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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mforter Oct 28. 2022

상처받을 권리

 "선생님은 왜 심리학 하셨어요?"

 "왜긴... 사는 게 괴로워서. 이 고통의 이유를 알고 싶었어."


 나의 대답에는 '당신도 그렇지 않아?'가 생략되어 있었다. 한 때 나의 수련생이었고, 이제는 육아 동지가 된 그녀를 오랜만에 만났다.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보내고 막간의 시간에 브런치를 즐기기로 한 것이다.  이제는 함께 늙어가는 처지, 일과 육아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잡아야 할지 고민하고, 엄마 같은 엄마는 되고 싶지 않았는데 어떤 엄마가 되어주어야 할지 몰라 방황하는 동지애가 느껴졌다. 그녀를 오래 알아왔지만 사적인 이야기를 격의 없이 할 기회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그녀의 가족사를 듣는 것은 처음이었다. 단단하고 야무지며 믿음직스러운 그녀에게 그러한 아픔이 있을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어떠한 아픔인지 구체적으로 몰랐을 뿐,  상처가 그녀를 단단하고 야무지게 만들었을 것이라고는 짐작하고 있었다. 우리는 각자 자신만의 상처를 안고 이 길로 들어선 사람들이다.


  정신건강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통용되는 자조적인 농담이 있다. '치료받아야 할 인간들이 치료하겠다고 이러고 있다'는 말이다. 임상심리전문가가 되기 위해 대학원, 병원, 상담소 등을 거치며 인연을 맺은 동료들은 대체로 섬세한 영혼의 소유자들이었다. 인생에서 벌어지는 고통을 그러려니 하고 마냥 넘길 수 없었던 사람들이 자기 이해를 목적으로 이 일을 시작하게 되는 건 비교적 흔한 일이다. 그래서  그들이 쓴 학위논문 주제를 보면, 저자의 핵심 문제와 갈등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고 우스갯소리를 한다. 아무래도 나에게 의미가 있고 중요한 주제를 선택하게 되고, 그 주제를 이해하고 치료법을 개발함으로써 자신을 넘어서고 싶은 욕구가 있는 것이다. 지적인 이해가 도움이 될 때도 있지만, 때로는 자신의 상처를 자극하는 내담자를 만나 감정적인 동요로 곤란을 겪기도 한다.

  이 지점에서 직업인의 고뇌가 시작되는데, 단순히 마음공부와 멘탈관리를 목적으로 심리학을 접하는 것과 전문적인 상담사가 되는 것은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전문적인 상담사에게 요구되는 일차적인 자질은 당연히 전문성이다. 이 전문성은 '내가 얼마나 힘들었고, 심성이 여리며, 이타적이고, 타인에게 잘 공감하는가'와 같은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문제를 떼놓고 내담자를 있는 그대로 보고, 적절한 거리를 유지할 수 있는지'가 중요한 사안이 된다. 그래야만 내담자에게 도움이 되는 태도와 방법을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해결되지 않은 자기 문제에 매몰되어 있으면, 상담자는 자신의 문제를 내담자에게 투사하거나, 내담자의 문제에 과몰입하여 상대를 있는 그대로 보기 어렵다. 따라서 상담자는 자신의 문제를 객관적인 시각으로 돌아보고, 현재 자신이 어떤 상태에 있으며, 자신이 상대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끊임없이 살펴봐야 할 책무가 있다.


  나는 내 문제에 빠져 전문성을 상실한 그런 미숙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선택한 일을 잘 해내고 싶었고, 무엇보다 비극의 주인공 코스프레를 하며 우울함을 전염시키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늘 내가 가진 문제를 축소했고, 나보다 더 큰 비극을 겪은 사람들의 고통에 빗대어 '이건 아무것도 아니야. 오버하지 마. 넌 그럴 자격이 없어'라고 말했다. 그것을 사실로 믿는 동안 내 인생은 정말 별 문제가 없고, 꽤 괜찮아 보이는 것 같았다. 병원에서 함께 일하던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님으로 부터 '자네는 웰부트린(우울증 약)을 먹으면 효과가 있을 것 같네.'라는 말을 들었을 때에도, '교수님. 농담도 참'이라고 흘려 들었다. 오랜 기간 무기력하고, 때때로 깊은 땅속으로 꺼져버리거나 벼랑 끝에 서 있는 느낌에 시달리며, 이대로 잠이 들어 내일 아침 눈뜨지 않아도 아쉬울 것이 없는 인생을 살고 있었지만, 어쨌든 해야 할 일들을 꾸역꾸역 해내고 있었다. '남들도 다 이렇게 살아. 유난 떨지 마.'


 그런 내가 부러워하는 것이 딱 하나 있었는데, 바로 '사랑받고 자라 근심 걱정 없이 해맑아 보이는 사람', 즉 정서적 금수저들이었다. 그들은 자체로 빛나 보였고, 누가 뭐래도 흔들리지 않는 굳은 심지가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스스로 그런 사람이라고 믿고 싶었다. 부모님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고,  언제나 내 편일 것이라고 믿었다. 나는 부모님의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는데, 그들은 그런 부모가 되고자 하는 소망과 바람이 충만하였다고 믿는다. 다만 소망과 바람만으로 아이가 성장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 안타까울 뿐. 그토록 간절하게 믿고 싶었다는 것은 그것이 곧 나의 결핍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의 문제가 무엇인지, 나의 결핍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보기 전까지, 나는 별 문제가 없는 사람처럼 행동하면서도, 내담자를 만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도 돌보지 않으면서, 무슨 다른 이의 마음을 돌보겠다는 것인지 이율배반 같았다. 한 편으로는, 늘 나를 따라다니는 냉소적인 목소리가 들켜버릴까 봐 겁이 났다. '남들도 다 그렇게 살아. 당신도 유난 떨지 마.'


