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의 선

인위적인 끝을, 의도적인 시작으로

by 샤누자오사무

연말이 되면 습관처럼 비슷한 질문을 꺼낸다. 올해 무엇을 했는지, 무엇을 놓쳤는지, 어떤 것이 좋았고, 어떤 것이 달라졌는지. 성실한 사람처럼 항목을 만들지만, 끝까지 쓰지 못하고 이내 덮어버린다. 질문이 나를 정리해 주는 게 아니라, 질문 앞에서 내가 얼마나 흐릿한지 먼저 들키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 시기만큼은 선을 긋는다. 지구가 태양을 한 바퀴 도는 일을 굳이 번호로 매겨 한 해라고 부르는 건 인위적이다. 그래도 인위적인 것이 늘 나쁘진 않다. 자연은 지나가고, 인간은 의미를 만든다. 그 의미 덕분에 멈춘다. 나는 멈추는 법이 서툴러서, 이런 선이라도 있어야 멈춘다.


올해의 나는 선을 그을 수밖에 없었다. 최악의 상사와 회사를 만났고, 내 몸이 먼저 반응했고, 마음이 뒤따라왔다. 내가 내 발로 상담사를 찾고, 약을 먹게 되는 일이 내 인생에 들어올 줄은 몰랐다. 단순히 회사에서의 불운이 아니라, 내가 나를 돌보는 법을 아예 모르고 살았다는 증거처럼 남았다. 참고, 버티고, 맞추는 것만 배워온 사람은 자신을 돌보는 순간조차 죄책감으로 처리한다는 걸 알았다.


그 뒤로 나는 떠나는 법을 배웠다. 사람을 떠났고 회사를 떠났고, 나라를 떠났다. 미국을 벗어나 영국으로 온 건 도망이기도 하고, 재정비이기도 하고, 어쩌면 실험인지도 모른다. 내가 나를 지키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방향으로 몸을 옮긴 것. 내 삶이 계속 같은 방식으로 망가지고 있다면, 장소를 바꾸는 게 해결책은 아니어도 최소한 질문을 바꿔 준다. 나는 지금까지 어떤 환경에서 어떤 사람으로 살았는지, 어떤 기준으로 나를 평가했는지, 무엇을 정상이라고 착각했는지. 이동은 그런 익숙함을 새롭게 보게하는 계기다. 어떤 태도로 왔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더 이상 내 고통을 사소한 것으로 만들지 않겠다는 태도. 내 삶을 생존의 도구로만 쓰지 않겠다는 태도.


물론 현실은 항상 고상한 문장보다 앞에 있었다. 벗어나야겠다는 마음이 커질수록 시장 경기가 나쁘다는 것도 더 선명히 체감했다. 지원할 곳이 없고, 연락이 없고, 답장이 늦고, 그 사이에 사람은 자기 탓을 하게 된다. 그럼에도 없는데서도 어떻게든 인터뷰를 봤다. 꾸준히 발버둥쳤다. 누구는 그걸 집요함이라고 하고 누구는 불안이라고 하겠지만, 내게는 둘 다였다. 한편으로는 나를 구하기 위한 몸부림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 체제 안에서 도태되지 않기 위한 본능이었다. 되는 날보다 안 되는 날이 더 많았지만, 안 되는 날이 나를 멈추게 하지는 못했다. 멈추면 다시 그 지옥으로 돌아갈 것 같았으니까.


그렇게 사람과 회사를 떠났다. 떠난 뒤에는 다른 질문이 남았다. 나는 왜 이렇게까지 위를 보며 살았을까. 자본주의는 사람에게 자꾸 위를 보게 한다. 더 좋은 연봉, 더 좋은 타이틀, 더 좋은 지역, 더 좋은 삶. 그 광기가 나를 움직이게 했고, 나를 여기까지 데려왔고, 많은 것을 주기도 했다. 동시에 그 구조는 내가 내 삶에 만족하고 타인의 삶을 돌보기 전에 나를 상대적 빈곤 속으로 먼저 밀어 넣었다. 여유를 느끼려 하면 죄책감이 따라왔다. 잘하고 있어도 부족하다고 느끼게 만들었다. 조금만 쉬어도 뒤처진다는 공포가 자동으로 올라오는 시스템. 인간으로서의 실격이 너무 쉬운 세계였다.


