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덜 소모하는 선택

by 서온

회사 생활을 하다보면 유독 이유없이 사람을 화나게 만드는 순간들이 있다.

논의가 아닌 감정으로 말을 던지는 사람들.

아침부터 언성을 높이고, 책임을 전가하고, 상대가 어떤 표정을 짓는지 확인하듯 말을 이어가는 태도에

나는 늘 같은 질문을 던진다.

너는 어떤 사람이 될 거야?’

대부분의 갈등은 실제 원인보다 태도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말이 아니라 말하는 방식에서, 논리가 아니라 목소리의 높낮이에서 우위를 가지려고 한다.

그 앞에 서면 나 역시 자동 반응처럼 울컥한다.

‘뭐지. 이건 싸우자는 건가?’

지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먼저 올라온다.


업체에서 아침부터 전화가 왔다.

받자마자 다짜고짜 언성을 높였다.

“이건 사전에 합의한 사항과 다르잖아요.

일을 이렇게 하는게 어딨어요?

대체 우리보고 어쩌라는 겁니까?”

이미 수 차례 미팅을 거쳐, 양사의 입장 차이를 정리해 온 사안이었다.

양사가 수용할 수 없는 지점과 양보해야 할 부분을 하나씩 짚어가며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는 갑자기 본인의 입장만을 고수하며, 기존 합의는 자신의 의도가 잘못 전달된 것이라 말했다.

철저히 우리 측의 잘못이니 배상하라는 게 핵심이었다.

통화 내내 우리 측 담당자 이름을 한 명씩 거론하며 면박을 줬다.

마치 단 한번도 합의한 적 없다는 사람처럼.

그동안 쌓아온 대화와 기록이 한순간에 무효가 되는 기분이었다.

수차례 근거 자료를 토대로 설명했고, 오해를 풀었다고 믿었는데 모두 물거품이 되는 느낌이었다.

이정도면 정말 싸우자는 거지

예의를 갖추지 않는 상대를 보며, 화가 먼저 올라왔다.

모든 자료는 준비되어 있었다.

업체 측 말 하나씩 반박 할 수 있었다.

면전에서 두고 잘못된 부분을 짚어 당황해 하는 모습이 보고 싶은 마음도 솔직히 들었다.

그 순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굳이 같은 부류의 사람이 될 필요가 있을까

나는 잠자코 업체측의 이야기를 들었다.

설명도, 반박도 하지 않았다.

십여 분쯤 지났을까.

그제야 상대는 숨을 고르듯 말을 멈추고 내 말을 기다렸다.

“말씀 주신 부분 이해했습니다.

다시 한번 더 확인해 보겠습니다.”

이 말을 입 밖으로 내기까지 생각보다 많은 힘이 들었다.

괜히 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몇 번이나 반박할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그렇게 전화를 끊었다.

의기양양하게 전화를 끊은 상대와 달리 나는 한동안 멍하니 앉아있었다.

속이 심란했다.

‘왜 아무 말도 안 했지’

너무 쉽게 물러난 건 아닐까? 앞으로 나를 얕보면 어떻게 하지?’

사무실로 돌아와 그들이 주장한 내용을 하나하나 다시 확인했다.

기존 합의 내용과 메일, 회의록을 정리해 근거 자료와 함께 차분히 피드백을 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미안하다는 답변이 왔고 이슈는 정리되었다.

처음 며칠 동안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통화 장면이 자꾸 떠올랐고 혼자서 수십 번씩 대사를 바꿔보며 그렇게 하지 못함을 후회했다.

예의를 갖춘 내가 약하게 보이게 한 건 아닐까 의심도 들었다.

그러다 문득 웃음이 났다.

아, 내가 어른 같았구나

어른 같다는 말은 참았다는 뜻이 아니었다.

감정을 쏟아내지 않았다는 뜻도 아니었다.

그 순간, 나를 덜 소모하는 선택을 했다는 의미였다.

같은 부류의 사람이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이상하게도 뿌듯했다.

상대의 태도는 인정하되, 그 태도가 나의 태도를 결정하게 두지는 않는다.

나는 예의를 선택했다.

상대를 존중해서가 아니라, 그 방식이 나를 덜 소모하게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의는 참는 것이고, 양보는 지는 것이라고 오해한다.

하지만 회사 생활에서 그리고 사회 안에서 예의는 오히려 기준에 가깝다.

예의는 어떤 상황에서도 내가 어떤 사람으로 남을지는 결정하는 태도다.

상대의 무례함에 휘둘리지 않고 내가 나를 대하는 방식을 끝까지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도다.

나를 사랑하는 법은 항상 큰 목소리를 내는 데 있지 않았다.

때로는 한 발 물러서서 나를 덜 닳게 하는 선택 안에 있었다.

그날 나는 예의를 선택했고, 그 선택으로 나를 조금 더 아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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