 하지만 가면놀이는 오래가지 못했다. 사람은 생긴 대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유난 좀 떨어보자! 항상 그런 것도 아닌데, 힘들 때 유난 좀 떠는 게 뭐가 어때서? 나도 살아야 할 거 아닙니까?'

 꾹꾹 눌러놓았던 감정과 문제들은 당당하게 자신의 몫을 요구했다. '나는 네 마음속에 있고,  나를 무시하면 큰코다치게 될 거야'라고 경고 메시지를 보내는 것 같았다. 이 메시지를 무시하다 기어코 큰코다치고 나서야 병원을 찾은 사람들을 무수히 만났고, 더 이상 도망칠 곳은 없어 보였다. 더  버틸 힘이 없을 때쯤, 나는 우울과 불안에 취약한 사람이 맞고, 나의 어린 시절에는 채워지지 않는 많은 구멍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세상에는 이것보다 힘든 일이 천지다. 유난 떨지 마.' 그것은 다름 아닌 내면화된 부모의 목소리였다.


 그런데... 이런 나로도 잘 살아갈 수 있을까? 이 구멍들을 안고도 이 일을 해도 되는 걸까? 이 직업은 오묘한 데가 있다. 큰 아픔을 겪은 사람들은 자신의 상처에 눈이 가려 타인을 있는 그대로 못 볼까 봐 걱정하고, 큰 아픔을 겪지 않은 사람들은 자신이 타인의 아픔에 공감할 수 없을까 봐 걱정한다. 서로 자신이 더 부적격자라는 찜찜함을 안고 속을 끓인다. 어떻게 하란 말인가?

 '그냥 합시다. 이것도 사람이 하는 일인데, 완벽한 적격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학회의 지침에는 해서는 안될 비윤리적인 행태에 대한 엄격한 기준을 제공하지만, 꼭 이런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는 기준은 없습니다. 세상에는 단일한 유형의 상담자와 단일한 유형의 내담자만 있는 아니잖아요. 우리 모두 실수를 통해 배우고, 조금씩 성장합니다. 우리는 서로 다르고, 나도 끊임없이 변하고, 내담자도 변하고, 그럼에도 어느 지점에서 만나고 또 멀어지길 반복합니다. 그러니 공감과 거리두기 그 중간 어디쯤에서 끝없는 줄타기를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답을 해본다.

 한 후배는 언제까지 이 끝없는 줄타기를 해야 하는 거냐고 자조적으로 물었다. 도대체 언제까지 자신을 돌아보고, 언제까지 성장해야 하냐고.

 "음... 아마도 평생? 그래도 지칠 땐 쉬어가도 되지 않을까요?"


 우리는 각자 자기만의 문제를 가지고 살아간다. 내가 그토록 부러워했던, 티 없이 해맑아 '보이던' 그들에게도 나름의 고민과 고충이 있을 것이다. 그러니 나에게도 아파하고, 상처받을 권리가 있음을 인정하기로 한다. 과거의 상처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는 부모와의 관계에서 반복되어온 애착 트라우마를 안고 있는 들이 많다. 그러나 상처받았다고 말하는 것조차 부모를 배신하는 것 같아서, 자기만의 밀실에 아직 딱지가 내려앉지 않은 상처를 숨겨둔다.  연고를 바르고, 밴드를 붙일 기회를 잃은 그 상처는 곪았다 벌어지기를 반복하며, 비슷한 자극을 만나면 더 큰 상흔을 남긴다.

 그들은 훗날 부모가 되는 데에도 상당한 두려움을 경험하는데, 내 부모 같은 부모는 되고 싶지 않았는데, 다른 부모를 경험해본 적이 없으니 어떤 부모가 되어야 할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나 또한 첫째 땡땡이를 임신했을 때 무수한 악몽에 시달렸다. 외계인들이 지구에 침공하여 하늘에서 미사일이 쏟아지고 건물이 무너져 내렸다. 혹은 사방이 벽으로 막힌 한평 남짓한 감옥에 갇혀, 천천히 물이 차오르는 것을 천장에 매달린 채 보고만 있었다. 그 두려움과 혼란을 거쳐 엄마로서의 내 삶을 받아들이기까지의 여정을, 그리고 지금에만 누릴 수 있는 고민과 행복과 슬픔과 웃음의 기록을 남겨두려고 한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부모를 욕되게 하는 건 아닌지 고민을 한다. 하지만 그들을 탓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들도 어쩔 수 없었던 상처를 보듬어 가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그래, 나 상처받았어'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래, 나 상처받았고, 내 인생 잘 꾸려가고 있어'로 이어지는 이야기. 때때로 잘 굴러가지 않을 때도 있겠지만, 잠시 쉬면서 힘을 모으고, 다시 묵묵히 나의 밭을 가는 이야기 말이다.

 존경하는 심리학자 마샤 리네한은 심각한 자살충동과 정서조절 문제를 호소하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변증법적 심리치료(DBT)를 개발하였고, 자신이 같은 문제로 폐쇄 병동에 입원할 정도로 힘든 과거를 보냈음을 고백한 바 있다. 그 고백은 '내가 해냈으니, 당신도 할 수 있다'는 용기를 복독아 주기 위한 것이었다. 나의 고백은 그저 평범한 일인의 자전적 이야기일 뿐이지만, 뭐...위인전을 읽고 받는 감동이 있는가 하면, 인간극장을 보고 받는 감동과 위안도 있지 않은가 하고 용기를 내본다. 

 이야기를 통해 그저 우리 모두 각자의 상처를 안고도 살아가느라 수고가 많다고 말해주고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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