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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익스피어 Jun 21. 2024

[제단글] 샘플이 없는 자유로움

앱 제시단어 : 샘플

[제단글 : '제시단어로 글쓰기'의 준말. 제시 단어를 앱(RWG)을 통해서 받으면 그 단어를 주제 또는 소재로 하여 글을 쓰는 것.]

- 앱 제시단어 : 샘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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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어줍지 않지만 베트남 호치민에서 뭔가 사업 거리를 만든 적이 있었다. 한국의 꽃부자재를 베트남의 부유층에 파는 일이었는데, 결과적으로는 잘 되진 않았지만 그 당시엔 꽤나 열심이었다.


3번째로 호치민에 가면서, 캐리어에 꽃부자재 상품의 샘플을 꽤나 많이 가지고 들어갔다. 그 전에 컨테이너 박스를 사용하여 배송시켰을때 같이 보냈으면 좋았겠지만, 인생이란 항상 계획 이외의 일들이 생기기 마련.


공항에 도착해 2시간이나 기다려야 했던 여권 심사가 겨우 끝났다. 5시간의 비행과 2시간의 기다림에 지친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컨베이어 벨트 옆에 아무렇게나 널부러져 있는 내 캐리어. 공항 직원들은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계속 돌고 있던 내 짐을 그냥 휙 하고 바닥에 던져버렸던 듯 하다.


뭐, 됐다. 짐을 잃어버리지 않은 것이 어디야?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짐들을 챙겨 나오는데, 갑자기 세관 직원이 나를 잡는다.


"Open this Carrier! Need to check."


전수조사가 아닌 샘플링 조사이긴 하지만 간혹 짐 검사를 하는 경우가 있다고는 했는데, 내가 딱 걸려버린 것이었다. 많이 지쳤고 여권 심사 때문에 짜증도 난 상태에서 짐 검사까지 받게 되니 눈에 불끈 쌍심지가 켜진다. 아놔!


하지만, 베트남과 같은 사회주의 국가에서 공안에게 잘못 보이면 입국조차 해보지 못하고 쫒겨나게 될 수도 있다. 쌍심지는 무슨! 세관 직원의 눈치를 보며 사회적 웃음과 함께 캐리어를 열었다.


그러자 보이는 꽃 부자재 샘플들. 세관 직원은 의기양양한 얼굴로 뭐라뭐라 얘기한다. 처음엔 뭐라고 하는지 잘 알아듣지 못했다. 그런데, 몇 번 들어보니까 들리는 몇 개 단어가 있다.


Sample. 그리고 Dollar.


캐리어로 상품을 가지고 들어오면 안된다며 벌금을 달러로 내랜다. 오잉? 뭐라고? 그걸 왜 돈을 내?


그런데, 생각해보니 판매용 물품의 경우 세관 신고 사항에 들어가긴 했던 것 같다. 이런 사업을 처음 해보다 보니 그런 기초 지식도 없었던 것. 보통은 신고를 하지 않고 통과하는 경우가 많고 잘 걸리지 않긴 하지만, 원칙은 세관 신고 대상이긴 한 것이다.


"젠장, 오늘 정말 되는 게 없네!"


그런데, 세관 직원은 나의 위반 사항 적발을 자신의 주머니를 채우는 기회로 여기는 듯 했다. 서류도 적지 않은 가운데 막무가내로 자기에게 달러를 달라는 세관 직원에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별 수 없이 그녀에게 $3-40 정도를 현금으로 지불하고 나서야 풀려나올 수 있었다.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운이 안좋았다고 한다. 보통은 잘 안걸리긴 하지만 세관에서는 용돈 벌이로 그런 캐리어 조사를 한다는데, 그 샘플링에 내가 걸려버린 것이었다. 어이가 없는 하루였지만 그때는 말 그대로 운이 안좋은 날이었나보다 하고 넘겼다.


