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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mforter May 11. 2022

미안하다고 하면 다야?

"임선생님, 목소리가 커진 것 같아요."

몇 년 전, 육아휴직을 끝내고 병원에 복직했을 때, 옆자리 동료 선생님의 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우당탕탕 뛰어다니거나, 붙어서 싸워대면서도 꼭 붙어다니는 연년생 두 아들을 키우다보니, 나도 모르게 괴성을 내지르는 순간이 많아졌다. 그로 인해, 원래 저음에 걸걸했던 내 목소리는 더더욱 쇳소리로 변했고, 내장 깊은 곳에서 끌어올린 샤우팅에 성량도 커졌다.

  물론 나도 양식있는 엄마가 되고 싶기 때문에, 처음부터 다짜고짜 소리부터 지르진 않는다.

 "얘들아~ 그만 해야지~" 하다가,

 "그만하라고 했지?" 하다가,

 "그.만.하.라.고!" 하다가,

 "그만해! 그만하라고! 떨어져!!!!" 이렇게 되는 것이다.


 전 국민의 육아멘토인 오은영 선생님이 본인의 아들은 어떻게 키웠는지 궁금해하는 질문에 답하는 걸 본 적이 있다. 다른 건 몰라도 절대로 아이를 때리거나, 분노에 차서 소리지른 적은 없다고 하셨다. 1번 원칙은 나도 준수려고 노력하지만, 2번 원칙은...요원하다.  '아... 정말 훌륭한 인성'이라고 감탄하는 한편, 오박사님과는 다른 내 처지를 떠올리며 변명거리를 찾아보았다. '오박사님도 바쁜 워킹맘이셔서 친정 어머님이 육아를 많이 해주셨다고 하는 걸로 보아, 아이와 부대낄 시간이 절대적으로 적으셨을 거야' 혹은 '그래도 아이가 하나니까, 조금은 더 수월하지 않았을까?' 하는 변명들 말이다. 조부모님 찬스를 쓸 수 없고, 아들 둘을 건사해야 하며, 특별히 저질 체력을 갖춘 내가 따라하기는 어려운 노릇이라며 변명같지 않은 변명을 해보았다.


 명색이 심리학 전공자로서 나도 아이들의 발달과 문제행동에 대한 지식은 남부럽지 않게 가지고 있을 것이다. 병원에서 소아 케이스도 많이 봤거니와, 로컬 클리닉에서 학부모 상담도  했다. 하지만 지식과 행위 간에는 큰 괴리가 있는 법이고, 상담자로서 엄마들에게 '이렇게 하시는 건 곤란해요'하는 그런 짓들을 나도 많이 하며 산다.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일은 성인이 된 아이들이 "우리 엄마는 심리학자랍시고 남에게 고나리는 엄청 해대면서, 자기 성질머리 하나 감당못하는 성격파탄자 였어요." 하는 것이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지만, 이 예감만큼은 좀 빗겨가거나, 다소 완화된 형태로 "엄마는 좀 괴팍한 사람이었어요."하는 정도에서 그치길 기도해본다.   

 그리고 훗날 나에게 쏟아질 원망에 대비해, 이렇게 기록도 남겨둔다. '얘들아, 엄마도 나름대로 노력하고, 반성도 했단다. 그래도 역부족이었던 게 있을 거야. 그래도 엄마가 조금은 더 괜찮은 부모가 되려고 노력했던 걸 이어받아서, 너희는 조금은 더 괜찮은 부모가 되지 않겠니.' 그러니까 이것은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는 초장기 프로젝트인 셈이다. 내 후손의 후손의 후손은 정서적 금수저로 거듭나는 그날까지(물론 중간에 대가 끊길 수 있다). 조금 거창하게 말하자면, 불안정 애착의 세대 간 전이를 끊는 시도.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나와 나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조금은 떨어져서 보려고 하는 성찰적 태도를 약간은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괴팍한 성격이 튀어나가는 것을 다 막을 수는 없더라도, 이미 저지른 짓에 대해서 사후 수습은 하며 살자는 마음으로, '미안한 일을 했을 땐 아낌없이 미안하다고 사과하자'는 마음으로 지내고 있다. 미안한 짓을 해놓고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돌변하면, 아이 입장에서 지킬과 하이드 같은 그 양면성을 감당하기 어렵다. 발레리나 강수진님이 동작과 동작을 연결하는 부드러움이 퍼포먼스의 완성도를 결정한다고 말한 것 처럼, 양질의 관계에는 행위와 행위를 이어주는 연결성이 필요하다. '그 때 그 행위는 이런 맥락에서 발생했고, 이런 점에서 후회하고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너를 사랑한단다' 하는 그런 경험의 맥락.

 그리고 태어나서 한 번도 활기 넘치게 살아본 적이 없는 나의 저질 체력을 고려하여, 절대 감당 안될만큼 무리하게 일을 벌여서는 안된다는 교훈도 잊지 않으려고 한다. 체력이 곧 국력이고, 정신력이고, 육아의 원천이고, 인성의 바탕이라는 걸 한살 한살 먹을 때마다 실감한다. 애 낳기 전에 가장 시급하게 해야 할 일은 근력 운동입니다.


