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춤형 생활체육의 미래가 아닐까.
게임을 좋아하는 편이다. 옛날에는 좀 딥한 게이밍을 좋아했었지만 하드코어 게이머로 불릴 수준은 절대 아니고, 지금은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캐주얼이나 카드게임류를 좋아한다. 스팀 라이브러리가 아주 풍부한 것도 아니고, 집에 콘솔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나마 어렸을 때는 게임하려고 데스크탑에 앉아있었지만, 서른 즈음이 되서부터는 모바일 게임만 한다.
그렇지만 VR에는 관심이 많다. 내가 그나마 콘솔을 샀다라고 하면 몇 년 전에 구매한 Oculus Quest 2(이제는 Meta Quest 2다)가 유일하다. 완전 무선인 고성능 기기라는 것에 반해서 발매 직후에 직구로 샀고, 한참 하다가 안하다가 한참 하다가 안하다가를 반복하다 지금은 또 한창 하는 중이다.
다시 VR에 손을 댄 계기는 Holofit이라는 앱을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집에서 로잉머신을 타는데, 좀 더 재밌게 타고 싶었고, 방법을 찾던 중 레딧에서 Holofit이라는 앱을 알게 되었다. 이게 뭐냐면, 집에 있는 운동기구 중 블루투스 호환이 되는 운동기구를 VR에 연결하면, 가상세계 안에서 운동을 할 수 있다. 내 로잉머신을 VR기기에 연결하면 내 움직임에 따라 내가 가상세계에서 움직이는 것이다(저번에는 어떤 드워프 광산 동굴에 다녀왔다).
뭐 이것도 재미있지만, 누가 뭐래도 자타공인 VR의 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는 비트세이버(Beat Saber)다. 양손의 컨트롤러는 광선검이 되고, 앞에서 박자에 따라 날아오는 노트를 쪼개버리는 리듬게임이다. 진짜 초창기에 이 회사가 프로토타입을 트위터에 공개했을 때 '와 재밌어보인다'하고 본 기억이 있는데, 이렇게 잘 될 줄은 몰랐다... Holofit도 재미지지만 비트세이버의 중독성은 정말... 정신차리면 땀이 비오듯 나고 이두가 고장나있다.
인간은 선천적으로 움직이도록, 움직여야 잘 굴러가고 움직여야 행복해지도록 설계되어 있다고 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운동을 하지 않는다. 나만 해도 체육시간을 싫어하던 사람이었고, 여전히 그렇다. 하지만 비트세이버 같은 게임은 나같은 사람도 찾아서 하게 되고, 이런 VR 게임들의 리뷰를 보면 생각보다 중년/노년층의 호평이 많다(물론 대부분 영어 리뷰다) - 원래는 뭐 게임은 어렵고 나가는 건 귀찮고 해서 이런 거하곤 거리가 멀었는데, 자녀들이 세팅해주고 나니까 재밌어서 계속 하고 있다 - 같은 리뷰들.
사실 손만 까딱하면 고농도의 도파민을 얻을 수 있는 현대 사회에서 재미만을 위해 신체활동을 하기에는 꽤 거슬리는 요소가 많다. 대부분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않고, 누군가와 겨뤄야 하거나, 같이 할 사람들이 필요하거나, 특정한 공간으로 가야 하거나, 운동에 맞는 장비를 구비해야 한다. 반면 VR은 내가 좋아하는 활동을, 나에게 맞는 환경에서, VR장비 하나로 입문할 수 있다. 진입장벽이 있다면, 서서 팔을 휘둘러도 부서질 것들이 없는 방 공간이 필요하다는 것 정도.
이것이 개인 맞춤형 생활 체육의 미래가 아닐까? 시장만 커진다면 더 다양한 취향을 만족시킬 수 있는 창의적인 앱들이 나올 수 있는 여지는 아직 많다고 생각한다.
한편, Quest 2가 극강의 가성비와 스펙으로 VR 대중화의 포문을 열었다는 말이 많지만, 여전히 VR이 대중화되었다라고 하기에는 거리가 멀다. Quest 2는 Meta가 "누군가는 해야하잖아"를 외치며 제 살 깎아먹으면서 만든 프로덕트라는 게 정설이지만, Meta가 VR 슨배님 대접을 받냐 하면 별로...ㅎㅎ Meta의 안좋은 이미지 + 메타버스 트렌드가 가라앉음 + 여전히 무겁고 우스꽝스러운 기기 + 아직 부족한 킬러앱 등의 여러가지 이유로 VR이 대세가 되는 건 하드웨어/소프트웨어의 추가적인 혁신 없이는 어려워보인다.
어쨌든 VR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아무 빅테크든 좋으니 VR 버리지 말고 계속 멱살잡고 끌고가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