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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빛항아리 Oct 20. 2022

디지털 세상 속 소외계층

정기적으로 엄마와 병원을 다녀오는 일이 이젠 익숙하다. 지하철역에서 내려 버스를 타고 병원에 도착하면 바로 암병동이 있는 신경과를 들른다.       


병명은 삼차신경통이다. 수술하고 난 뒤에도 계속 아프다. 이마 부위로 왔던 고통은 해결되었지만, 치아와 코 부위로 오는 고통은 치료되지 않았다. 수술 후 병실에 올라왔던 의사 선생님이 정맥 부위에 있는 신경은 10명 중 7명이 수술 예후가 안 좋다고 설명했을 때 3명 안에 들어가길 그렇게 간절히 기도했는데, 그 간절함은 이뤄지지 않았다. 수술 예후가 맞아떨어졌다.      


삼차신경통의 고통은 아이를 출산하는 고통에 몇 배라는 것을 삼차신경통을 직접 겪은 분이 출간한 책을 통해서 알았다. 엄마가 아파할 때 잘 설명하지 못하니 고통의 강도가 얼마나 큰지 잘 몰랐다. 아직 완치가 없는 병이다. 완치라는 단어가 나올 정도로 의학적 기술이 발달해서 삼차신경통으로부터 고통을 겪는 많은 환우가 편안하고, 고통 없는 삶을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망막박리로 한쪽 눈을 실명한 엄마는 안과도 정기적으로 다녀야 했다. 그리고 췌장은 혹이 생겨 꾸준히 정기적인 검사를 해왔다. 삼차신경통까지 맞물려 병원을 정기적으로 다녀야만 했다. 모두 대학병원으로 다녀야 했기에 자식인 나와 오빠는 번갈아 가며 엄마와 동행하며 병원에 다녔다. 시골 분이고, 한글을 배우지 못했기에 대학병원에서 혼자 모든 것을 하기에는 두려움과 불안함을 가지고 있었다. 한 가지 더 힘든 것이 있다면 대부분 수납하는 과정이 엄마 혼자 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것이다. 대학병원을 다니며 디지털 세상에 어려워하는 노인들을 목격한다. 디지털이 생활의 편리함을 가져다주었지만, 그와 반대로 디지털 세상으로부터 소외되는 계층이 생겨나고 있다는 것을 병원 업무를 보며 충분히 겪고 있다.      


몇 년 전부터 망막박리는 교수님을 따라 나와 개인병원으로 다니고, 이젠 췌장도 2~3년에 한 번 검사로 변경되면서 삼차신경통만 대학병원으로 다니는 격이 되어서 다행이다. 수술 후 2주, 1개월, 2개월, 3개월, 4개월, 6개월 식으로 정기검진을 다닐 때마다 엄마와 함께 병원 다니는 일이 가볍지는 않다. 어른들에게 대형병원은 복잡한 디지털 세상이다. 병원에서 많이 도와주지만 그런데도 힘들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늘 병원 일을 끝내고 엄마와 은행에 볼일을 보면서도 디지털 세상 속 소외된 계층이 보인다. 은행 지점이 줄어 들여, 다니는 은행은 항상 사람들로 붐빈다. 은행에 앉아 있는 분들 대다수가 어르신이다. 12시부터 3시가 훌쩍 넘도록 기다렸던 한 아주머니는 처음 본 나에게 하소연을 한참이나 하셨다. 은행 지점이 줄어들고, 영업시간은 짧아지고 나이 드신 분들에게는 디지털 세상이 야박하다.

  

엄마 차례가 돼 엄마의 일을 함께 보는데도 은행 직원의 무례함에 깜짝 놀랐다. 은행업무가 끝날 무렵인 3시 30분쯤 우리 차례라 그런지 은행 직원은 온갖 짜증 나는 말투로 우리를 대했다. 무턱대고 비아냥거리는 말투를 들으니 참을 수 없었다. “왜 우리에게 화를 내시죠?” 그랬더니 하는 말이 “고객이 많아서요.”라며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이해는 하지만 그렇다고 왜 하필 우리에게 화를 내지 싶었다. 기다렸던 고객들은 얼마나 더 짜증이 났을까. 업무 하면서 하는 그의 행동과 말투가 나의 기분을 나쁘게 만들었고, 말도 안 되는 주장을 계속 내세우니 어이없었다.      


