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정의가 '오래 참음'이라는 희생을 동반하는 것임을 선포하기에, 쉽고 예쁘고 짜릿하고 설레는 감정만을 '사랑'이라고 여기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반갑지만은 않은, 재미없는 구절일 수 있다.
그럼, 기독교가 정의하는 사랑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어떨까. 포용하고, 따뜻하게 감싸주고, 허물과 죄는 눈감아 주는 것.
'희생'에 대해서 많은 가르침을 받지 않았을까.
그러나, 내가 요 근래 이야기하고 싶은 사랑이란,
예쁜 핑크빛의 설렘의 찌릿찌릿 사랑도 아니고,
내 글에 자주 표현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희생의 사랑이 아닌.
'질서'에 관련한 사랑이다.
사랑에 반드시 필요한 요소, 질서에 관련한 이야기.어쩌면 이 험악한 시대에 가장 필요한 사랑에 대하여다.
오늘의 성경 말씀을 보고 무릎 탁.
기독교인이라면서 응당 용서해야지. 기독교인은 사랑해야지. 용서해야 마땅하지.
이 같이 개나발부는 소리를 가해자에게서 들은 적이 있는가?
참 신기하게도, 수많은 가해자들이 인권을 핑계로 감형을 요구한다. 또한, '기독교=사랑'이라는 어쭙잖은 핑계로 용서를 강요하기도 하는데, 그와 같은 파렴치하고 적반하장인 태도는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라는 의문에 나는 오랜 시간 동안 논문과, 서적과, 영화와, 말씀, 등등을 뒤져보며, 사람이 도대체 어떠한 마음을 먹으면 이 같은 개소리를 할 수 있을지에 대한 내 나름대로의 연구를 거듭하게 되었다.
얼마 전에 종영한 드라마 '하이에나'에서도, 꼭 나의 마음을 대변해주는 듯한 대사.
개사이다 혜수언닝
영화 밀양에서 전도연은, 남편을 잃은 과부가 되었다.
하나뿐인 아들과 함께 작은 새 시작, 새 출발을 원하여 밀양에 터를 잡았는데, 그곳에서 자신의 아이마저 살해당하게 된다. 아들을 잃은 그녀는 고통 속에서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다시 일어나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의 아들을 살인한 가해자를 찾아가 "용서할게요."라는 말을 전하려 교도소에 방문하게 된다.
그런데 면회에서 만난 살인자는, "저도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이미 용서받았어요. 용서를 이미 하나님께 받았으므로, 나는 당신에게 용서받을 필요가 없습니다."라는 개나발을 분다.
그와 같은 가해자의 개소리에, 전도연은 깊은 빡침을 넘어, 정신이 아주 나가게 된다.
과연 그럴까?
과연, 가해자는 하나님께 용서를 받았으니, 그것으로 모든 죄가 사하여진 걸까?
기독교는 그렇게 뻔뻔한 종교일까?
사실 영화 밀양은 영화 자체로는 '기독교'를 모티브 삼아 충분히 철학적이고 예술적이지만, 반기독교적인 사상을 담은 영화이다. 용서의 왜곡된 모습만을 조명하고, 기독교가 가진 이중적인 모습을 비꼬아, 참된 용서와 치유의 의미와 과정은 담지 않았다.
기독교 세계관에서의 '용서'라는 것은 그렇게 간단한 하나의 결과물이 아니다.
'너를 용서해줄게, 그러니 너의 죄는 모두 다 없어졌어.'라는 '망고 땡!!' 끝맺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피해자가 끊임없이 요동치는 마음속에서, 지금도, 내일의 미래에서도 끊임없이 뼈와 살을 깎는 듯한 고통으로 용서라는 마음을 선택하고 또 선택하는 모든 의지의 과정이다.
'너를 용서해줄게.'라는 것은 매일매일 그 과정을 겪는 아픔 속에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죽을 만큼의 용기를 내어서 '선'을 택하겠다는 결심이다.
용서란 그리 간단한 단어나 결과가 아님에도,
생각보다 많은 가해자들은 피해자들에게 '용서'를 강요하고 있다.
