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omforter Jul 08. 2022

인간을 존경하는 게 가능한가요?

"나는 싸이클 브레이커(cycle breaker)가 되기로 했어."


 며칠 전, 유학을 마치고 해외에서 일하고 있는 선배가 일시 귀국하여 오랜만에  대학원 동료들을 만났다. 코로나 이후 정말 오랜만의 만남이었는데, 몇 년의 시간이 무색할 만큼 수다, 또 수다... 기본적으로 남의 이야기 들어주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이고, 비슷한 인생 경로에서 비슷한 고민을 해온 사람들인지라, 그들과 있으면 마음의 장벽이 스르르 녹아내리는 느낌이 있다.  장장 여덟 시간을 내리 떠들고도 아쉬움이 남았고, 또 두고두고 마음에 새길 말들도 많이 남은 하루였다.

 우리들이 모여서 떠드는 얘기들 중에는 좁은 업계의 핫이슈들, 꼬장꼬장한 교수님이나 상사들, 진로 선택에 대한 고민들, 환자나 내담자를 만나면서 겪게 되는 내적 갈등 등이 있고, 그리고... 어쩌면 우리가 이러한 진로를 선택하게 된 일말의 배경이 되었을 가족에 대한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지. 그날 모임도 가족에 대한 진한 애증의 얘기로 마무리가 되었고, 우리는 부모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사투를 지지하며 서로에게 '이것은 패륜이 아니야. 생존이야.'라는 위로를 주고받았다.


  늦은 밤, 자리를 파하고 카페를 나서는데... '나는 싸이클 브레이커가 되기로 했어'라는 선배의 말을 듣고 '아하!' 싶었다. 땡땡이와 쌩쌩이를 키우면서 나는 '불안정 애착의 세대 간 전이를 끊기 위한 일종의 장기 프로젝트'에 임하는 마음가짐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제 이 긴 문장을 한 마디로 대체할 수 있게 되었다.

  '싸이클 브레이커.'

  부모의 과오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이 야심찬 다짐을 과연 나는 지켜낼 수 있을까. 내 아이들은 먼 훗날 부모를 떠올리며, 나의 어떤 점에 질색하고 벗어나고 싶어 할까. 땡땡이와 쌩쌩이에게 나는 존경할만한 부모로 남을 수 있을까.


 '존경(尊敬)'의 사전적 정의는 남의 인격, 사상, 행위 따위를 받들어 공경하는 것이다. 초등학생 때였던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에 대해 글짓기를 해오라는 숙제를 받아 들고 난감했던 적이 있다. 존경이라... 그건 과연 어떤 기분이지? 다들 진심으로 우러러보고 본받고 싶은 그런 인물이 있다는 거야? 위인전에 나오는 인물들은 말 그대로 책 속에나 존재하는 딴 세상 사람들일 뿐, 나는 그들에게 진심을 다해 존경심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 시절에는 그들의 인격이나 사상, 행위의 깊은 의미를 이해하고 감동을 받을만한 어떤 마음이 없었던 것 같다. 누군가에게 어떤 감정을 느끼는 것이 너무 어려웠는데, 딱딱하게 굳은 마음에서 존경심이라는 게 피어날 리 만무했다.