 엄마가 되고나면 엄마의 심정을 이해한다는데, 솔직히 나는 엄마가 되고 나서 "엄마는 도대체 왜 그랬지?"하는 것들이 많았다. 그치만, 그 중에서 가장 이해가 되었던 부분이 있다면, '어린 시절 엄마는 왜 자식들에게 밝은 표정과 상냥한 목소리를 보여주지 못했을까'하는 것이었다.  왜 못했냐면... 그냥 엄청나게 힘들었던 것이다. 밖에 나가서 돈도 벌어야 하고, 육아도 해야하고, 살림도 해야하고,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고, 술과 친구를 좋아하는 남편까지 갖췄으니, 그 시절 엄마는 본인이 해야하는 일들에 짓눌려 숨도 쉬기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힘든 것을 힘들다고 하지 못했던 엄마는 웃을 여력이 없었다.

 그런 엄마를 닮아가지 않기 위해, 내 아이들에게 '엄마는 왜 그랬을까'라는 의문을 크게 남겨주지 않기 위해, 나는 내가 힘들다는 것을 굳이 숨기지 않는다. 잠자리에 들기 전, 아이들에게 동화책을 한권씩 읽어주는데, '오늘은 엄마가 힘들어서, 짧은 동화책을 읽어야 겠다.'고 솔직히 말한다. 그리고 '힘들어도 너희들이 있어서 힘이 나.'라고 말한다. 그리고 가끔 어리광도 부린다. '엄마가 오늘은 힘드니 얼른 와서 충전해주렴'하면 아이들은 쪼르르 달려와서 양볼에 뽀뽀를 해준다.  힘듦을 나누면 버틸 힘이 생기고, 힘든 와중에도 좋은 것이 있다는 것을, 부정적인 것과 긍정적인 것은 늘 함께 있다는 것을, 그 이해하기 어려운 모순을 견디는 지혜의 씨앗을 품게 되기를.


 아이들이 어린이 집에 가지 않는 주말에는 단단한 각오가 필요하다. '이번 주말에는 급성 괴성을 내지르는 용가리 엄마의 모습을 보여주지 말아야지' 다짐을 하지만, 각오를 지키지 못하는 날이 많다. 지난 주 토요일도 그러했다. 저녁 여섯 시에 귀가하기로 되어있던 남편은 교수님과의 미팅이 늦어진다며 돌아올 줄 몰랐다. 나의 체력은 저녁 여섯 시에 맞춰 세팅되어 있었는데, 1분씩 지날 때 마다 체력은 급속도로 고갈됐고, 짜증 게이지는 점차 올라갔다.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하고, 양치를 하고, '오늘은 학습지를 건너 뛸까?'하다가 이 망할 성실함때문에, 꾸역꾸역 아이들을 자리에 불러 앉혔다. 그것이 판단 착오였다. 그런 날에는 그냥 하루 건너 뛰어야 하는 것이다.

  그날은 달력보는 법을 연습하는 날이었는데, '첫번 째 목요일에서 두번 째 목요일이 되려면 며칠이 지나야 하냐'는 질문을 땡땡이가 이해하지 못했다. 여러번 설명했는데도 땡땡이는 달력을 헤맸다.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고?'하는 생각에 나의 목소리는 점점 커지더니 이내 윽박지르는 투로 변해 있었다. 땡땡이의 긴장도가 점점 높아지는 것이 느껴졌고, 당연히 긴장할수록 아이는 답을 찾기 어려워했다. 정신을 차리고, 목소리를 가다듬고, 황급히 학습지를 마무리했다.


 평소에는 아빠가 잠을 재워주는데, 그날은 늦는 아빠 대신 엄마와 함께 잠자리에 들었다. 땡땡이와 쌩쌩이를 옆에 끼고 누우니, 후회가 밀려왔다. 가만히 땡땡이의 손을 잡고, "아까 엄마가 달력 못 본다고 소리질러서 미안해. 처음 배우는 거니까 잘 모르는 게 당연해. 땡땡이 잘못이 아니야. 엄마가 아빠를 기다리다가 지쳐서, 몸이 힘들어서 그랬던 것 같아. 미안해. 엄마가 잘못했어"했다.  그러자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6세 쌩쌩이 왈,  "안하면 되는데, 꼭 해놓고 사과한다. 그지?" 했다. 웃음이 났다. 나는 "그러게나 말이다. 그래도... 미안하다고도 안하는 것보단 낫지 않아?"했다.

 땡땡이는 졸린 눈을 스르르 감으며 나즈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아빠가 늦어서 오늘은 엄마랑 같이 자잖아요."

 눈물이 핑돌았다. "엄마랑 자서 좋아? 그렇게 말해줘서 정말 기뻐. 너희가 이만큼이나 커서 이런 대화도 하고  행복하다!"

 웃음과 눈물이 공존하는 그런 하루. 그렇게 전쟁 같은 토요일이 저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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