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 주체성의 재구성
대부분의 성폭력 피해자를 다룬 영화들이 과거의 상처나 그것을 기억하고 애도하는 과정에 머문다면, ‘세계의 주인’는 과감하게 사건 이후의 '일상'을 보여준다.
10대 후반 소녀 '주인'의 일상이 스크린을 채운다. 첫사랑, 진로 고민, 가족과의 갈등, 친구 관계. 평범한 일상들이다. 주인은 학교 내에 인싸이며, 밝고 건강하다. 관객도 덩달아 웃게 된다.
어느 날 익명의 쪽지가 등장하면서 균열이 발생한다. 흥미로운 건 영화가 의도적으로 생략하는 것들이다. 주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직접 설명하거나 묘사하지 않는다. 쪽지를 보낸 사람도 끝까지 밝히지 않는다. 피해자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보라"라고 요구하는 것 자체가 또 다른 폭력이 될 수 있다. 영화는 주인에게 자신의 상처를 증명하도록 강요하지 않는다. 그 선택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하다. 이 영화가 관심 있는 건 '사건'이 아니라 '사람'이다.
쪽지는 일종의 시선이다. 피해자다움을 강요하는 사회적 시선. '이상적 피해자'는 약하고 무고하며, 무엇보다'상처받은 모습'을 보여야 하는 것처럼. 그러나 주인의 밝음과 일상성은 이러한 기대를 배반한다. 그녀는 웃고, 연애하고, 일상을 산다.
주인은 '아동 성폭력 피해자'이기 이전에 한 명의 10대 소녀다. 그녀에게는 친구도 있고, 꿈도 있고, 사랑도 있다. 피해 경험이 그녀의 전부가 아니다. 영화는 주인을 피해자로만 정의하길 거부한다. 하지만 주인에게서 사건은 사라지지 않는다. 주인이 남자친구와 신체적 접촉이 있는 순간, 그녀의 몸은 반응한다. 굳어지는 표정, 변하는 호흡. 이것은 단순한 '기억'이 아니라 몸에 각인된 반응이다. 그러나 영화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주인은 이 순간을 견뎌낸다. 친구들과의 대화로, 일상의 루틴으로, 자기만의 방식으로 다시 현재로 돌아온다. 회복은 과거를 지우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살아갈 능력을 되찾는 것이다.
주인이 자신의 과거를 밝힐지 말지 고민하는 장면은 피해자가 끊임없이 직면하는 딜레마를 보여준다. 타인의 오해를 풀기 위해 자신의 상처를 공개해야 하는 상황. 말하지 않으면 의심받고, 말하면 다시 상처받는다. 영화는 주인에게 선택권을 준다. 그리고 관객에게 묻는다. 왜 피해자는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가?
결국 이 영화가 제기하는 질문은 명확하다. 우리는 피해자의 회복과 행복을 상상할 수 있는가. 아니, 애초에 그것을 허락하고 있는가. 주인의 세계는 사건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영화는 사건 중심의 서사가 아닌 주체 중심의 서사를 보여주며, 피해자를 '피해'로만 정의하는 담론에 균열을 낸다.
누구나 자기 삶의 주인이 될 권리가 있다. 사건이 그 권리를 가져가진 않는다. 이 영화는 그 당연한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