엄마의 통장을 해제하는데 나보고 ‘서명’을 하란다. 놀랐다. 은행 직원이 하는 말이라고 상상도 못 했다. “이것 무슨 말이냐?”며 “엄마 통장을 내가 왜 서명하냐?”라고 했더니 가족이라 괜찮단다.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나를 얕잡게 보고 하는 말 같았다. 이런 은행 직원의 태도에 짜증이 났지만 참았고, 나는 잠시 생각했다. 우리가 마지막이었고, 일은 빨리 끝내고 싶은데 글자를 잘 모르는 어른이 와서 통장을 해제하려니 시간도 더디 걸릴 것 같아 나보고 하라고 했던 것 같다. 그런 기운이 온몸으로 전달되었다. 그래도 아무리 생각해도 나한테는 아니었다. 비아냥거리는 사람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태도를 나에게 계속 보인다면 참다가 말하는 편이다. 몇 번 참다가 조곤조곤 반박하기 시작했다.      


그의 이상한 행동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엄마는 그 은행에 입출금 통장이 없다. 이자를 같이 예치 못하는 상황이 돼 청약 통장에 계좌 이체해 달라고 했더니, 십 원 단위는 안된다며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설명했다. 귀에 상당히 거슬렸다. 그러면 현금으로 달라고 했더니 “그것 역시 안 된다”며 말했다. 직무 유기다. 은행에 “그 돈의 주인 누군지” 묻고 싶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 예치한 고객의 돈 즉 이자를 현금으로 줄 수 없다는 말 같지도 않은 말한 그 은행 직원에 현금을 왜 못 돌려주는지 따지고 왔어야 했다. 분했다.      


은행에서 업무를 보면서 청약 통장에 십 원 단위까지 이체되었던 증거를 보여주고는 왔다. 은행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들이 나에게 절대 손해 보지 않을 것이라며 추천했던 예금으로 손해 본 적이 있어 결코 은행 직원을 믿지 않는다. 그는 규정이 바뀌어 십 원 단위는 이체는 안 된다며 말했다. 증거를 보여줘도 자신이 말이 맞다고 주장하는 그에게 바뀐 규정을 정확히 확인해서 알려달라고 했다. 결국 확인 후 자신이 잘못 알고 있었다며 시인했고, '죄송하다'는 말을 전했다.     


만약 우리 엄마 혼자 은행 일을 보면 이런 직원의 태도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었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노인에게 자신이 틀린 데도 맞다며 우기는 은행 직원이 얼마나 많을까. 그런 직원이 많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입출금 통장이 없어 이체도 안 되고, 십 원 단위의 이자도 청약 통장으로 이체가 안된다는 그는 엄마의 이자를 나의 통장으로 입금 처리했다. 결국에는 자신이 한 잘못은 시인하고 다시 내 통장에 있는 돈을 빼서 처리해주겠단다. 그 은행에 입출금 통장이 없는 엄마인데 어떻게 처리해준다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나이도 많아 은행에서 오래 근무해 보이던데 도대체 그동안 무슨 일을 해왔길래 그런 식으로 일을 처리하는지, 살다 살다가 이런 은행 직원은 처음 보니 황당하다. 그렇게 비아냥거리더니 결국 내 말이 맞았다. 은행 직원이 내 통장으로 처리했던 이자를 엄마의 통장으로 다시 내가 직접 이체했다. 비효율적인 업무처리는 처음 겪는다.


올해 5월, 얼마 되지도 않은 돈을 ‘그저 예금’ 한다고 했는데 보험 형식의 예금을 들라며 은행 직원이 한참이나 엄마를 설득했다. 내가 엄마와 같이 안 갔으면 엄마는 은행 직원의 말이 넘어갔을 것이다. 이 은행은 다른 은행인데 뉴스에 많이 나왔던 은행이다. 치매 노인에게 1억이란 돈을 그들이 팔고자 하는 예금에 넣게 해 결국 모두 돈을 잃어버리게 한 은행이다. 밥 벌어먹고 살아야 하기에 어쩔 수 없다는 말로는 이해할 수 없다. 치매 노인의 돈을 강제적으로 서명하게 하고 진행한 그런 야비한 일은 절대 하지 말아야 한다. 대부분이 선량한 직원이라 믿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 만나면 은행의 신뢰는 더 추락할 수밖에 없다.            


이런저런 일로 은행의 신뢰가 무너졌는데, 오늘도 나는 또다시 은행 직원의 태도로 은행에 대한 신뢰가 더 무너졌다. 자신들은 대출금 금리와 예금 금리 사이에 차이를 먹으며 연봉이 꽤 높다. 고객의 예치금으로 직원에게 저리로 대출해준다는 말을 은행에 몸담고 있던 친구로부터 들었던 적이 있는데, 지금도 그러하지 않을까 싶다. 돈의 혜택을 그들의 부를 늘려주는데 사용하는 듯 싶다.


디지털에 소외된 계층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 한다. 우리는 누구나 노년을 맞이하고 노인이 된다. 굳이 노인이 아니어도 디지털에 누구든 소외될 수 있다. 누구나 디지털 세상이 쉬운 것은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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