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안 부두술'에서 '아시안 섹시가이'로

영화 <프리키 프라이데이 2> 감상 후기(를 빙자한 짧은 생각)

by 얕은생각
G0O3fBubAAAE8Ey?format=jpg&name=medium 출처: 영화 <프리키 프라이데이 2 (2025)>

2003년 작 <프리키 프라이데이> 1편이 애인님의 유년 시절을 함께한 작품이란 얘기를 듣고 디즈니 플러스에서 급하게 예습, 바로 다음 날에 함께 극장에서 2편을 관람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려서, 극장 안에서 저희 커플 웃음소리가 가장 컸을 정도로 너무 재미있게 시청했죠. 디즈니 최고의 강점인 '가족의 사랑'이란 메시지를 관철하고 확장하는 솜씨가 훌륭했고, 바디 스왑 장르 특유의 연기 차력 쇼를 보는 재미도 쏠쏠했는데요.


그런데... 제가 22년의 간극을 생략하고 연달아 1, 2편을 감상해서 그럴까요? 굉장히 인상 깊고 중요한 변화 하나를 강하게 체감할 수 있었으니, 그건 바로 <할리우드 영화 속 아시안의 달라진 위상>이었습니다.

G0O3rdaacAAtlaV.jpg 출처: 월트 디즈니 컴퍼니

2003년 작 <프리키 프라이데이>에는 아시안 관객으로서 마냥 재밌게만 볼 수 없는 설정이 하나 있습니다. 사이 안 좋은 두 모녀의 영혼이 바뀌는 원인이, 참견 좋아하는 중국인 할머니의 "아시안 부두술 (Asian Voodoo)"이었기 때문이죠 (네... 실제 대사가 저겁니다). 백인 남성과의 재혼 과정에서 벌어진 백인 모녀의 갈등을 해결하는 계기가 오리엔탈리즘 범벅의 신비한 아시안이라니, 재밌게 감상하다가도 자꾸 목구멍의 가시처럼 쿡쿡 거슬리는 요소였는데요.

G0O349MbMAEVx4L?format=jpg&name=4096x4096 출처: 영화 <프리키 프라이데이 (2003)>

그런데 이번 <프리키 프라이데이 2>는? 일단 주인공 엄마의 재혼 상대인 '에릭 레예스'가 아시안입니다. 누군가는 <굿 플레이스>의 '지안유 리'로, 누군가는 <애콜라이트>의 '카이미르'로 기억할 필리핀계 캐나다 배우 '매니 자신토'가 연기했죠. 첫눈에 반할 정도의 외모에 몸도 좋고, 셰프 커리어도 탄탄하고, 결정적으로 딸과 예비 아내를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완벽 그 자체의 캐릭터로 나옵니다 (심지어 춤도 잘 춥니다! 본체 배우가 댄서 출신이라 그런 것도 있겠지만요).


배우 '소피아 해먼스'가 연기한 에릭의 딸 '릴리 레예스'는 또 어떤가요? 출중한 외모와 스타일링 능력, 말끝마다 '영국은 말이야~'를 붙이며 추종자를 거느리고 다니는, 하이틴 영화 필수 캐릭터 '밥맛없는 공주병 퀸카'로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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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영화 <프리키 프라이데이 2 (2025)>

그리고 2편에서 몸이 바뀌는 계기를 제공하는 사이비 점성술사 역할은 SNL 출신 배우&코미디언 '바네사 베이어'가 맡았습니다. 1편에서 '아시안 부두술'을 걸었던, 이름조차 없어 '페이페이의 엄마'라고 크레딧에 올랐던 중국인 할머니(배우 루실 쑹)는 F&B 사업으로 승승장구하고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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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영화 <프리키 프라이데이 2 (2025)>, <프리키 프라이데이 (2003)>

굉장히 놀라운 변화 아닌가요? 만약 2000년대 초 할리우드에서 "백인 엄마의 재혼 상대인 섹시 중년남과 학교 최고 퀸카 역할로 아시안을 캐스팅하는 건 어떨까요?"라고 누군가 제안했다고 생각해 보면...


...아, 아예 그런 제안조차 나오지 않았을 가능성이 더 크겠네요.


