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리야, 7시까지 와~ 우리 맞춰봐야 해.”
정작 나는 이렇게 혜리에게 말해놨는데. 이미 6시 46분. 30분에 끝냈어야 했는데 16분이나 더 지났다. 이렇다니까. 착하고 열정적인 학생과 수업을 하다 보면 늘 이렇게 시간이 오버된다.
“안녕히 가세요~”라고 고개 숙여 인사하는 학생을 뒤에 두고 "어 쌤 갈게~." 급하게 대충 인사를 하며 휴대폰을 꺼내본다. 그런데도 아침부터 지금까지 답이 없는 혜리. 답답한 마음에 통화 버튼을 눌렀다. 다행히 세 번의 신호음 뒤, ‘어~ 스더야~’ 그녀 특유의 해맑고 애교 섞인 말투에 답답했던 마음이 풀린다. “문자 봤어? 나 지금 끝났어.” 이윽고 그녀 옆을 지나가는 차 소리. “으응, 나도 가는 길이야, 근데 나 갑자기 일이 잠깐 좀 생겼어, 이따가 보면 얘기해 줄게~” 라는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전화가 끊겼다.
“아 씨, 모야.” 혼자 투덜대며 구베이 홍송동루에 위치한, 오늘도 익숙한 그 건물로 천천히 들어섰다. 혜리는 보나마나 오늘도 늦게 오겠네. 문이 닫히는 엘레베이터 안에서 잠시 고민을 하다가 아리네스로 가는 2층이 아닌, 3층을 눌렀다. 배고픈데 밥이나 먼저 먹어야지. 한마당에 들러 입구에서 가까운 4인용 테이블에 혼자 앉았다. “是一位吗?(혼자 오셨나요?)” 메뉴판을 들고 온 종업원의 질문에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들릴까 말까한 소리로 "是。我要全州拌饭。"(네, 전주 비빔밥주세요.)라고 주문했다. 먼저 나온 밑반찬들 중에서 내가 좋아하는 시금치 한 젓가락을 먹으며 주위를 둘러보니 정말 예전 같지 않다. ‘그 놈의 싸드가 뭔지. 한마당 사장님 속상하시겠다.’ 말 하지 않았는데도 알아서 많이도 주신 고추장을 밥에 비비며, 왼손으로는 괜히 바쁜 척 핸드폰을 끄적이며 혜리에게 다시 문자를 보냈다.
'빨리 와.'
**
오늘도, 아직도, 역시나 튜닝이 되어있지 않은 ‘레’를 누르며 답답해하는 나. ‘휴우, 그래도 야마하 그랜드 피아노니까 봐준다.’ 반쯤 입으로 웅얼이는 그 때, 저 쪽에서 혜리가 "스더야~ 나 왔어~" 라고 부른다.
오늘도 지각인 혜리. 아마 혜리에게 시계란 팔에 차는 팔찌 정도인 것 같다. 그래도 이상하게 그녀의 반짝이고 말랑말랑한 목소리와 한 없이 순수한 얼굴을 보면 화를 내려다가도 이내 기분이 좋아진다.
오늘도 마찬가지.
"스더야~ 나 있지 오늘 길냥이끼리 싸우는거 말리다가 여기 긁힌거 봐."
화는 커녕 걱정부터 되었다.
“바보야, 걔네 싸우는걸 니가 왜 말려. 어디 봐봐, 헐, 야 너 약은 발랐어?” 피아노에서 벌떡 일어나 그녀가 있는 곳으로 다가가니 오히려 그녀는 해맑게 씨익 웃는다. “괜찮아 집에 가서 후시딘 발랐어. 아까 걔네 싸울 때 너 전화와서.. 미안 제대로 못 받아서.”
