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산은 Jan 05. 2019

미네소타 공항 풍경

그리 크지 않은 키에 마른 체구의 남자다.  


오른쪽 어깨에는 꽤나 큰 까만색 카고백을 들쳐 메고 부지런히 걸으며 이야기한다.  아침 이른 시간이지만 사람들이 붐볐다. 나는 비교적 여유 있게 공항에 도착하여 가방을 끌며 지하통로를 통과하고 있었다.  전동열차가 서는 정거장과 탑승 수속 창구를 연결하는 지하통로에는 부지런한 발걸음들이 교차하고 있었다.  무빙워크 시설이 있지만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는 사람들이 오히려 많아 아침의 활력을 더하고 있다.  밤사이 충전한 에너지가 사람들에게서 느껴졌다.  처음엔 웅성거림이었다. 낯선 공간에서 분화되지 않고 뭉쳐진 소리였다.  몇 마디 말이 귀에 익으니 또렷하고 조리 있는 설명이 들렸다.

  

“그러니까 말이야. 내 말 잘 들어. 비행기 타는 곳을 가려면 검색대를 지나야 해. 가방과 사람 따로따로 들어가지. 넌 아무것도 가지고 들어 갈 수 없어. 네 손에 있는 컵도 안돼. 네가 가진 모든 것을 트레이에 올려놓고 짐이 통과하는 검색대에 집어넣을 거야. 그것들은 천천히 움직이며 앞으로 나아가지.  넌 같이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옆에 사람이 통과하는 문이 있단다. 그 앞에 서서 기다리면 안쪽에서 제복 입은 사람이 들어 오라 손짓할 거야. 그 사람은 나보다도 클 거야.”  전동열차에서 내린 한 무리 학생들이 뛰듯이 지나갔다.  시간에 쫓겨서라기 보다는 들뜬 마음이다.  작은 그룹이지만 단체 여행을 떠나는 것 같았다. 그 발걸음과 말소리가 천정으로 솟아올랐지만 충분히 높은 공간에 빠르게 흡수되고 있었다.  “웃지 않을 수도 있어. 그 사람들 말을 잘 들어야 해.  들어오라 하면 당황하지 말고 천천히 들어가면 돼. 막대기 같은 봉으로 네 몸을 쓰다듬을 수도 있지.  놀래지 마.  널 때리는 것이 아니고 네 몸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 살펴보는 거야. 전자 봉이라고 하지. 전혀 아프게 하지 않을 거야.  겁내지 마. 다시 말하지만 너 혼자 들어가는 거야. 알았지? 누구도 널 도와줄 수 없어. 네가 잘하면 한 번에 통과할 거야. 넌 잘할 수 있어.” 혼자 이야기는 아닌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공항엔 사람들이 더 늘어나고 있었다. 공간을 흐르게 하는 것은 결국 사람들이지.  방학을 맞은 학생인 듯한 젊은이들도 군데군데 들꽃 무더기처럼 서 있고, 어딘가로 떠나는 큼지막한 가방을 내려놓은 군인들도 보였다.  먼지를 뒤집어쓴 색깔의 군복은 사막이나 이라크 전쟁을 위한 디자인 같았다.  많은 사람들과 흐르는 공간에서도 어떤 말은 또렷이 들리고 시선과 호기심을 끈다.  말하는 사람의 열정일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남자가 보였다.  


열정은 어떤 환경에서도 스스로를 차별화하는 힘이 있다. 다양한 빛으로 공간을 채우던 레이저 쇼를 본 기억이 있다.  여러 레이저 광선들이 어지럽게 지나가며 시선을 붙잡지만 한 두 색에 눈이 꽂히고, 쇼가 끝나도 그것은 한동안 눈에 남는다. 그 목소리가 바로 그랬다.  많은 소음들 속에서도 새벽 햇살처럼 살았다. 가만 보니 그의 앞에는 한 발자국쯤 앞서 다른 한 사람이 걸어가고 있었다.  이제 보니 그는 앞선 사람을 따라 쫓아 걸으며, 가방을 들지 않은 다른 한 손을 열심히 움직이며 설명하고 있었다. 보폭 차이인지 앞선 사람은 그리 서두르며 걷지 않는데 뒤쫓아가는 사람은 잰걸음을 하고 있다. “사람들이 줄을 많이 서 있을 거야. 하나하나 들어가길 기다려야 하지.  누구나 거길 통과해야 해. 거길 통과하지 않고 아무도 비행기를 탈 수 없어. 다시 한번 이야기 하지만 너 혼자 지나가야 하는 거야.”  


교차하는 인파 사이로 자세히 보니 앞선 사람이 아이를 안고 가는 것이 보였다. 네댓 살쯤 보이는 사내 아이다. 열심히 설명하는 남자는 삼촌쯤으로 보였다.  아하 남자는 저 꼬마에게 비행기 타는 방법을 알려 주고 있었구나. 아이는 별로 귀담아듣고 있지 않았다.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며 눈길을 주는 것이 공항의 낯선 광경에 그저 들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많은 설명을 집중하여 듣기엔 아무리 봐도 너무 어린 나이였다. 그러나 남자의 설명은 계속 이어졌다. 더 늘어난 사람들에 가려 모습이 보이지 않아도 웅성거림이 커져도 낯익은 목소리는 끊이질 않았다.  의식을 깨우던 새벽바람 같던 호기심이 천천히 미소로 바뀌었다. 


참 좋은 삼촌에 무심한 조카로군. 그 남자의 조카 사랑과 진지함이 잔잔한 파동으로 전해졌다.  보이지 않아도 사람들을 투명하게 건너고 따뜻하게 다가오는 적외선 파동이다.  그것은 첫 내린 커피 향 퍼지듯 공항 가득 피어올랐다.  아이에게 삼촌은 삼촌에게 조카는 얼마나 아름다운 축복인가.  미네소타 공항에 아침 햇살이 가득했다. 


-이른 아침 미네소타 공항에서


글/이산은

매거진의 이전글 여수, 흩어짐과 이어짐이 아름다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