  결국 나는 대충 링컨의 위대한 업적을 요약해서 숙제를 해 갔던 것 같다. 잘 알지도 못하지만, 잘 알지 않아도 될 만큼 충분히 멀고 먼 나라의, 오래되고 오래된 인물을 일부러 선택한 것이다. 존경이라는 것은 그만큼 나에게는 손에 닿지 않는 멀고 먼 경험이었다. 그런데 더 충격을 받은 것은, 많은 아이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부모님을 꼽은 것이다. '우와... 저게 진심이라고? 역시 내가 못돼 쳐 먹은 애가 맞나 보네.' 부모에 대한 고마움과 존경심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나의 문제라고. '다른 집 딸들은 이렇다는데, 너는 어째서!'라고 나를 비난하는 부모님의 말씀이 옳고, 나는 못돼 쳐 먹은 이기적인 애라고. 그들이 말하는 다른 집 딸들은 애교가 많고, 부모의 마음을 잘 헤아리며, 부모의 고생에 감사할 줄 알고, 고생한 보람이 있게 해주는 그런 존재들 같았다. 애석하게도 나는 그렇게 살갑고 다정한 다른 집 딸이 아니었고, 부모님도 다른 집 부모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누구를 존경하지도 못하는 인간답지 못한 인간인가'에 대한 의문을 오래도록 마음속에 품고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 나는 자신의 기본적인 인간성에 대해 의심하지 않기로 했다. 물론 내 안의 어딘가 아직 그런 부적절감이 있고, 그로 인해 '내가 그렇게 나쁩니까?'라는 의구심에 시시때때로 사로잡히지만, 그런 냉혹한 목소리가 올라올 때 세차게 머리를 흔들며 나의 다른 일면들을 함께 떠올린다. '그럼 엄마, 아빠는? 다른 집 부모처럼 해줬어?'라는 말이 혀끝에 맴돌 때에도, 차마 그 말을 할 수 없었던 것은, 그 말을 듣고 마음 아파할 부모님에 대한 연민과 애정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딱딱하게 마음이 굳어있던 것 같은 그 시절에도, 누군가를 헤아리는 마음이 내 안에 있었던 것을 믿게 되었다. 다만, 헤아리고 돌보아야 할 대상을 존경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만약 내가 비난을 받는 와중에도, 그보다 큰 마음을 내어서 나를 비난하는 자들을 다독이고 위로해줘야 했다고 한다면.... 나는 그 정도의 성인(聖人/成人)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돼먹지 못한 인간은 아니며, 그저 평범한 인간, 아이였을 뿐이다. 여섯 살 땡땡이가 부당한 요구에 맞서 당당하게 했던 말처럼, '내가 어린이인데 어떻게 그렇게 해요?'라는 말을 어린 시절 나는 감히 할 수 없었다.

  아이일 때 그 '아이다움'을 지켜주고, 나이가 들면서는 그에 맞는 '나잇값'을 하도록 가르치는 것이 양육의 본질일진대, 부모님의 양육을 돌이켜보면 아이다움과 나잇값에 대한 선이 없는 채로 뒤죽박죽 섞여 있었다. 아이에게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고 돌보라는 과한 기대를 하고, 아이가 배워야 할 기본적인 생활양식은 가르치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열 살이 다 되도록 혼자 화장실을 못 가고,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혼자 머리를 감지 못했다. 그런 기본적인 생활 규칙들을 가르치기 이전에, 바쁘다는 이유로 후다닥 대신해줘 버렸고, 이후에는 '이 나이가 되어서 왜 이런 것도 못하니?'라는 비난이 따라왔다.

  땡땡이와 쌩쌩이를 키우다 보니, 아이가 혼자 할 수 있게끔 기다려주는 것이 얼마나 많은 인내와 시간을 필요로 하는지 알게 되었다. 바쁜 출근 시간에 꾸무적거리는 아이들에게 재빨리 밥 한 숟가락 떠먹이고, 양치시키고, 옷 입히고 신발 신겨서 들춰업고 나가는 것이 그나마 쉬운 방법인 것이다. 어느 날, 영유아 건강검진을 갔는데, 나의 문진표 응답 내용에 따르면, 땡땡이가 발달이 지연된 걸로 나온다고 했다. '혼자 지퍼 달린 옷을 입을 수 있나요?' 같은 질문에, 시도해본 적이 없어서 '할 수 없다'로 응답한 것이 원인이었다. 아이가 혼자 배우고 시도할 수 있게끔 충분히 기다려주지 못한 것이다. 그러면서, 왜 이렇게 할 일이 많냐며, 왜 이런 것도 혼자 하지 못하냐며, 나는 나대로 불만만 키우고 있었구나. 나는 과연 싸이클 브레이커가 될 수 있을까? 그건 너무 야무진 꿈이었던 것 같아.


