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들뜬 표정으로 꽃단장을 하고 인제역에 내리는 면회객을 봤다. 인제에는 군부대가 많지.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러 가는 이의 미소는 맑다. 이 버스는 몇 개의 경유지를 거쳐 속초로 간다. 그래 , 나를 보러 와줬던 이들도 이랬겠구나- 하는 생강유자차맛 짧은 상념. 얼마간 눈을 붙였다. 정신을 차리니 버스 밖은 온통 산과 나무다. 구불구불한 산길은 산간을 넘어 이동하는게 얼마나 힘든일인지, 내 차멀미가 얼마나 심한지를 상기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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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사히 산비탈을 벗어나고 왼쪽 창에 지나가는 시골집과 밭과 나무들을 관찰할 때 친구놈의 ‘야!’ 하는 소리에 시선을 오른쪽으로 옮긴다. 바다. 동해다. 큰 섬이나 배, 각종 인공물 따위가 없는 널직한 수평선을 오랜만에 본다. 멀미가 금세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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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고은이 말했다. ‘동해는 예술이고 서해는 인생이다.’
과연 그럴 것이 내가 어릴 적 자란 바다에선 갯벌 냄새가, 인생의 짠내가 났다. 반면 여기선 시원한 냄새가 난다. 경쾌한 바람이다.
파도가 철썩 일 때마다 모래가 한 줌 씩 올라온다. 파도에 쓸려온 모래는 해안에 사빈을 만든다. 파도에 가까울수록 모래알이 곱고 부드럽다. 바람은 모래를 더 멀리 옮겨 사구를 형성하고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해변의 테트라포드가 반쯤 묻혀있다. 어쩌자고 햇볕까지 좋다. 반짝이는 모래, 파란 파장의 색이 주는 청량감, 맑은 햇살의 풍광. 고은 선생이 말한 예술이 여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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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가 만드는 물거품은 사람으로 하여금 발을 담그고 싶게 만드는 힘이 있다. 분명 복사뼈 밑으론 얼어붙겠지-하는 걱정도, 여분의 신발이나 수건이 없는 것도 상관없다. 달려가 파도에 닿았을 때 내 생각과는 달랐다. 겨울바다는 차가울지언정 춥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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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색이 왜 층져 보이지?’
‘십 년을 봤는데 어떻게 여행을 한 번 같이 간 적이 없지?’
‘매일 뜨고 지는 해, 왜 연말에만 난릴까’
‘왜 이런 건 나이가 들고서야 좋은 걸 알게 될까. 바다는 항상 그대로 있었을 텐데’
‘아침 뭐 먹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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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유익하고 대게 시답잖은 얘기를 했다. 특별하지도 대단하지도 않았다. 여행에는 이런 여행도 저런 여행도 있는 법이다. 다가올 해에는 한 뼘 더, 기왕이면 몇 뼘 더 성숙해지기를, 구태의연함과 작별하기를. 우중충하게 구름 낀 일출을 보며 조심스레 빌었다.
2019.1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