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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빛항아리 Sep 25. 2022

단박에 알아차리는 능력

여행을 사랑한다. 한때 여행작가를 꿈꿨다. 여행작가 수업도 들으며 꿈에 다가가려 했다. 그렇지만 어느 순간 그 꿈을 접었다. 국내 여행은 물론 해외여행을 다니는 사람들이 늘면서 굳이 여행작가라는 직업이 무색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시간과 용기가 허락된다면 누구든 언제든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시대가 온 것이다. 그런 시대에 따로 여행작가가 필요할까 싶었다.     


여행 작가가 되지 못하더라도 원래부터 가방 하나 질끈 동여 메고 잘 떠나는 편이었다. 그 시작을 거슬러 올라간다면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였을 것이다. 지갑을 앞으로 둘러메고 장작 4시간에서 5시간 거리의 외할머니댁을 혼자 다녔다. 지금 아이들한테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을 나는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한 것이다.


내가 사는 작은 시골 마을부터 40분 정도를 걸어 시외버스를 타고 천안을 갔다. 1시간 정도 버스를 타고 천안에 도착하면 나는 천안에서 서산 가는 버스를 타고 2시간 30분 정도를 갔다. 당시에는 교통편이 안 좋아 서산으로 가는 직통버스는 없었다. 다른 지역을 거친 후에야 서산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니 서산까지 가는 시간이 더뎠다. 거기서 다시 외할머니댁으로 들어가려면 40분 정도 시골버스를 타고 가야했고, 다시 버스에 내려서 어린 아이의 걸음으로 40분 정도를 더 가야 외할머니댁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저학년 때는 할머니가 서산 시외버스터미널까지 나오기도 했었다.     


어린 시절의 영향 탓인지 새로운 도시로 떠나는 것이 두렵지만 모험해볼 좋은 기회라 여기고 여행 가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마음이 동하면 훌쩍훌쩍 떠나는 습관이 있을 정도이다. 어릴 적부터 혼자 다니는 버릇때문일까. 나는 그 흔한 혼밥, 혼술이라는 단어가 유행하기도 훨씬 전부터 혼자 영화 보기, 혼자 여행 가기, 혼자 밥 먹기에 달인이었으니까.     


나의 이런 유전자는 외할머니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라는 결론을 냈다. 외할머니 역시 이곳저곳  다녔다는 엄마의 말을 들으며, 외할머니댁에 있을 때가 기억이 났다. 외할머니는 나를 데리고 시장이며, 할머니 친척 집을 줄기차게 데리고 다녔다. 이런 유전자 속에  하나 아주 훌륭한 유전자를 받는  있다. 그것은 바로 지리에 대한 감각이다. 지리 눈이  누구보다 탁월하다고 생각한다.

     

내비게이션이 비싸던 시절, 나는 대전에서 식품 영업을 시작했었다. 당시 사회 초년생으로 내비게이션을 살 만큼 여유롭지 않았고 그래서 나의 자동차에 언제나 전국 지도가 나와 있는 책자가 비치되어 있었다. 나는 그 책자를 가지고 내가 맡은 거래처인 홈플러스, 까르푸, 이마트, 월마트, 롯데마트, 슈퍼 등 다양한 거래처를 찾아다녔다. 전혀 몰랐던 대전 지역을 지도로 보면서 찾다 보니, 어느새 지름길도 아는 수준이 되었다. 그렇게 나는 지리적 감각이 타고났다.


틈만 나면 여행을 다녔지만 여전히 못 가본 지역과 장소가 부지기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이 다닌 것 같기는 하다. 여행 프로그램을 좋아해 여행 프로그램을 챙겨볼 때 프로그램에서 나오는 지형이나 도로, 건물들을 한 번에 보고 내가 가봤던 도시일 경우 거의 90% 이상 맞춘다. 옆에서 엄마는 신기해한다. 그러면 항상 말한다. “외할머니의 유전자를 받아서 그래.” 아주 오래전에 갔던 지역도 맞출 때 보면 나도 나한테 흠칫 놀란다.


신이 나에게 주신 능력이라면 탁월한 지리적 감각으로 여행 간 지역의 지형이나 건물을 기억하게 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언어적인 기억을 거의 못한다. 예전 어떤 사람이 몇 년 전에 내개 했던 말을 고스란히 말하며 나한테 화를 냈을 때 무서웠으며 살이 떨렸다. 그 사람과의 관계를 더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소름끼쳤다. 기억나지 않는데, 내가 말한 단어와 문장을 토씨 하나 빼놓지 않고 말하며 나를 다그치는 행동에서 질러 버렸다. 언어적 기억력이나 습득력은 부족한 탓에 더 그 사람과의 관계가 힘들었다. 자연스럽게 멀어졌지만.


여행을 자주 떠나는 이유가 혹은 지리적인 것을 잘 파악하는 유전자에서 비롯될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지금 내겐 자동차가 없지만 아마 자동차가 있다면 주말 어김없이 훌쩍 떠날 것이다. 그것이 산이 되었던, 바다가 되었던, 시골이 되었던, 도시가 되었든 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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