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의 추억을 쌓다
방랑벽이 있는 것일까. 전생에 여행을 못 다녀서 한이 되어서 그런가. 때때로 시간만 되면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학창 시절에는 대중교통으로, 돈을 벌어 중고차량을 구입해 차량으로 여행을 다녔다. 나는 여행지마다 여행지 나름 다 매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어떤 이들은 한국은 관광할 게 없다고 하지만 개인적으로 많다고 생각한다. 여전히 가보지 못한 장소가 많고, 가고 싶은 지역도 많다. 같은 장소를 몇 번 가도 느낌이 다르다. 누구와 가느냐. 어떤 계절에 가느냐에 따라 느낌은 전혀 다르게 다가올 수 있다. 홍성에서는 난생처음 새조개를 먹어봤고, 울진 여행에서 태어나 처음으로 곰치국을 먹었다. 남해에서는 멸치로 쌈밥으로 먹을 수 있다는 사실도 알았다. 한국에 여전히 내가 모르는 음식이 존재하고, 그것은 여행지에 가면 더 쉽게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다녀온 여행지 중 사랑하는 여행지를 굳이 하나 뽑으라고 한다면 변산반도를 들고 싶다. 변산반도를 드라이브하면 막혔던 체증들이 전부 씻겨 내려가는 듯한 희열을 느낀다. 답답한 마음이 시원스럽게 뚫리는 감정은 아무 장소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영업할 때 변산반도의 채석강을 동료들과 갔었다. 채석강에서 동료들과 함께 나눈 그윽한 술잔과 회는 달콤함을 더해줬다. 그때부터 변산반도의 아름다움에 빠져들었던 것이었을까. 그 이전에도 어렴풋이 변산반도를 여행한 것 같은데 말이다. 술을 먹지 않는 나는 돌아오는 길에 핸들의 주인이었다. 어둠이 내려앉는 변산반도를 운전하면 밤은 밤대로 매력이 있어 오로지 그 순간은 세상을 다 가진 자가 되었다. 좋은 동료들과 좋은 풍경, 좋은 향이 있어 더 감칠맛 나는 변산반도였다.
2008년 여름, 가지고 있던 차를 팔았다. 그 후로 무작정 여행을 떠나는 일은 줄어들었지만, 이따금 방랑벽이 도져 훌쩍 떠나는 성향은 바뀌지 않았다. 친구의 언니가 시집을 가면서 집에 놓고 간 구형 마티즈로 친구와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당시 친구가 운전하지 못해, 별도의 운전자 보험에 가입하고, 여행 내내 운전은 나의 몫이었다. 그 친구와 종종 여행했는데 하룻밤 묵는 여행은 거의 없었지만 변산반도 여행은 달랐다. 우리는 대중교통의 아닌 자가용을 이용해 여행하기로 했고, 하룻밤 묵을 채비도 갖추고 변산반도로 떠나왔다.
변산반도 새만금 간척지를 들러 계속 드라이브를 하다 보니 점점 운전석 오른쪽 시야로 바다가 펼쳐졌다. 길은 왕복 2차선 도로이다. 차량도 많지 않다. 조용한 도로를 따라 풍경을 음미하면서 달리다 보니 어느새 적벽강을 발견했고, 우리는 차를 멈추고, 바다로 내려가 바다를 거닐었다. 적벽강의 풍경은 탄성을 자아냈다.
바다가 있는 지역에서 태어났지만, 줄곧 육지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적벽강과 같은 풍경은 본 적도 없고, 바다 또한 자주 간 적이 없다. 그저 외갓집에 가면 할머니의 손을 잡고 가거나, 삼촌들과 가까운 바다를 가 소라를 줍는 정도의 수준이었다.
