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갈 때마다 새롭다
전라북도 완주에서 진행하는 단기 프로그램에서 우연히 만난 친구와 프로그램이 끝나고도 여전히 연락을 주고받고 있다. 처음 숙소에서 마주친 그녀는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명상을 했다. 일상생활에서 명상을 실천하는 친구를 처음 마주했다. 명상이라는 말은 자주 들었고, 나 또한 언젠가 실천할 대상으로 생각하고 있던 터라 그 친구에게 이것저것 물어봤다.
그녀와 만남은 이틀 정도로 매우 짧았지만 서로 짧은 만남 속에서 마음이 이끌렸다. 우리는 이따금 서로 안부를 묻는 사이가 되었다. 안부를 물으면 그녀와 나는 점점 더 허물없이 속 깊은 이야기도 나눴다. 오랜 기간 알던 친구에게도 막상 꺼내지 못했던 이야기를 그 친구에게는 스스럼없이 털어놓았다. 서로가 서로에게 그런 사이가 되었다. 그녀는 어느 날, 제주도에 일자리를 구했다며, 제주도에 내려갔다. 그리고 몇 달 후 결혼한다는 소식을 들려주었다.
이십 대 초반부터 이른 나이에 결혼한 친구들이 있어 여기저기 결혼식을 다니고 삼십 대가 넘어서도 여기저기 다니다가 삼십 대 중반이 들어서면서 결혼식이 있어도 잘 가지 않았다. 연락이 끊어졌던 친구들이 갑자기 연락이 오면 ‘혹시 너 결혼하니?’ 라며 묻지만 그들 대부분은 ‘아니다’라며 답을 한다. 하지만 결국 그들은 내게 연락을 해 온 후로 보통 2개월쯤 지나면 결혼식을 올렸다. 안 갈 수도 없고, 가기도 뭐해 고민하다가 언제나 가는 결정을 내렸던 나는 그 친구들에게 실망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결혼식이 끝나면 다들 조용히 사라졌다. 그 얼마나 많은 축의금을 냈던가. 그런데 나는 과연 축의금을 그들로부터 받을 수 있을까. 그러면서 듣는 생각이 내가 일회성 소모품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들의 성대한 결혼식에 나를 이용하는 것 같아 씁쓸했다. 언젠가부터 갑작스럽게 연락 와 자신의 결혼 소식을 전하는 사람들은 가지 않았고, 축의금도 전달하지 않았다. 난 단지 그들의 결혼식에서 딱 하루의 하객 정도밖에 되지 않는 것이었다. 따라서 굳이 맞춰 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끈끈하게 연락을 해오던 사람이 아니면 가지 않았다.
하지만 이 친구는 달랐다. 우리의 인연은 짧았지만, 그 짧은 기간 동안 농익은 대화들, 남들과 할 수 없는 슬픔, 고통, 아픔 등을 서로 나눴던 사이 아닌가. 나는 그녀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혼자 제주도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주말 결혼식을 위해 주말 동안 제주를 다녀오는 빠듯한 일정이라 길게 여행할 수 없어 숙소만큼은 현지인들의 삶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인터넷으로 이리저리 검색하다가 올레길 할망숙소를 발견했다. 제주도 가면 언제나 저렴한 게스트하우스를 찾아 묵었던 여느 날과 달리 할망숙소가 확 당겼다. 중학교 3학년 때 외할머니가 돌아가셔 할머니의 향기를 느껴보고 싶었다. 제주 할망의 삶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제주인이 거주하는 집에 머무르고 싶었다. 그렇게 고인옥 할머니를 발견하고 연락을 드렸다. 할머니는 숙소에서 머무르는 것을 흔쾌히 승낙했고, 늦은 밤 제주공항에 도착해 숙소에 늦게 도착할 수 있다고 미리 양해를 부탁드렸다.
회사 퇴근 후 김포공항으로 다급하게 갔다. 공항에서 티켓을 끊고, 출국 게이트로 들어가려고 바쁘게 움직이다 그만 아이와 부딪쳤다. 아이 부모님에게 몇 번을 고개 숙여 인사한 후 무사히 게이트를 통과해 제주도행 비행기에 올라탈 수 있었다. 늦은 밤 제주도에 도착해 서귀포 대정읍에 있는 고인옥 할망숙소로 갔다. 늦은 시각이라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가 속삭이듯 조용히 인사를 드렸다. 이미 여행객을 위한 두 개 방 중 한 개의 방은 노부부가 사용하고 있었고, 나머지 한 개의 방을 안내받았다. 할머니 집은 본채, 별채가 있었고, 본채는 방이 세 개로 할머니가 거주하는 집으로 한 개는 할머니 방이고, 나머지 방은 여행객들을 위한 숙소로 쓰고 있었다. 별채는 육지에서 제주도로 잠시 건축 일 하려고 오신 부부가 거주하며 살고 있었다.