“으이그, 이 것아. 여기.” 나는 그녀에게 늘 지갑에 지니고 다니는 대일밴드를 건네주었다. 테이블 위에 아무렇게나 올려둔 그녀의 가방과 악기 사이에 슬쩍 껴있는 새로운 악보도 발견하였다. 기특하게도 그녀는 그 와중에도 우리가 오늘 공연할 곡들을 생각하긴 했나 보다. “어, 팔레트다!!! 와, 이거 우리 오늘 해?” 대일밴드 붙이는 것도 낑낑대며 팔꿈치 언저리를 뒤적이는 그녀. 이런 애가 밥은 어떻게 먹을까 싶기도 하다. 다시 새 것을 꺼내어 그녀 왼쪽 팔꿈치에 붙여주었다. “히히 고마워. 나 요즘 이 노래 너무 좋아.” 역시, 이래서 우리는 친구인가보다. “콘티 짜자.” 팔레트와 더불어 함께 마주 앉아 우리가 늘 해오던, 그리고 오늘 하고 싶은 곡의 제목들을 써 내려갔다.
악보를 따로 보지 않아도 눈만 마주치면 자판기처럼 툭툭 튀어나올 수 있는 곡들, 이름하여 ‘혜리 스더 레파토리’가 어느 덧 50곡이 넘는다.
“우리 오늘 팔레트는 엔딩으로 하고… 아 지금 벚꽃 엔딩 하면 너무 덥겠지?” 그녀의 물음에 웃음이 났다. “어, 지금은 소나기 해야지” 그리고 나는 까만 야마하 피아노 옆으로 다가가 ‘라’를 누르며 혜리의 튜닝을 도왔다. 그녀의 턱에 바이올린이 ‘딱’ 걸려지자마자 혜리의 눈빛이 달라진다. ‘라---라—‘ 활 질을 하며 "근데 이 피아노 튜닝은 언제 한대? 그래도 ‘라’말고 차라리 ‘레’가 튜닝이 안된 게 다행인 것 같아."
그렇게 한참 리허설을 하고 있을 때쯤, 손님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 노래 부르라고 설치된 피아노 옆마이크를 잡고 최대한 밝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아리네스에 오신 여러분들을 환영합니다. 저희가 지금 리허설 중인데요, 본 공연은 9시 20분부터 시작됩니다. 더 좋은 공연을 보여드리기 위해 지금 들려드리는 곡들은 실수가 있을 수 있는데요, 예쁘게 봐주세요.” 마이크 스위치를 끄고 고개를 돌려 혜리에게 말했다. “우리 이제 대충 마무리 지어야겠다.”
무대에서 내려와 냉장고에서 맥주 두 병을 꺼내어 병따개로 딴 뒤, 혜리에게 한 병을 건네주는데 혜리가 “음 나는 그냥 이따가 마실래.” 란다. “맥주는 배불러서 나 무대 올라갈 때까지 두 병 못 마실 텐데.” 그러자 혜리가 휴대폰을 내게 보여주며 말했다. “왔네. 마실 사람.”
3분도 지나지 않아, 저 쪽에서 우월한 키를 가진, 멀리서도 긴 머리 찰랑 웨이브를 뽐내며 날씬한 여자가 또각 또각 걸어왔다. 민영이다. 하늘거리는 아이보리 쉬폰 블라우스와 함께 살짝 비치는 까만 언더웨어, 달라붙는 네이비 하이웨스트 H 스커트가 그녀의 S라인을 더 돋보이게 한다. 거기에 은은한 인디 핑크 하이힐과 깔맞춤한 멀버리 토드백, 그리고 풀메이컵까지. 원래도 예쁜데, 오늘은 더 예쁘다. 민영이가 우리 테이블에 앉자마자 물었다.
“야, 남자는?”
“야. 됐어. 술 줘. 술 어딨어?” 혜리가 기다렸다는 듯이 방금 가져온 맥주를 잔에 따라주려고 하니, 민영이는 “아냐, 괜찮아 나 그냥 마실거야.” 하며 그대로 병 나발을 불기 시작했다. 나와 혜리는 서로를 보며 눈빛을 교환했다. ‘오늘 잘 안됐나 보구나.’
9시 18분. 그녀의 이야기를 들을 새 없이 나와 혜리는 무대에 올라야 했다. 약간은 찜찜한 마음으로 노래를 시작했다. “정말 날 사랑하나요, 그래요 그거면 돼요~” 1절이 끝나고 간주를 치는 동안, 민영이를 바라보는데 그녀는 어느 새 와인을 주문하고 있었다. 나와 혜리는 연주를 하는 내내, 저 쪽에 앉아있는 민영이와, 서로를 번갈아 쳐다보며 ‘뭘까’ 하며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엔딩곡 ‘팔레트’의 전주를 시작할 때쯤, 효영이가 걸어 들어오며 무대 위의 우리에게 눈 인사를 한 뒤, 민영이 테이블에 앉았다.
