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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빛항아리 Jul 03. 2019

함께여서 행복했던 지리산 노고단 여행

작은 에피소드으로 인해 웃음으로 시작했던 지리산 여행

열아홉 살부터 속리산을 시작으로, 계룡산, 대둔산, 월악산, 소백산, 덕유산, 치악산, 북한산, 한라산 등을 다녔다. 자연에서 부는 바람, 공기가 사랑스럽고, 정상을 향해 힘들지만 한 발짝 딛는 그 발걸음이 행복하다. 마침내 정상에 도달에서 펼쳐지는 풍경을 만끽하는 것도 내가 산을 찾는 즐거움 중 하나이다. 산을 갔다 오면 으레 여기저기 다 아프고, 쑤시지만 산이 그리워 또다시 산을 찾는다.      


여행이나 산행은 주로 당일로 다녔지만, 하룻밤을 숙식하는 여행은 잠자리를 구하기가 어려워 쉽게 떠나지 못했다. 지금이야 전국에 걸쳐 게스트하우스 문화가 형성되어 여성 혼자도 충분히 1박으로 여행이 가능하지만, 예전에는 여자 혼자 여행하면 머무를 곳이 마땅히 없었다. 여관이나 모텔은 그다지 당기지 않았다. 여관이나 모텔에서 혼자 숙박할 정도로 배짱이 없었다. 거리가 멀지만 등반 시간이 긴 산의 경우 동행할 친구가 있으면 1박 정도. 무난히 다닐 수는 있었다. 그래서 다녀온 산이 치악산이었다. 근데 딱 치악산과 한라산만 갔다 왔다. 대부분 숙박이 필요 없는 하루 코스 등산이었다.


나에게 있어 2박 3일 등산은 쉬운 일이 아니었고, 2박 3일로 등산을 하러 간 적도 없었다. 지금까지 지리산을 노고단 한 번, 천왕봉 두 번을 다녀왔지만, 한 번은 당일, 한 번은 무박, 한 번은 1박으로 등산했다. 그래서 언젠가 2박 3일 지리산 종주는 꼭 해보고 싶은 일이다. 하지만 2015년 다녀온 무박 지리산 등반 후 2박 3일 지리산 종주는 앞으로 체력적으로 힘들듯하다. 이루어질 수 없는 희망 사항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는 2박 3일 지리산 종주는 해보고 싶다.   





   


처음 지리산 노고단을 밟을 수 있었던 것은 나의 친구 덕분이다. 그녀와 내가 안 것은 사설 수능학원에서이다. 1999년 5월로 거슬러 올라가 수능 준비를 위해 나는 종합반을 신청해 학원에 다녔다. 당시 누구와도 친해지지 않으려 했다. 나에게 시간이 부족했고, 시간이 금이었다. 시간을 쪼개서 썼고, 학원에 있는 친구들과 가벼운 농담이나 대화조차도 할 여유가 없었다. 그런 그곳에서 나는 그녀를 만났다. 그녀와 내가 어떻게 말을 트게 되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그녀는 이미 명석한 두뇌로 아무나 갈 수 없는 학교에 다니고 있었지만, 전공이 맞지 않아 바꿔 다시 다른 학교로의 입학을 목표로 잠깐 학원에 수업을 신청해 들으러 왔었던 것이었다. 학원을 짧게 다닌 나보다도 더 짧은 기간 다녔다. 그런 그녀와 내가 만난 시간이 상당히 짧았는데도 여전히 연락을 주고받는 것이 신기한 인연이다. 그녀는 다시 원래 다니던 학교의 같은 과로 그 이듬해에 복학했고, 결국 대학원 때에 다른 전공으로 바꿨다. 또 몇 년이 흐른 뒤 그녀는 한 차례 더 전공을 바꿨다. 그녀는 언제나 과감한 결정을 내렸고, 그 결정에 불도저처럼 밀고 나갔다. 그녀에 담대함과 결정에 늘 대단하다고 생각했었다. 두려움보다는 결정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는 그녀의 모습은 언제나 닮고 싶다.      







그녀나 나나 훌쩍훌쩍 여행을 떠나는 타입이지만 한 번도 같이 여행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2011년 9월 지리산 노고단을 함께 여행했다. 여행을 떠나기로 한 날 정신없이 부랴부랴 시간을 맞춰 만나는 장소에 나갔다. 그녀의 자동차로 지리산을 가기 위해 고속도로에 진입해 한참을 지리산으로 가고 있는데 뭔가 허전함이 느껴졌다. 그것은 나의 몸에서 느껴지는 허전함이었다. 그 허전함이 뭔지 정확히 알아차리지 못하다가 부랴부랴 나오는 바람에 브라를 착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어떻게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타고, 지리산을 가기 위한 고속도로로 접어들 때까지도 몰랐단 말인가. 아뿔싸! 창피하지만 나는 그녀에게 말했고, 우리는 톨게이트를 빠져나오자마자 어느 읍내의 속옷 가게를 찾아 돌아다녔다. 속옷 가게를 발견하고 들어가 적당히 싼 가격의 속옷을 구매해 입었더니 불안했던 마음이 편안함으로 바뀌었다. 마음의 전환은 찰나다. 순간 창피하고, 얼굴은 불그레했지만 얼마나 다급했으면 이런 일이 있었나 싶어 한바탕 배꼽잡으며 왁자지껄 웃었다. 그녀와 첫 여행이 웃음 한 보따리의 코미디였다.




     


성삼재 휴게소를 도착하니 행복한 감정이 온몸에 스며들었다. 그렇게 보고 싶었던 지리산을 조금이라도 구경할 수 있는 시간과 친구가 내게로 온 것이 마냥 행복했다. 성삼재 휴게소에서 두 시간도 안 걸려 지리산 노고단 정상을 올라갈 수 있었다. 지리산 노고단 정상에서 오랫동안 머물며 야생화와 주변 경관을 즐겼다. 많은 사람이 노고단 정상에서 잠깐 있다가 내려갔지만 우리는 한참을 노고단에 있었다. 지리산 노고단에 걸쳐있는 구름, 지리산 노고단에서 살아가는 야생화에 흠뻑 취해 카메라 셔터를 연속해 눌렀다. 야생화의 이름을 알고 있으면 좋을 텐데 알지 못한 상태에서 셔터만 눌렀다. 지금처럼 스마트폰으로 다양한 검색이 자유롭게 가능한 시대가 아니라 눈으로만 야생화 담을 수밖에 없어서 아쉬웠다. 지금이라면 나는 꽃 검색 버튼을 누르고 바로 그 자리에서 야생화 이름이 무엇인지 확인하고, 천천히 야생화를 바라보았을 것이다.   

   

2011년 봄 지리산 벚꽃을 보러 왔다가 갔지만, 지리산을 등산하기는 처음이었다. 십 년 넘게 인연을 이어오고 있는 친구와 처음으로 떠났던 여행이었고, 처음으로 옷을 제대로 챙겨 입지 않고 떠났던 여행이었다. 그해 지리산 노고단은 다 처음이었다. 처음이라 처음이어서 좋았다. 처음으로 함께한 여행, 처음으로 발 디딘 그곳에서 마신 신선한 공기와 야생화를 사랑했다. 자연을 품은 지리산과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노고단은 말만 들어도 언제나 기운이 솟는다. 노고단이어서, 너는 무슨 에너지가 있어서 사람을 행복하게, 생기 돋게 하느냐. 그해 가을처럼 또 다른 처음은 어디에서 있을지, 그리고 어떤 만남과 어떤 사연을 기다리고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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