 싸이클 브레이커가 되기로 했다는 선배도 '살면서 누구를 한 번도 존경해 본 적이 없느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고 했다. 아이에게 본보기가 되어주어야 할 대상이, 그다지 믿음직스럽거나 바람직하지 않을 때, 그 대상으로부터 무언가를 배우거나 의지하는 것이 힘들 때, 아이는 나이에 맞지 않게 웃자라고 존경의 마음을 깨우치기 어렵다. 애어른으로 자란 사람들은 자기 일을 알아서 잘 하지만, 독단적인 구석이 있다. 타인으로부터 조언이나 도움을 구하는 것을 어려워하고, 웃어른의 가르침을 쓸데없는 간섭으로 여기기도 한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몸이 커서 더 이상 부모님의 과한 양육이 비집고 들어올 구석이 없어진 이후로, 나는 모든 것을 알아서 하는 데 익숙해졌다. 되도록 윗사람으로부터 지적을 받지 않는 것이 삶의 목표인 것 마냥, 알아서 눈치를 보고 처신을 잘하려고 애를 썼다.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면 쉽게 해결할 일을, 굳이 혼자 찾다가 찾다가 그래도 안되면, 용기를 내어 겨우 도움을 구했다.

 그런데 웬걸... 내가 도움을 받는 법을 몰랐을 뿐, 요청을 받은 그들은 흔쾌히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주었다. 대학원 생활의 노하우, 연구나 시험에 필요한 자료들, 병원생활을 견디는 지혜, 학위를 마칠 때까지 어떻게 멘탈을 부여잡아야 하나, 이다음에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나 등등 이 길의 고비고비 마다, 이 길을 먼저 간 선배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러한 도움 덕분에, 나 또한 도움을 필요로 하는 후배들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보탬이 되고 싶어졌다. '바쁘실 텐데 미안하지만...' 이런 도움 요청에, '괜찮아.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는 것도 꽤 좋은 일이니까.'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혼자 모든 걸 감당하려고 하지 않고, 힘들 때 도움을 구할 수 있는 동료들과 윗사람이 있다는 것은, 또 때로 내가 그런 사람이 되어줄 수도 있다는 것은 든든한 일이다. 실제로 도움을 구하지 않더라도, 그런 대상이 있다고 믿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기댈 안식처를 얻게 된다.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이 언제나 늘 내 곁에 있어야 한다거나, 완벽하고 멋진 대상일 필요도 없다. 누군가를 존경한다는 것이 그 사람을 완전히 신봉하고, 신적인 존재로 우러러보는 그런 위대한 감정일 필요도 없다. 그것이 존경의 기준이라면 세상에 존경할만한 인물은 한 사람도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싸이클 브레이커를 꿈꾸는 우리는 이렇게 대화를 마무리했다.

  "누군가를 100% 존경할 필요가 있을까요? 이 사람에게는 이런 존경할 만한 점이 있고, 저 사람에게는 저런 존경할 만한 점이 있고, 그걸 발견하는 것 만으로 충분한 것 같아요."

  살면서 존경할만한 구석이 있는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인연을 쌓아갈 수 있다는 점이 다행이고, 또 때로는 헤아리고 돌보아야 할 대상이라고 여겼던 존재에서도 존경할만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그들의 억척스러움과 성실함, 진정성을 존경한다고... 그것들이 내 안에도 있다고, 그들이 밑바닥에서 온몸으로 지탱해온 그 작은 부표가 지금의 나를 떠받치고 있음을 안다고. 부모의 어떤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고자 마음먹는다고 해서, 그들에 대한 어떤 존경의 마음이 사라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들은 늘 함께 있다.

이전 07화 미안하다고 하면 다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