아까 리허설 때 하기로 했던 후렴 세 번 반복. ‘I’m truly fine~ 이제 조금 알 것 같아’ 나는 두 번 째 후렴 반복이 끝날 때쯤, 혜리를 쳐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리타르단도 (점점 느려지는 것)로 대충 멜로디를 마무리 지었고, 나 역시도 “감사합니다.” 라는 인사를 하고, 반병도 남지 않은 와인과 두 명의 여인이 앉아있는 테이블로 곧장 향했다.
“언니 잘 지냈어요?” 효영이가 나에게 칠레산 레드 와인을 반잔 따라주며 인사했다. “어, 난 잘 지냈는데... 얜 아닌가 봐.” 나머지 반잔의 와인을 혜리에게 끝까지 따라주며 효영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한다. “민영언니 오늘 병신 만났대요.” 나와 혜리가 웃는 동안 민영이가 뒤를 보며 “服务员, 我们再来一瓶~”(저기요, 저희 한 병만 더요~) 이라고 외친다.
민영이는 와인 두 모금을 벌컥 벌컥 마신 뒤, 다른 한 손으로는 써비스로 나온 모듬 치즈 플레이트의 체다 치즈조각을 집으며 입을 열었다. “오늘 두 번 만났는데 스위트룸 잡아놨대.” 혜리와 효영이는 아무 말도 없이 치즈를 먹고 있는 동안, 나는 민영이에게 잔을 들이밀며, “짠. 야, 병신 맞네.” 라고 맞장구를 쳐주었다. “그죠? 두 번째인데 무슨 스위트룸이야.” 효영이와 혜리가 같이 잔을 들이밀며 우리는 다시 “짠”을 외쳤다. 혜리가 와인을 홀짝이며 말했다. “우리 나이에 진짜 정상 찾기 너무 힘든 것 같아.” 그 말에 우리는 “휴우…” 다 같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너 전에 괜찮을 것 같다고 했었던 그 디자이너 남자 맞지? 근데 걘 왜 오늘 갑자기 그랬대?” 라고 묻자, 민영이 대신 효영이가 대신 대답했다. “언니, 점점 나이 들면서 느끼는 건데 남자 본심은 원래 다 똑같은데, 그게 빨리 드러나느냐, 그걸 잘 감추느냐 인 것 같아요.” 나는 민영이의 빈 와인잔을 다시 채워주며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땅바닥을 쳐다보며 아무 말 없는 그녀. 지금 민영이는 분명 속상하다. 남자들은 예쁘고 도도한 민영이 얼굴 뒤에 숨겨진 그녀의 진짜 감정을 알려고 하지도 않았겠지만, 그리고 그녀의 진짜 마음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겠지만. 최소한 나와 우리는 꼭 다문 그녀의 입술을 보기만 해도, 그녀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녀가 바라는 대로, 최대한 그녀가 ‘아무렇지도 않다’ 라고 느끼게 해주어야 하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이십대이면 ‘연애’라는 주제가 끝이 날 줄 알았다. 그러나, 서른이 되어도 우리는 여전히 ‘남자’라는 주제에 대해서 속상해 하고 있다. 물론, 풋풋했던 20대 초반의 사랑만큼 슬프지도, 아프지도 않다.
예전처럼 울기에는, 예전처럼 아파하며 그리워하기에는, 우리는 그렇게 사랑이라는 감정이 밥을 먹여줄만큼 대단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버렸고, 그렇게 감정을 쏟기에는, 당장 살아내야 할 내일이 피곤하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오늘도 병신을 만났구나.’ 라는 생각으로 덤덤하게 넘어간다. 그리고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이 감정 또한 넘기려 한다.
그런데.
그런데도.
아직도 씁쓸한 마음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그 것도, ‘혹시나’ 라는 기대를 가지고 만난 남자일 때 더더욱.
우리는 도대체 언제쯤이면,
‘남자’라는 주제에서 완전히 해방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