그런데, 그 일을 잊을 만큼의 시간이 지난 얼마전, 나는 내가 자주 듣는 팟캐스트에서 남들이 아직 해본 적 없는 길을 가는 사람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어릴 때부터 만년필을 좋아하여 전세계의 모든 만년필들을 공부하고, 구해서 써보고, 고장난 걸 고치며 즐거워하는 삶을 살기도 했다. 그 분은 지금 만년필을 아무도 쓰지 않을 것만 같은 2024년에 새로운 만년필을 제작하고 있다.


아무도 아직 가보지 않아서 샘플도 없고 참고할 것도 없는 그러한 세계. 웬지 멋져 보이지만, 47세의 경험은 나에게 '매우 힘든 일'이라고 조언한다.


그런 이야기를 듣다 보니, 내가 이제껏 살아왔던 삶을 반추해 보게 된다. 난 이제껏 어떤 삶을 살았을까?


초중고대를 거쳐 직장에 다닐 때 까지는 남들이 가본 길을 따라 걸었다. 나보다 먼저 해본 사람들이 많았고, 그 중에서 가장 안정적이고 성공 가능한 길을 따라가기 위해 노력했다. 그 중에 꽤나 성공했던 사람들은 샘플링되어 나 같은 후배들의 본보기가 되었다.


나이 40. 나는 반대 방향으로 내 길을 전환했다. 나는 내가 해보고 싶은 것들을 하며 돈을 벌어 살아 보기로 한 것이다. 여기서부터는 남들이 잘 가지 않던 길이었다. 물론 이 길에도 선배들은 있었지만 그 수가 적었고, 결국 나 자신의 고민을 통해 해결해 나가야 하는 것들이 훨씬 많았다. 뭣 하나 쉽게 되는 일이 없었다.


물론, 나는 아직도 그 길위 어딘가에서 헤메고 있기도 하다.


난 언제가 더 행복했을까?


전자는 경주마 같은 삶이었다.


나나 남들이나 크게 다를 바 없는 학생이었고 회사원이었다. 매일 공부했고, 매일 일했다.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자지 않고 공부했고, 높은 연봉과 승진을 위해 내가 가진 대부분의 시간을 쏟아부었다.


후자는 초식 동물 같은 삶이었다.


능력도 가진 것도 변변치 않은 상황에 맨몸으로 부딪힌 바깥 생활은, 아무도 믿을 수 없는 무서운 세계였다. 내 생명을 위협하는 포식자도 무서웠지만, 조그마한 벌레 같은 작은 사건에도 나와 가족의 내일을 걱정해야 했다. 그래서 항상 미래가 불안했다.


나로선 이 두 가지 중에서 후자가 더 행복했다.


좋은 선택인지 확신할 순 없다. 뭐든지 장점만 있는 선택이란 없으니까.


다만, 두 눈의 양 옆을 가려놓고 앞만 보며 달렸던 경주마 시기엔 고민할 시간적 여유도 없었고, 왜 달려야 하는지 조차 생각하기 힘들었다. 보상은 있었지만, 그 보상은 내 삶을 열심히 살았다는 것에 대한 인정이라기 보다 힘들게 일한 것에 대한 위로에 가까웠다.


후자를 선택해서 살고 있는 지금의 삶은? 내가 해보고 싶은 것들을 하려 노력하고 있으니 거기서 오는 만족감은 있는 편이다. 또한, 삶에 대한 나름의 기준을 가지고 살고 있기 때문에, 적어도 남들이 보기에 성공한 삶에 나를 맞추는 일은 없다. 집도 돈도 그런 기준에 못미칠지 모르지만, 적어도 내가 현재를 행복하게 살아가는 데는 부족함이 없다.


생각해보면, 좀더 자유로워진 느낌이다.


물론, 지금도 미래를 불안해하며 뭔가 새로운 걸 해야 한다는 압박은 항상 느낄 수밖에 없긴 하지만. 그런 불안감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라 그저 숙명이라 여긴다.


안정적인 삶과 하고 싶은 걸 하는 삶.

인정받는 삶과 자유로운 삶.


다른 사람들은 어떤 선택을 하며 지내나 궁금해지는 오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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