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부터 여기저기 일이 터졌다. 하나만 터져도 정신없는 데 세 가지가 동시에 터지니 정신이 피폐해지고, 갈피를 잡지 못하고, 서울의 원룸 내 방이 감옥이나 다름없었다. 천 원 쓰는 것도 아까워 몇 번을 고민하던 때였다. 그럴 때 오히려 새로 안 지인들보다 오래 관계를 맺은 지인들의 행동에 기겁했고, 상처받았었다. 결국 그간 내가 그들에게 참아왔던 감정을 폭발적으로 쏟아냈다.
이십 대 초반부터 사십 대 초반까지 안 지인의 가정은 화목했고, 크게 가난하지 않았으며, 가끔 직장의 스트레스 이야기를 빼면 큰 걱정을 하거나 한 적을 본 적이 없다. 그런 그녀는 나처럼 어릴 적부터 다사다난한 가정환경과 가난한 삶, 공부할 수 없는 환경, 내가 선택하지 않는 환경에 대한 사회적 차별로 인한 피해를 받은 적이 없다. 그런 그녀가 세 가지 일이 동시에 일어났을 때 나에게 하는 말이 “너만 힘든 거 아니야, 모든 사람이 다 힘들어!”라는 말을 했다. 그런 그녀의 입에서 그렇게 나오다니 화가 났다.
그녀의 차로 자주 돌아다녔는데 차 안에서 대부분의 직장에 대한 스트레스를 이야기하다가 나에게 화를 내기 시작했다. “언니, 나 언니 가족이 아니에요. 그리고 언니 직장 사람도 아니에요.”라는 말을 자주 해야만 했다. 직장 생활의 스트레스를 들었을 때 스트레스받을 상황이긴 하지만, 감정을 폭발하며 짜증을 나에게 내는 태도는 아니었다. 직장생활의 고민이 그 언니의 최대 고민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내가 고민 이야기를 할 때면 “야 뭘 그 정도로 그래” 등 온갖 상처받는 말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결국 2012년 그녀와의 결별을 나 스스로 선언했다. 그리고 연락하지 않았다. 그녀도 내가 연락하지 않으니 연락이 없었다. 내가 보낸 문자에서 나의 감정을 읽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몇 년 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문자를 나에게 보내왔다. 화가 났다. 그녀는 나하고 연락 안 한지가 꽤 되었는데 소식을 전해준 이유가 뭘까 하면서 생각해보았지만 생각할수록 더 이해가 안 되었다. 그사이 나도 1년에 4차례나 엄마가 수술해야 했으며, 일에 대한 스트레스도 극에 달했다. 그러나 나는 또다시 그녀를 만난다면 그녀로부터 거침없는 조언을 들을 생각하니, 살이 떨리며 진저리가 났다. 그렇게 연락하기 싫어 안 했다. 나를 대하는 그녀의 행동이 종종 과하다고 생각했지만 나머지 부분은 착한 사람이라 관계를 유지했었다. 그러나 힘든 순간에도 거침없이 조언하는 그녀에게 나는 지치고, 짜증났다.
난 그녀의 엄마가 지방에서 올라와 서울에서 허리디스크 수술을 할 때도 회사 끝나고 병문안을 갔었다. 그녀와의 관계에서 적어도 내가 할 수 있는 배려와 관심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나의 불우한 가정환경에 관한 이해도 하지 않으려 했다. 그녀의 가족은 나에 비하면 몇 배는 행복했으니까. 이해할 수도 없겠지만 기본적으로 이해하려 들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이다. 나는 왜 불편한 상황들이 있는데도 그녀와의 관계를 왜 지속했는지 알쏭달쏭하다. 그녀와 함께 커피도 마시고, 여행도 같이 갔는지 모르겠다. 여행을 가서 굳이 화날 상황이 아닌데 화를 내면 나는 또 그녀에게 화를 낼 상황이 아님을 잘 이야기해야 했다.