적벽강과 채석강을 둘러보고 드라이브를 하는데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방향을 트니 부안 곰소젓갈축제를 하고 있었다. 무시하고 지나갈 수 없어서 우리는 축제 현장에 주차하고, 젓갈 축제를 구경했다. 계획 없는 여행을 할 때, 이런 경우를 만나면 여행이 더 특별하게 다가온다. 더 기억에 남는다. 게장을 좋아해 곰소에서 나오는 재료로 만든 게장을 구매했다. 축제장 옆으로 해바라기를 많이 심어 놓아 해바라기를 한참이나 구경했다. 어린 시절 옆집에 두 개 정도 활짝 핀 해바라기를 본 것이 다였으니, 눈앞에 활짝 핀 수많은 해바라기를 보자 어린아이처럼 신나 사진 계속 찍었다.
배고픔이 밀려와 밥 먹을 곳을 찾다가 들어간 음식점에서 우리는 여행을 떠나기 전과 같은 순부두찌개를 주문해 먹었다. 어떤 재료, 어떤 조리 방법이 차이가 나기에 전라도 음식과 충청도 음식의 맛이 이다지도 클까. 변산반도의 순부두찌개의 맛에 감탄했다. 같은 날, 같은 음식을 주문해서 먹었는데 어쩌면 이리도 맛이 다른걸까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주린 배를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숙소를 찾아 헤매는데 숙소들이 대부분 비쌌다. 그렇다고 모텔이나 여관은 들어가긴 싫고, 돈은 절약해야 해서 고민에 빠지다가 일단 비싸게 부르면 한 번 정도는 흥정할 생각으로 바닷가 옆 펜션으로 일단 접근하기로 했다. 한 펜션을 발견하고 1박을 여쭈었더니 조금 비싸게 부르셨다. 주저하지 않고 사람도 없는데 너무 비싸다고 하며 싸게 해달라고 졸랐더니 오만 원에 하룻밤을 묵을 수 있게 해 주셨다. 단숨에 결재하고, 펜션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아침에 일어나 펜션 밖의 바닷가로 나가 갯벌을 걸었다. 아침 갯벌을 맞이할 기회는 아무 때나 오는 것이 아닐 것이다. 갯벌에 보이는 생물체를 살짝살짝 만지며 아침 바다를 즐겼다. 그렇게 변산반도의 하루는 빠르게 흘러갔다. 하루라는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게 한걸음에 지나가 버렸다. 시간이라는 것은 때에 따라서 십 분이 한 시간처럼 느껴질 때도 있고, 어떤 경우에는 열두 시간이 한 시간처럼 흘러 지나갈 때도 있다. 여행은 후자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내소사와 개암사를 둘러보고 우리는 여행을 마무리하고, 전국 지도를 펼치고, 국도를 따라 천천히 운전해 집으로 돌아왔다. 지금이야 내비게이션이 워낙 잘 되어 있지만 나는 처음 면허를 따고 줄곧 전국 지도를 차량에 넣고 지도를 보며, 몇 번 도로를 타고 목적지에 가는지 찾아보는 즐거움을 마냥 만끽했었다. 그 이후로 그 친구와 1박을 하는 국내 여행을 가지 못했다. 스페인을 함께 여행했지만, 해외여행과 국내 여행은 비교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그 친구와 아무런 계획 없이 마음 편히 여행할 날을 기다려본다.
나이를 먹을수록 각자의 삶에 집중하다 보면 1년, 2년 몇 년이 아무렇지도 않게 흘러간다. 시간 가는 것을 잡을 수 없지만 그래도 마음의 여유를 부릴 수 있다면 기꺼이 만나 움직일 수 있는데도 우리는 저마다의 이유로 가지 못한다. 그저 가볍게 가까운 곳이라도 떠날 수 있다면 언제든 환영할 것이고, 그 친구 또한 환영할 것이다. 변산반도의 아름다운 모습이 언제나 나를 한없이 끌어안아 주리라 믿는다. 그래서 사랑하는 변산반도를 향해 언제든 달려갈 준비를 할 것이고, 다시 찾게 되거든 천천히 변산반도를 느끼고 사랑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