그해 5월은 여전히 추웠다. 할머니는 내가 머무르는 방에 전기요를 켜고 자라고 알려주시는 것은 물론 내가 출출할 것을 걱정하며 무심히 라면 하나를 꺼내 주셨다. 배고팠던 나를 어찌도 잘 아시고 보살펴 주시니 할머니에게서 그 옛날 외할머니 모습이 그려졌다.
낡고 찌그러진 냄비에 물을 붓고, 가스레인지에 냄비를 올렸다. 펄펄 끓는 물에 라면 하나를 살포시 던져놓고, 라면이 익기만을 기다렸다가 라면과 할머니가 내어주신 김치로 늦은 밤 허기를 달랬다. 할머니는 방에 들어가며 다음 날 아침 일찍 병원을 가야 한다고 말하고 아침에 알아서 볼일을 보라고 말했다. 나는 아침에 병원까지 태워다 드리겠다고 하고 제주도 할망의 작은 방으로 들어와 깊은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할머니는 분주하게 움직였다. 할머니는 아침 7시부터 병원을 간다며, 준비했다. 아침 일찍부터 병원이 문을 여느냐고 여쭤봤는데 아침 7시 버스 타고 병원에 가도 이미 병원은 사람들로 북새통이며, 진료도 한 시간이나 족히 걸린다고 서둘러 나갈 준비를 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차로 병원까지 모셔다드리기로 했다. 차 안에 할머니를 태우고, 병원 앞에서 내려드렸다. 병원으로 들어가는 문은 이미 열려 있었다. 아침부터 일찍 여는 동네병원이 있다니 낯설었다. 숙소로 돌아와 조금의 휴식 시간을 가진 뒤 제주도의 이곳저곳을 다녔다.
저녁 고인옥 할망숙소로 들어오니, 할머니 댁 본채의 화장실 배수관 막혔나 보다. 별채에 있는 아저씨와 할머니가 골똘히 마당에서 배수관이 막힐만한 지점에 서성거리다가 도끼로 때려 부수기 시작했다. 옆에서 랜턴을 비추며 도끼질을 같이했다. 늦은 밤 랜턴을 들고 마당에서 도끼질이란 평생 잊지 못할 작업이었다. 마당에 도끼질해도 원인을 찾지 못해 다음날 전문가를 부르기로 했다. 할머니는 이래저래 공사비를 걱정하셔 고민을 들어드렸다.
이윽고 할머니는 자신의 방으로 초대해 자연스럽게 할머니 방으로 들어갔는데 할머니가 온통 제주어로 말해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이해해보려고 귀를 쫑긋 세웠지만 알아들 수 있는 것은 고작 이십 퍼센트도 채 안 되었다. 재밌는 경험이었다.
대화 중 내가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자마자 중매하려고 해 당혹스러웠다. 할머니는 갑자기 핸드폰을 들더니 어떤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금방 할머니 방으로 전화 받았던 할머니가 나타났고, 할머니는 그 할머니의 아들과 나를 연결하려고 한참이나 말하셨다. 제주도에 내려와 살라느니, 제주도가 좋다느니, 다 알아들을 수 없지만, 할머니는 전화번호까지 달라며 나를 부단히 설득하셨다. 그러나 나는 그저 웃으며 설득당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할머니를 아침부터 병원에 모셔다드렸더니 참한 처자가 되어 있었다. 나는 단연코 참한 처자가 아니다.
일요일 친구의 결혼식을 참석하기 위해 할망숙소에서 나올 때, 할머니의 또 다른 손님인 노 부부와 함께 숙소를 나와 올레길 근처에 내려다 드렸다. 노 부부는 올레길을 걷고 다시 할망숙소로 돌아갔을 것이다. 나야 결혼식이 끝나고 제주를 떠나왔지만.
그 노년의 부부는 한 달간 올레길을 걷고 싶어 퇴직한 후 제주도에 왔고, 그동안 할망 숙소에서 지내기로 했다. 노년의 부부를 보니, 나도 그들처럼 늙고 싶다는 소망이 생긴다. 나는 과연 그들처럼 늙을 수 있을까. 그 나이에 내 옆에 누군가가 있을까. 나에게는 과연 누군가 있을 수 있는 행복이 찾아올까. 아직은 희망은 없다. 하지만 나도 노년에 천천히 함께 길을 걸을 누군가가 있었으면 좋겠다. 해외여행에서도 함께 두 손 잡고 걸어가는 노 부부가 아름다워 사진으로 담은 적도 있었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들의 노년은 쓸쓸해 보이지 않았다. 나 또한 쓸쓸한 노년을 보내고 싶지 않다. 그들처럼.
깔끔하고, 정갈하게 실내장식한 제주 게스트하우스에서 느껴보지 못했던 제주인의 삶을 살짝 훔쳐본 것 같아 잊혀지지가 않는다. 커다란 창문이 두 개나 있던 제주 할망의 작은방에 누우면 바로 앞 창문으로 보이는 제주 돌, 그 너머에 무엇이 있을까.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제주어로 말하지만 사람 좋아하는 할머니와의 이틀 밤의 추억은 돌에 새겨진 글자처럼 나의 기억 속에 한 글자 한 글자 새겨졌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