아버지 소식에 대한 문자 후 시간이 흘러 관계 개선을 하고 싶다는 전화가 왔다. 나는 혹시 ‘조만간 결혼하는 것 아니에요?”라고 물어봤었다. 그녀는 아니라며 몇 번을 전화 수화기 너머 말했다. 그로부터 두 달이 안돼 그녀는 결혼했다.
나는 그녀의 결혼식장에는 못 갔다. 엄마가 아팠을 때라, 멀리 어디 가는 것이 쉽지 않아 돈만 부쳤다. 그 이후로 거의 연락을 안 하다가 어떤 이유로 문자를 보냈다가 훈계 같은 소리를 또다시 해 폭발해 버렸다. 그녀는 나 보다 두 살 많다고 자신이 나보다 훨씬 인생의 어른처럼 말하고 조언하기를 반복해, 또다시 그 트라우마가 생겼고, 나는 솔직하게 내 감정을 표출했다. 조언을 하는 그녀에게 “너는 나에게 어른이 아니다”라는 식의 메시지를 보냈다.
그렇게 나는 오랜 지인들과 관계 속에서 허탈감과 배신감을 느꼈다. 오히려 편해서 더 나를 만만하게 대하는지 싶어 화가 났다. 내가 참다가 이야기하는 줄 왜 모를까.
힘든 나날이 계속된 지 몇 년이 흐르니 뼛속까지 부정적인 사람이 되었다. 부정적인 말 만하고, 부정적인 생각만 했다. 지금도 잘 안 풀리니 인생이다 보니 여전히 삶을 바라보는 태도가 긍정적이지는 못하다. 하지만 다행히도 엄마와 살면서 감정적으로 안정은 조금 되었다. 혼자 십 년 이상을 살면서 고독감과 외로움이 자주 나에게 방문했는데 엄마하고 살면서 그 감정들이 덜 찾아온다.
그녀는 내가 혼자 살 때 고독감과 외로움에 대해 이야기할 때도 나를 이해하지 못하며 다그쳤다. 삼십 대 후반까지도 부모와 산 사람이 혼자 살면서 느끼는 감정을 다 이해할 수 없는데도 다 아는 것처럼 너무나도 쉽게 말을 했다. 삼십 대 후반까지도 부모와 살았고, 그 이후로 결혼했으니 그녀는 혼자 살았던 적이 없다. 그런 그녀는 그녀가 겪지 않는 일도 다그치며 조언했다.
질렀다. 아주 질러 버렸다. 참다가 폭발해 세 번 정도 쓴소리로 아주 거칠게 문자를 보냈다. 그녀는 내가 왜 그리 말했는지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평소에 여러 가지 이유로 받은 스트레스에 대해 시시때때로 이야기하면 가끔은 자기감정을 조절 못해 수시로 나한테 짜증 내는 것도 나는 참았는데, 그녀는 단지 문자 세 번에 나보다 늘 어른인 척하면서 어른으로서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지금도 다른 누군가에게 그렇게 대하고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녀는 늘 자신의 조언이 맞는 것처럼 이야기하고, 그것이 어른이라고 생각하며 상대방에 자신의 생각을 주입했으니 그 어디에서도 그러하리라 생각한다.
남을 욕하면 안 되지만 저녁을 먹는데 연락이 끊었던 친구와 십 년 만에 통화면서 그 감정들이 생경하게 떠올랐다. 이제는 일방적인 관계는 맺지 않으려 한다. 일방적인 관계를 맺으려는 상대방의 행동이 계속될 경우 자연스럽게 연락을 줄이며, 결국 하지 않는다. 억지로 관계를 이끌고 가지 않는다. 그게 내가 더 행복한 일이니까. 많은 사람을 안다고 행복한 것이 아니다. 친구가 없더라도 내가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 더 우선이다. 나이를 먹으면 어쩔 수 없이 친구들이 줄어들기 마련이며, 친구 아닌 다른 것에도 행복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