그렇다면 이러한 변화를 가능하게 한, <프리키 프라이데이> 1편과 2편 사이의 '미싱 링크'는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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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에픽하이 유튜브 채널에 올라온 한국계 배우 겸 제작자 '대니얼 대 킴'의 인터뷰 영상을 시청했습니다. 본인이 제작자이자 주인공으로 참여한 드라마 시리즈 <버터플라이>의 홍보차 한국을 방문한 것이었는데요. 여기서 타블로의 멘트가 굉장히 인상 깊었습니다.

G0O7He_acAAA8N0.jpg 출처: 드라마 <로스트 (2004)>
옛날에 미국에서는 아시안 남자의 이미지가 나(타블로)였어.
작고, 약하고... 약간 ㅈ밥?
근데 형(대니얼 대 킴)이 그 이미지를 좀 바꿔줬어.
섹시하고, 세고, 강하고.

대니얼 대 킴이 드라마 <로스트>에서 권진수 역을 맡기 시작한 게 2004년. 공교롭게도 <프리키 프라이데이> 개봉 1년 후였죠. 참고로 같은 드라마에 한국인 배우 '김윤진'도 출연해서 엄청난 활약을 보여줬던걸, 제 동년배분들은 대부분 기억할 겁니다.


그리고 20년 이상의 시간이 흐른 후, 배우 대니얼 대 킴과 김윤진은 영화 <케이팝 데몬 헌터스>에서 각각 한의사 '허준봉'과 선대 헌터 '셀린' 역할을 맡아 명품 조연 연기를 선보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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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영화 <케이팝 데몬 헌터스>

아시안 불모지였던 할리우드에서 맨땅에 헤딩하며 커리어를 쌓아나갔던 그들이, 한국의 문화를 메인으로 하는 대자본 애니메이션에 출연하고, 그 작품이 감히 수식어를 붙이기도 민망할 정도의 대성공을 거둔 겁니다.


그들의 심정이 과연 어떨지... 저로서는 감히 헤아리기도 어렵네요.


위의 인터뷰에서 미쓰라 진은 대니얼 대 킴을 두고 '선구자'라고 표현하는데요. 그 표현에 저 또한 깊이 동감함과 동시에, 이분을 비롯한 수많은 '선구자' 분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한국의 위상을 드높여서? 한국의 문화를 세계에 널리 알려서? 그런 거창한 이유가 아닙니다. 이런 분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저 같은 덕후 관객과 시청자들이 더욱 풍부하고 재미있는 콘텐츠를 즐길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죠.

G0O7lDhasAAe9IC?format=jpg&name=4096x4096 출처: Celine DaHyeu Kim
"평가를 내리는 건 머리지만 재미를 느끼는 건 가슴이다"
"그리고 그 재미는 관객이 '나의 이야기'라고 느낄 때 생긴다"

제가 일전 <퇴마록> 리뷰 때 남겼던 코멘트입니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흥행 덕에 이 말에 공감할 분들이 많이 늘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런데... 온갖 편견과 혐오적 표현으로 덕지덕지 된 이야기를 만들어 놓고

"이거 봐! 너희들의 이야기를 우리가 만들었어^^"하며 보여준다면? 이럴 때 따라오는 건 '재미'가 아니라 '불쾌함'이겠죠. 그렇게 아시안과 아시아 문화에 덧씌워진 편견의 얼룩을 지우고, 그 위에 우리가 가진 다채로운 색깔을 칠해온 것은 앞서 언급한 수많은 선구자분들이었을 텐데요.


그리고 2025년이 된 지금, 그분들 덕에 우리는 '아시안 부두술'을 쓰는 이름조차 부여받지 못한 중국인 할머니 대신, '아시안 섹시가이' 매니 파신토의 명품 연기를 감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G0O4f_OakAAOpYl?format=png&name=900x900 출처: 영화 <프리키 프라이데이 2 (2025)>

척박한 땅을 일궈낸 수많은 선구자분과

그 땅 위에 꽃을 피워내고 있는 분들,

그리고 선구자들의 길을 따라 걷기 위해

노력하는 미래의 아티스트분들까지


모두에게 진심 어린 응원의 말씀을 드리며 글을 마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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