중국 우한에서 시작된 코로나19가 본격적으로 대유행하던 2020년 3월.

 알비온 전역이 코로나 환자로 뒤덮히고 멘체스터는 사이비교도의 전파로 발칵 뒤집어졌다. 자원봉사를 겸한 신도들의 전파로 수많은 요양병원 환자들이 감염돼 의료 시스템이 붕괴될 정도였다. 유휴 의료진, 간호사, 심지어 갓 임관한 간호장교들이 임상에 달려들었다.


 과포화된 환자들이 밀려오기 시작했고 병원은 마이너 파트 환자들을 빼고 아크릴판으로 땜빵한 대-코로나 병동으로 만들었다. 수선생님의 사다리게임으로 당첨된 나는 중환자실에 온 지 4개월만에 코로나병동으로 파견가게 됐다. 

 호흡기 병동과 감염병동, 외과계(SICU)-내과계(MICU)-응급중환자실(EICU)의 파견 인력으로 드림팀이 꾸려졌다. 병동 간호사들과 중환자실 각지에서 모여든 간호사들 모두 난생 처음 겪는 이 재앙에서 하나 둘 규칙을 맞춰갔다. 


 격리실로 들어가기 전 우리는 Level-D 방호복을 입고 서로 빠진 게 없는지 체크했다. 격리실 복도로 물건을 주고받는 이중문의 패스박스(Pass box)는 작았기에 폐기물통과 20개들이 물병 묶음, 도시락, 처치 세트와 약물들을 바리바리 싸들고 들어간다. 이따금 부족한 것들은 패스박스를 통해 전달되었다. 

 외래진료가 끝난 19시, 마치 007 작전마냥 승강기와 복도를 통제하고 음압텐트에 탄 환자가 흉부 조영CT실로 촬영한다. 폐 전체에 물이 찬 심란한 CT 영상을 보고 감염내과 교수들은 머리를 맞대고 상의한다. 




코로나 병동은 삶과 죽음을 가르는 장벽이었다. 


삼십대 후반의 6.2피트의(188cm의) 강건한 체격의 중년의 남자. 그는 영영 깨어날 수 없다는 공포를 삼키며 비닐봉투에 담긴 태블릿 PC에 기관내관 삽관 동의서를 서명했다. 그의 정맥관에 미다졸람이 투여되고 죽음과 같은 잠에 빠져들었다. 조나단이었는지 써니였는 지 기억나지 않지만, 레지던트는 순식간에 기관삽관을 마치고 그의 숨결을 기계가 대신했다. 기계환기 치료에도 X-ray 상 시간마다 악화되는 폐를 보고 흉부외과 교수 하트만(Hartman)이 ECMO를 시술했다. 그리고 폐 뒤쪽으로 찬 분비물을 배출시키기 위해 엎드린 자세(Prone position)로 환자를 뒤집었다. 

수많은 부재중 전화가 며칠 뒤 깨어난 그를 반겼다. 죽음의 공포에서 살아 돌아온 그는 울음을 터트렸다.


한달동안 진정제의 수면 상태로 병마와 싸운 70대 후반의 말기신부전 남자 환자는 기계환기와 CRRT, ECMO를 달고도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나왔다. X-ray 상 폐에는 흉측한 상처가 남았지만 두 번의 코로나검사에서 음성이 나온 그는 일반병실 1인실로 전실했다. 


안타깝게도 격리실에서 세상을 떠난 환자도 있었다. 

 팔십대의 당뇨와 고혈압, 만성신부전이 있는 여인은 한 달 넘게 ECMO를 달고 있었다. 장기간의 에크모 사용으로 항혈전제를 오랫동안 사용했고 미세 출혈이 일어나기 쉬웠다. 에크모를 떼기 위해 속도를 줄이면 기계환기 FiO2를 풀로 걸어야 산소포화도가 간신히 90대를 넘겼다. 하얗게 물이 차오른 흉부 엑스레이 사진은 좋아질 기미가 없었다.

 한 달만에 중심정맥관을 새로 잡고 그날 저녁, 시간이 지날수록 산소포화도가 더욱 나빠졌다. 콜을 받고 들어온 호흡기내과 교수가 들어와 청진기로 흉부 청진을 하더니 혈흉(Hemothorax) 같다고 젤코 바늘로 폐를 찔러본다. 쏟아져 나오는 피들. "헤모쏘락스!!" 나는 벽에 붙은 콜벨을 눌러 혈흉이라고 외쳤다. 호흡기내과 교수와 사이가 안좋았던 흉부외과 교수 하트만이 밖에서 무슨 근거로 헤모쏘락스냐고 툴툴댔다. 콜을 받고 급히 들어온 방사선사가 흉부 X-ray를 찍고 일자로 물이 차 있는 사진을 보고나서야 그는 흉관을 꽃을 준비를 했다. 

 뒤치닥거리를 마치고 세시 넘어 퇴근한 나는 같이 일한 선생님과 술잔을 기울였다.


혈흉이 생긴 그는 더이상 가망이 없었다. 절망적인 상황을 납득하지 못 한 몇몇 보호자들이 감염내과 교수의 허락 하에 Level-D 방호복을 입고 임종 직전 환자를 만났다. 입실한지 두 달, 연명의료중단 동의서가 작성되고 그는 스틱스 강을 건넜다. 고인은 보호자들의 손 한 번 제대로 잡지 못하고 밀봉되어 국가지정 화장터로 떠났다.

황망할 다름이다.


나는 슬픔을 다른 사람들에게 터놓기보다는 가슴에 묻어두는 편이다. 그 점이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나를 아싸(아웃사이더)라고, 솔직하지 못하고 음흉하다 생각할 수 있다. 슬픔은 쌓아두면 마음의 병을 얻는다. 일년이 넘게 지난 지금에야 용기를 내어 흐려진 기억을 더듬으며 곱씹는다. 이 기록은 떠난 이들을 위한 묘비문이다.

 민감한 부분에 대한 자가검열로 더 많은 이야기를 하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두 번이나 더 코로나병동에 파견갔지만 잘 모르던 풋내기 시절 비오듯 땀이 쏟아지는 방호복을 입고 공포와 스트레스의 극한에서 일했던 첫 파견을 영영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스쳐 지나간 수많은 인연들 -  간호사, 레지던트, 교수, 청소직원, 이송요원, 그리고 환자들... 



지옥같은 최전선을 지키는 의료진, 임직원들을 생각하며.

코로나에 희생된 자들과 소중한 가족을 잃은 분들을 기리며.



- 『코로나병동에서 일해요』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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