그래서 그런지 영국에 와서 느끼는 여유는 이상한 방식으로 내 과거를 증명한다. 물가는 전 세계에서 손꼽히게 비싸고, 기차와 버스는 스케줄이 제멋대로다. 시내는 언제나 복잡하고 혼란스럽다. 그런데 나는 오히려 숨이 쉬어진다. 그 사실이 나를 멈칫하게 한다. 지하철에서 사람들 사이에 끼어 서 있는데도, 뉴욕에서처럼 숨이 막히지 않는다. 복잡한데도 여유롭다는 느낌 하나만으로, 내가 이전에 얼마나 긴장 속에 살았는지가 드러난다.


그래서 올해 내 결론은 의외로 단순한 데 있었다. 내밀한 행복을 챙기는 일이 사치처럼 느껴질수록, 그게 사실은 생존에 가깝다는 것. 다정함을 지키는 일이 생각보다 어렵고, 그래서 더 중요하다는 것. 나는 더 잘 살기 전에 덜 망가지게 사는 법부터 배워야 했다.


나라를 옮기고 직업을 바꿔도, 어떤 것들은 형태를 바꿔 다시 나타난다. 사람과 배경은 바뀌지만, 위만 보게 만드는 힘은 계속 작동한다. 그렇다면 이 체제를 통째로 부정하고 도망치기보다는, 그 안에서 인간으로서의 감각을 어떻게 지킬 것인지가 더 현실적인 질문일 것이다. 위쪽만 올려다보게 만드는 시선에서 잠깐 눈을 떼어 내 옆에도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려 보는 것. 비교 대신 관찰을, 경쟁 대신 공감을 잠깐이나마 선택해 보는 것. 그런 선택이 거창한 철학이 되지 않더라도, 내 하루의 표정을 바꿀 수는 있다.


그래서 나는 더 자주 삶을 돌아보려고 한다. 인위적인 선을 촘촘하게 더 긋고 싶다. 연말이라는 선 하나에 더해 한 달의 끝, 한 주의 끝, 하루의 끝에도 작은 선을 긋고 그 선 앞에서 나를 돌이켜 보고싶다. 내가 오늘 어떤 말에 상처받았는지, 어떤 말에 회복되었는지. 내가 무엇을 참았고, 무엇을 지나치게 만들었는지. 나를 살게하는 순간은 대개 큰 사건이 아니라 작은 감각이다.


기분 좋은 순간을 더 의도적으로 경험해야 한다. 그냥 스쳐 지나가게 두지 않고, 그 감각을 음미하는 연습. 따뜻한 차를 마실 때의 온기, 햇빛이 잠깐 비칠 때의 쨍함, 누군가의 짧은 안부, 길모퉁이에서 맡는 빵 냄새. 이런 것들이 별거 아닌 것처럼 사라지는 순간, 나는 다시 큰 것만 좇게 된다. 큰 것만을 좇는 삶은 결국 또 나를 고갈시킬 것이다.


이 구조 안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지기는 어렵다. 나도 어느 날엔가 다시 위만 보며 한숨을 쉬고 있을 것이다. 다만 최소한, 그 와중에도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있다. 나에게 와 준 친절을 조금 더 오래 기억해 두는 것. 내가 건넨 작은 도움의 순간을 함부로 폄하하지 않는 것. 어떤 날의 웃음과 어떤 날의 안부 인사가 나를 살렸는지 자주 떠올려 보는 것. 그리고 다음에는 내가 누군가에게 그런 순간이 되어 주는 것. 행복을 느끼는 방법은 생각보다 멀리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내년의 목표와 목적의식은 그래서 아주 거창하지 않았으면 한다. 더 높이 올라가겠다는 목표가 아니라, 더 선명하게 살겠다는 목표. 더 많이 가지겠다는 목적이 아니라, 더 잘 느끼겠다는 목적. 성과를 남기는 게 아니라 감각을 남기는 쪽으로. 살아냈다는 증거를 남기는 게 아니라, 살아있었다는 느낌을 남기는 쪽으로. 그렇게 한 해를 살면, 인위적인 선도 조금은 덜 인위적으로 느껴질 것 같다. 광기에 휩쓸리는 대신 아주 작은 순간들을 끝까지 붙잡아 보는 일. 어쩌면 그게 이 시스템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버팀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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