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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mforter Aug 11. 2022

좌절을 견디는 법

 '귀하의 능력은 출중하오나 아쉽게도...'

 출중한데 왜 안 뽑아? 우쒸!

예상한 좌절이라도, 막상 눈앞에 마주하면 좌절은 쓰라린 법이다. 이리될 것을 알고 미리 유리 멘탈 보호 장구도 든든히 한 것 같은데, 그래도 고통을 완전히 피해 갈 수는 없다. 도전에 맞서 취할 수 있는 보호 장구라 함은 미리 실패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서도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원하는 대로 되지 않더라도, 최선을 다했으니 후회는 없다고. 내가 할 수 있는 걸 다 쏟아부었다고.' 그 한 마디를 당당히 할 수 있도록 대비하는 것만이 내가 준비할 수 있는 최선의 보호 조치이다.


 열심히 하면 성공할 거란 얘기는 당위의 세계에서 통하는 규칙이고 현실은 '꼭 그래야만 한다'는 당위적 규칙에 따라 흘러가지 않는다. 세상에 열심히 하는 사람은 차고 넘치니까. 그리고 열심과 성공이 정비례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성공에는 그것보다 많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요소들이 작용한다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다. 하지만 마음 한 켠으로는, 그래도 나는 내가 생각하는 당위적 세계에 안전하게 남아있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를 한다. 착하게 살면 복을 받는 것이 자명한, 불확실성이 제거된 안전한 세계. 인간은 누구나 태어나면 죽는 게 자명하지만, 나에게는 그 죽음이 닥치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살듯이 말이다.


 열심을 다하는 것 외에 나를 보호할 것이 없던 나는 스스로를 혹사시키며 고통을 받는 만큼 그 대가가 따라올 거라는 미신에 기댔다. 그래서 중요한 일을 앞두면, 스트레스로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속을 끓인다. 이러나저러나 결과가 달라질 리도 없는데, 그렇게 혹사를 시켜야만 내가 열심을 다 했음을 증명할 수 있을 것만 같아서. 그 덕에 인생의 큰 좌절을 몇몇 피해갔던 것일 수도 있겠으나, 어쩌면 나는 그 이유를 여지껏 잘못 알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동안 크든 작든 성공의 경험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나를 혹사시키며 괴롭혔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많은 행운들이 따라줬기 때문이라고. 마찬가지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는 전제 하에) 내가 실패한 것은 내가 어쩔 수 없는 많은 운명이 찰나의 순간에 어긋났기 때문이라고. 좌절을 하고서야, 내가 손댈 수 없는  통제불가의 영역을 움직이는 신비한 힘을 실감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신을 믿는 것일까. 어쩌면 나도  나이가 들수록 그 미지의 힘 앞에 더 겸허해지고 기대게 될지도 모르겠다.


 좌절을 직면하면 일차적으로 내가 뭐가 부족했던 것인지 곱씹게 된다. 그때 이렇게  답했어야 했는데, 혹시 이거 때문에 평판을 잃은 걸까, 나는 왜 미처 이걸 고려하지 못했을까. 하지만 이는 모두 결과를 알고 난 뒤에나 가능한 사후반추이다. 슬퍼하기보다 논리적으로 상황을 이해하고자 애쓰던 나는 이것이 내가 슬픔을 피하는 오래된 습벽인 걸 깨달았다. 그리고 이제 그 오래된 습벽이 좀 지겨워졌다.

'이제 좀 다르게 살아볼 때도 됐잖아?'

 과거의 습벽이 더 이상 유용하지 않은 시점에 다다르고 있다는 것을 실감한다. 갑각류는 몸이 성장함에 따라 단단한 껍데기를 벗고 탈피를 한다. 탈피 과정에서 연한 속살이 드러나기 때문에 외부의 공격에 취약해져 죽을 위험이 있지만, 더 이상 작은 껍데기를 가지고 살아갈 수 없는 것이다. 남은 생을 위해 변태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냥 슬퍼하고 말자. 이제 이 좌절감을 충분히 누려보자. 열심히 하고 기대도 했으니 실망도 하고 허탈한 게 당연하잖아? 스스로에게 말을 건네본다.

'나 참 애썼네. 심란해. 그렇지?'

손바닥을 펴 가슴팍을 가만히 어루만져 보았다. 찡하고 아린 느낌이 퍼져나가는 것 같았다. 헤어질 결심에서 박해일이 말했듯이, 슬픔이 잉크처럼 번져나가는 것을 느껴보았다.


 그리고 이제 뭘 해야 할까.

나의 내담자들에게 나는 어떻게 해야 좌절을 잘 견딜 수 있다고 말해 왔던가. 내담자들에게 '이렇게 하는 게 좋아요'라고 말하면서도, 나는 스스로 엄두가 나지 않던 일들을 해보기로 했다.

 타인과 슬픔을 나누는 것 말이다.

남편이 땡땡이와 쌩쌩이를 데리고 귀가했다. 땡땡이와 쌩쌩이에게 먼저 시도해 본다. "얘들아. 엄마 한번 안아줄래? 원하던 대로 잘 안돼서 속이 상해." 시크한 땡땡이는 격하게 팍 한번 안아주고, 다정한 쌩쌩이는 "괜찮아, 잘했어."라고 속삭여주었다.  


