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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더언니 Sep 07. 2015

삶과 죽음에 대하여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위험과 온갖 바가지가 도사리고 있는 인도여행.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아’를 찾기 위해 인도 여행을 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나는 십분 이해할 수 있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바라나시의 갠지스 강변에 앉아서, ‘카르마’라는 운명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시체가 쟂빛으로 타는 모습을 우두커니 지켜보고, 아직 완전하게 타지 않은 신체 일부분이 떠다니는 그 거룩한 강물을 먹고 마시는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인생의 허무함과 공허함이 뼛속까지 스며들어오는 것을 막을 수가 없다.

나는 그 때, ‘죽음’이라는 것은 단순히 머리로 받아들일 수 있는 영역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뭄바이에서여느 직장인과 같이, 하루하루를 견디며 살아가고 있었다.

스트레스는 극에 달했고, 동시에 나의 몸은 엉망진창이었다.

멍은 이유도 없이 여기저기 온 몸에 퍼져있었고,

속에서 일어나는 화를 꾸역꾸역 참다가 보니, 왼쪽 귀는'띠...'하는 이명소리에 말소리도 제대로 듣지 못할 지경이었다. 급기야는 목 언저리와 사타구니에 혹이 잡히게 되었다.

여러 병원을 돌아다니며 괜찮다는 소리를 듣기를 바랬지만,

어느 병원을 가도 '조직검사를 해봐야겠다.'라는 소리를 먼저 들어야 했다.



 "骨髓異形成症候群"



백혈병으로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병력.

얼굴도 보지 못한 할아버지에게 받은 유전은 이런 것이었나보다.

나에게도 혈소판 수치가 이상이 있다는 의사 한 마디에...

한 동안을 아무런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더 살고 싶다.' 라는 의지는 그리 쉽게 생기는 것이 아니었다.
혹은 '빨리 죽고 싶다'라는 생각조차 사실은 여유가 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들 수 있는 것이었다.
이유도 모르고 밤낮 그저 눈물만 나왔고.
아 그냥 끝이구나. 라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나는, 철저히 혼자가 되었다.

아니, 오히려 피가 철철 나는 상처 위에 굵은 소금을 뿌리는 환경을 마주했다.

살다가 보면 아무도 나를 이해해주지 않고 오히려 주변에 나를 찌르는 사람으로 가득할 때가 있다.

멍이 시퍼렇게 얼굴까지 퍼져있는 나를 뻔히 보면서도 꾀병이라고 말했던 상사와,

'이런 몸뚱아리를 가지고 감히 내 아들을' 하고 매일 아침부터 괴롭혔던 아줌마의 목소리.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나를 보고 '니가 다시 돈을 벌면 매력적으로 보일 것 같아.' 라고 말했던 10년지기 친구였던 약혼자까지.


결국, 몸에 잡히는 멍울은 그리 심각한 증상은 아닌 것 같다고, 암이 아니라고, 하지만 일을 당분간 쉬는게 좋겠다는 확실한 결과가 나왔지만,

그 짧은 순간 동안, 이런 아픈 상황과 나를 더 아프게 하는 환경을 마주하며,

갠지스 강에서 보았던 '죽음'에 대해서 수 많은 생각을 다시 하게 되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사람은 참 그릇 같은 존재다.

눈으로 책을 읽고 머리에 지식을 저장하고,

입으로 먹어 위에 음식을 저장하며 코로 숨을 쉬어 폐에 공기를 집어넣으며,

끊임없이 마음을 채워놓을 수 있는 그 대상을 찾는다.

‘마음에 어떤 것을 담느냐’,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느냐’는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닌 지극히 내면적인 것이며,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는지, 어느 지위에 위치하는지는 상관이 없다.

내게 만약 살아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면..


나는,

이 땅에 살면서 무엇을 남기며 살아야 하는 것일까.

내가 과연 평생 동안 추구하던 꿈은 무엇이고,

내가 정말로 해야 하는 일은 무엇일까.

남들이 세워놓은 명문대, 대기업, 좋은 남자와 결혼, 편안한 노후 등, ‘인생의 정석’이라는 기준이 아닌,

나만의 삶은 무엇 일까.

나는 무엇을 마음에 품고 살아야 하는 것일까.

한 동안 불면증에 시달려 잠을 설치면서까지 생각하며 눈물을 쏟는 그 시간을 견디고 또 견디다 보니,

내가 내린 해답은 의외로 간단한 것이었다.




내가 마주하는 모든 작은 순간 속에서 삶의 의미를 깨달으며 사는 것이다.


내가 그 동안 막연히 꾸었던 꿈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 해보게 되는 터닝 포인트였다.




어차피 살고 죽는 것은 나에게 속한 것이 아니다.

비록 지금도 가끔 귀 뒤로 잡히는 멍울들이 신경 쓰일 때가 더러 있으며,

어제도 친구는 다리 가득히 퍼져있는 나의 멍을 보며 안쓰러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고 죽는 것은 나에게 속한 것이 아니다.

걱정하기보다, 죽는 그 날까지 마음의 행복을 조심스럽게 지켜나가며 사는 것이다.






모든 사람마다 행복의 기준은 다르겠지만,

나에게 행복이란 사랑이다.

나의 꿈은 사랑이다.

버려지고 찢긴 가슴을 가득 안고도 ‘사랑 받으면 행복할거야’라는 기대를 철저히 버리고 하루하루 더 사랑하려고 노력해나가면, 이상하게 더 많이 행복해진다.

애지중지하던 나의 전동차를 훔쳐간 사람을 미워하기보다, 그 사람은 오죽하면 이렇게 훔쳐서 생계를 유지해야할까 라는 마음을 가지면,

나를 비방하는사람들에게 쏘아부치지 않고, 그러려니 넘어가다보면,

통역을 할 때에 '말'을 전달하는 것보다, 마음을 전달하려고 애를 쓰다보면,

거리에 고물이 가득한 수레를 끌고가는 할아버지에게,혹은이른 아침 복도를 걸레로 닦고 있는 아주머니에게 따뜻하게 早上好라는 인사를 건낼 때면,

나와 같이 웃고 떠드는 순간을 함께하는 소중한 친구들에게 밥을 해줄 때면...


물질주의가 만연한 이 상해라는 곳에서, ‘돈’이 아닌,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이라는 꿈을 내가 오늘도 마주하는 주변인들에게 작게나마 나누어주고 하루를 마감할 때, 이 꿈을 매일매일 이루어 나가는 나를 발견할 때, 나는 ‘지금 죽어도 괜찮다’ 라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죽음이 무서워지지 않는다.

먹고 사는 문제가 그렇게 크게 다가오지 않는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바라나시에서 내가 배웠던 삶의 의미를,

내가 그토록 좋아하는 이 곳, 상해에서 오늘도 최선을 다해 연습하며 행복하게 살아가야지.

오늘도 최선을 다해서 행복하려고 바둥거리는 나를 불쌍하게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냥 이게 나니까.




내가 삶에서 발견한 최대 모순은, 상처를 입을 각오로 사랑을 하면 상처는 없고 사랑만 깊어진다는 것이다.

-마더테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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