'왜 가해자들은 이런 개나발을 부는 것일까?'
나의 오랜 고민에, 정신과 선생님은 위와 같은 사람들의 특징은 본인의 피해에 극도로 민감해하며, 타인의 고통은 공감하지 못하는 전형적인 '소시오패스'라는 의견을 주셨다.
이런 사람들에 대한 소식과 연구는 생각보다 우리 주변에서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데, 이번 N번방 사건의 가해자들, 엎드려서 싹싹 빌어도 모자랄 판에, 아스퍼거 증후군이라니, 심신 미약을 주장하며 오직 감형만을 원하는 태도에 대중은 더 크게 분노하고 있다.
비슷한 사례는 성경에서도 볼 수 있는데, 인류 최초의 살인사건의 가해자와 피해자인 가인과 아벨 사건에서도, 우리는 가해자의 극도의 파렴치함을 볼 수 있다.
살인을 저지른 가인에게 하나님이 물어보신다.
"얘 가인아, 니 동생 어딨냐?" (알면서도, 다시 한번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
그랬더니 이놈의 가인이,
"아니, 내가 동생 지키는 업무라도 맡았나요?!"라고 대꾸하며 하나님께 도리어 성을 낸다.
죄책감 따위는 1도 보이지 않는 태도에 한술 더 떠, 가인은 억울해한다.
"하나님 제가 잘못했어요!!! 제가 동생을 죽였어요, 너무 미안해요, 어떡하죠? 흑흑" 하고 참회해도 모자랄 판에, 동생을 오히려 성가신 존재라며 하나님께 책임을 돌렸고, 그에 따른 벌도 너무나 크다며 억울해하고 난리 치는 모습이다.
(저는 이 글을 쓰면서도 부들부들.)
그럼에도 개나발부는 아저씨
응, 아니야.
죗값은 절대로 가해자가 정할 수도, 판단할 수 없다.
엄마와 아이가 같이 산길을 가다가 곰을 만났다. 아이를 붙잡아 죽이려는 곰을 엄마가 막아섰고,엄마는 팔다리가 찢겨서 선혈이 가득한 모습으로 ‘얘야.. 얼른 도망가라. 너는 빨리 가서 살아야 해.’ 하고 외쳤다.
그런데 엄마로 인해 겨우 도망쳐서 살아난 그 아이가, ‘나 엄마 때문에 살았다~~’ 하면서 웃을 수는 없는 것이다.
용서는 그와 같은 마음이다.
나의 아픔이라는 희생을 통해 상대를 해방시켜주겠다는 의지다.
그러므로 가해자가 용서를 받았으니 괜찮다는 소리는 개나발이다.
가해자는 피해자가 온전하게 삶을 다시 이어갈 때까지, 아니, 피해자가 죽는 날까지 사죄하는 것이 올바른 태도이다. 그러므로 가해자는 피해자 앞에서 인권을 주장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은 참회하지 않았다는 또 다른 반증이며, 피해자를 두 번 죽이는 태도다.
사랑과 질서는 동전 양면과도 같은 것이다.
진정한 사랑은 불의와 함께할 수 없다.
사랑과 거짓은 함께할 수 없다.
질서가 없는 사랑은 병든 것이며, "사랑하면 용서해. 사랑하면 희생해야 해."라는 소리는, 상대방이 아닌, 오직 나 자신에게 적용시켜야 하는 말이다.
그 누구도 강요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스캇펫, 거짓의 사람들
불의와 거짓이 섞인 사랑은 사람을 혼돈시키며, 영혼을 파괴한다. 그것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거나 속이는 행위는 애초부터 사랑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하다.
맞다.
그러나 사랑의 모든 전제는,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 것이 기반되어야 한다.
질서가 동반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제발,
가해자들에게는 큰 벌이 내려지면 좋겠다.
다시는 개나발 불며 나불대지 못하게 말이다.
제발.
제발제발제발제발.
Ps. 몇 시간째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게 되는 책. 스캇 펙의 거짓의 사람들을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