 저녁도 차리기 싫은 김에 중국집에 배달을 시켰다. 배달 요리를 싫어하는 남편은 직접 저녁을 차리겠다고 나섰으나, 짜장면이라면 환장하는 쌩쌩이는 "엄마 말이 다 맞아. 무조건 맞아."라면 엄마 편을 들었다. 음식이 도착하고, 모두 식탁에 둘러앉았다.
 "이건 엄마의 좌절을 기념하기 위한 음식이야." 나의 말에 아이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좌절을 왜 기념해요?" 

 "음... 좌절했으니깐 맛있는 거 먹고 힘내라고? 원하던 대로 안되면 다른 길로 가면 되니까 괜찮다고 위로하는 거야. 그러니 너희도 나중에 원하는 대로 안되어 속상할 때 엄마에게 말해주라. 같이 위로하자."  

 "응응" 듣는 둥 마는 둥 아이들은 허겁지겁 짜장면을 먹었다.


 일찍 자겠다고 들어가 누운 내가 꽤나 멀쩡해 보였는지, 남편은 애들을 재우고 컴퓨터 방에 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괜히 부아가 나서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 따져 물었다. 

 "어떻게 이래? 사람이 속상해하면 위로를 해야지. 미드가 눈에 들어와?" 

 그만하면 위로를 하지 않았느냐고, 이것은 그리 속상할 일이 아니라고, 누구나 그만한 실패는 한다고, 자기는 수십 번도 더 떨어져 봤다고 일장 연설을 늘어놓는 남편에게 뚜껑이 열려서 소리쳤다. 

"가르치려 들지 마! 그래서 당신에 비하면 나는 속상할 자격이 없다는 거야?"


 그런 뻔한 레퍼토리는 너무 잘 알고 있다. 온갖 고초를 다 겪으며 살아온 아빠의 인생 앞에 내 고통은 늘 너무나 하찮고 복에 겨운 것이었다.

 '아 그렇군... 나는 힘들어할 자격이 없구나. 겨우 이 정도로 힘들어하는 건 나약한 거구나. 실패한 걸 내보이는 것은 수치스러운 거구나' 이 내면의 목소리를 떼놓고 보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려야 했을까. 나는 점점 더 실패의 경험을 숨기고, 결코 좌절과 고통의 시간을 부모님과 함께 나누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이제 다르게 생각해 본다. 

 힘들어 해도 되지 않아? 어차피 숨겨지지도 않는 걸. 나를 위하는 사람이라면 나의 실패를 알고 위로할 것이고, 흠잡기 좋아하는 사람이면 낮잡아 보겠지만, 후자의 사람이 내 인생에 뭐가 그리 중요하다고 그들의 눈총을 피하는 데 온 사력을 다해야 할까.


 나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남편은 진지하게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데?"

 나는 두 주먹을 꼭 쥐고 부들부들 떨다가, 내가 말하지 않으면 절대로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마음에 새기며 힘겹게 소리쳤다.  

 "사람이 힘들어할 때는 말이야! 안아 주고, 옆에 있어주고, 이야기를 들어줘야지!"

 버퍼링이 걸린 컴퓨터 마냥 어버버 하며 동공에 지진을 일으키던 공대 출신 남편은 그제야 렉이 풀린 듯 띄엄띄엄 말했다.

 "아~~ 아~~~ 그.래. 많.이.속.상.했.구.나?"

 A.I.가 딥러닝 하는 것 마냥 일일이 코드를 넣어줘야만 학습하는 감수성이란. '이런 거까지 일일이 말해 줘야 해?' 생각이 들어 구차하게 느껴지지만, 하지만 말하지 않으면 결코 전해 지지 않겠지. 그렇게 한 바탕 소동을 치르고, 나는 내가 원하던 위로를 옆구리를 찔러 받아 보았다. 그렇게 요란하게 좌절을 누리고 간만에 푹 잠이 들었다.


 물론 안 겪으면 더 좋겠지만, 이 좌절들을 충분히 누리고 잘 떠나보내고 나면, 타인의 좌절과 슬픔에 더 귀를 잘 기울일 수 있지 않을까. 경험들지금 이 시점에 내가 꼭 겪어 봐야 할 일들이 아닐까. 나는 늘 내 고통은 하찮고, 아파할 자격이 있는 거대한 고통을 겪은 적이 없기 때문에, 타인의 고통에 공감할 자격이 없다는 부적절감이 있었다. 그리고 시점은 다르더라도, 누구나 인생에 주어지는 고통의 총량은 비슷하다는데, 젊은 시절 피해온 좌절이 남은 인생 나를 덮쳐 오는 건 아닐까 두려워 했다. 하지만 그간 좌절과 고통을 충분히 느끼며 누리지 않고 덮어왔기 때문에, 그것들이 없는 것처럼 스스로를 속여 온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당분간 좌절하고, 당분간 슬퍼하기로 하고, 또 이렇게 기록하며 이 시간을 누려 본다. 이 시간이 지나면 다시 걸을 힘이 나겠거니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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