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써 보이는 글의 함정

미지근한 문장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우리는 왜 더 깊게 생각하지 않는가

by 샤누자오사무

인터넷에서의 글쓰기를 보고 있으면, 우리는 점점 더 서술의 매끄러움을 글 잘 쓰기의 기준으로 착각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듯하다. 묘사가 적당히 그럴듯하게 이어지고, 감각어 몇 개가 문장 사이에 박혀 있으면 누구나 글 잘 쓴다, 감성이 좋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글은 대부분 인물의 내면에도 닿지 않고, 세계의 구조에도 닿지 않으며, 결국 현실을 이해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감각이 깊어지려면 그 아래에 사유가 있어야 한다는 가장 근본적인 사실을 잊고 있는 것 같다.


문제는 이런 글이 단순한 한 개인의 취향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지금의 온라인 공간은 감정과 기분을 소비하는 데 익숙해진 독자들로 채워져 있고, 그만큼 글도 그 소비 구조에 맞춰 더 얕아지고 더 부드러워지고 더 순해진다. 사람들은 사고의 마찰을 견디지 못한다. 질문을 던지는 문장보다, 풍경을 묘사하는 문장을 더 편안해한다. 사유를 요청하는 글보다, 감정을 즉시 공급하는 글이 더 많은 좋아요를 받는다. 감각적 문장과 감정적 단상을 조합해두면 사람들은 그것을 문학의 한 종류라고까지 부르곤 한다. 그러나 그것은 문학이 아니라 기분의 기록에 가깝다. 생각에 닿지 않기 때문이다.


감성 자체는 하나의 언어일 수 있다. 그러나 사유 없는 감성은 결국 피로해진다. 감각은 둔해지고, 결국 무언가를 인지할 능력조차 흐릿해진다. 사실 따뜻함이라는 것 자체도 생각의 결과다. 어떤 세계를 바라보고 어떤 구조를 이해하고, 어디에서 누가 어떤 방식으로 상처받는지를 오래 들여다본 뒤에야 비로소 생기는 것이 온기다. 진짜 친절한 문장이라는 것도 그렇게 만들어진다. 단정한 문장, 간명한 문장 뒤에는 늘 사유가 있다. 어떤 문장은 따뜻함을 가장하지만, 사실은 독자를 다루기 쉬운 인간으로 만들어버린다.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안전지대에 오래 머물게 하기 때문이다.


어떤 글은 한 문장을 읽었을 때 세계가 조금 달라 보이게 만든다. 어떤 글은 같은 문장을 읽고도 세계가 여전하다. 후자의 글은 아무리 읽어도 확장되지 않는다. 감정의 진폭만 잠시 건드릴 뿐 방향은 없다. 그래서 금방 잊힌다. 지금 소비되는 대부분의 잘 써 보이는 글이 바로 그렇다. 묘사는 있는데, 이유가 없다. 감정은 있는데, 맥락이 없다. 짧은 감탄사는 있는데, 질문은 없다. 세계에 대해 아무것도 말하지 않으면서도 한 문단을 그럴듯하게 채우는 기술만 늘어가는 글들. 그 기술이 문학을 대신하고, 감성이 사유를 누르는 풍경. 이것이야말로 가장 문제다.


문학은 결국 사유의 예술이다. 시도 그렇다. 언어는 감각으로만 완성되지 않는다. 감각은 언제나 생각 아래에 놓인다. 생각이 먼저 빛을 만들고, 감각은 그 빛을 따라가는 법이다. 깊이 있는 사유가 만든 문장은 때때로 차갑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그 차가움은 독자를 더 넓은 쪽으로 데려가기 위한 온기의 전 단계다. 반대로 사유 없이 친절한 문장은 잠깐 따뜻하지만 오래 머물기 어렵다. 금방 식고, 금방 잊히고, 금방 소비된다. 문장 하나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을 문장만으로 해결하려는 글이 그래서 공허해 보인다. 감정만 계속 재현하는 글은 결국 감정만 반복 생산할 뿐 이해를 만들지 못한다. 그리고 이해가 없으면 세계는 늘 제자리다.


이유 없이 따뜻한 글보다, 이유가 있어서 따뜻한 글이 훨씬 오래간다. 사람을 위로하는 글은 결국 사람을 단단하게 만드는 글이다. 그 단단함은 감각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사유에서 온다. 그래서 문학은 부드럽지 않아도 괜찮다. 때로는 차갑고, 때로는 불편하며, 때로는 고요하게 독자를 흔들어야 한다. 질문을 던지는 문장만이 사람을 확장시키고, 확장된 사람만이 더 따뜻해질 수 있다.


우리는 지금 가벼운 감성에 너무 익숙해져 있다. 그러나 진짜 필요한 것은 감성이 아니라 사유의 근육이다. 감성은 소비되지만, 사유는 축적된다. 축적된 사유가 만들어낸 온기만이 오래 남는다. 앞으로는 그런 글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런 독자도 더 많아졌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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