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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빛항아리 Jul 30. 2020

단짝친구가 없어졌다.

내가 친구라도 해줄까

5년 전 새로운 터전으로 옮겨오면서 기존의 삭막했던 주변 분위기가 사뭇 달라졌다. 10분 이내에 공원은 물론 하천, 산을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가벼운 마음으로 나설 수 있다. 그것은 행운이다.    


  

자연을 유달리 많이 보고 자란 유년 시절의 기억 때문인지 이따금 도시의 전체를 뒤엎는 차가운 콘크리트 건물과 길을 보면 숨이 막힌다. 그럴 때 가차 없이 가방 하나 가볍게 질끈 메고 기차를 타든, 버스를 타든 산이나 자연을 향해 냅다 달려가는 버릇이 있다. 그렇게라도 숨을 쉬어야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은 나만의 사치이다. 그것은 내 인생의 피로를 풀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였을지도 모른다.        


  

20대의 혈기 왕성한 시절, 빡빡한 일정으로 무리하게 새벽부터 산을 타기 위해 집을 나서곤 했다. 당시, 나에게 산이란 정복의 대상이었다. 무조건 정상을 밟아야 하는 대상이었다. 주변의 나무, 야생화, 계곡 등 산과 함께 동고동락하는 자연을 천천히 바라볼 여유도 없이 그저 같이 간 동행보다 빠르게 정상을 향해 밟아야 한댜는 생각 하나로 산을 거침없이 올랐다.     




그런데 한 해 두 해 나이를 먹을수록 정상을 밟아야 한다는 무리한 욕심이 버려지기 시작했다. 체력적 한계도 한몫하기는 한다. 어쨌거나 정상이라는 목표보다 주변의 경관을 즐기며, 남들보다 먼저 정상에 도착하겠다는 경쟁심을 갖지 않고, 그저 나만을 바라보면 걷는 즐거움을 알게 되었다. 타인에게 중심을 두기보다 나에게 집중하며 내가 걷고 싶은 곳까지, 내가 즐기고 싶은 곳까지 걷는 것에게서 오는 행복을 알아차렸다.   


  

산을 정복 대상으로 보지 않게 되자, 새로 자리 잡은 터전에서 멀지 않는 산을 자주 가더라도 굳이 정상을 밟지 않는다. 내가 원하는 곳까지 천천히 주변에 있는 나무의 변화도 보고, 지저귀는 새소리에도 귀를 기울이며, 계곡의 물소리에도 집중하는 순간을 가져본다. 그렇게 천천히 나는 산과 함께 삶을 살아간다. 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정상을 밟은 적은 2~3번뿐이다.      







산을 갈 때마다 으레 하는 행동이 한 가지 있다. 산 초입에 있는 공방에서 볼 수 있는 두 마리 고양이가 잘 있는지 살펴보는 일이다. 고양이를 키워본 적이 없어 고양이를 잘 모르지만 몇 년을 같은 장소에서 고양이를 보다 보니 고양이가 영역 동물이다라는 생각이 들면서부터, 고양이 두 마리가 같은 장소에 있는지 안부를 살핀다.



한 마리는 사람의 손길을 외면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에게 손길을 주는 것은 아니었다. 희한하게도 나의 손길을 외면하지 않는 노란색 고양이는 언제나 나를 반겨줬다. 길에서 사는 고양이와 종종 마주치면 무조건 도망하기 바빴는데 공방을 제 집처럼 여기는 노란색 고양이는 “나비야, 나비야” 하면 어느덧 내 곁으로 와 ‘부비부비’했다. 그 행복감이란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노란색 고양이의 털의 감촉, 애교는 나의 마음을 전부 앗아가 버렸다.


그런데 또 다른 한 마리, 검은색과 흰색 털을 가진 고양이는 심하게 사람을 경계했다. 영락없이 사람을 싫어하는 눈빛을 뿜어냈다. 항상 멀찌감치에서 나를 바라볼 뿐 내 곁으로 온 적이 없었다. 그렇게 나는 그 녀석들과 3년 이상의 시간을 함께 나눴다. 그런데 어느날부터 갑자기 노란색 고양이가 눈 앞에 보이는데도 오지 않았다. 혹시 “사람들이 해코지”를 하지 않았나 싶어 심히 걱정되었다. 한 달인가 매번 불러도 오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노란색 고양이는 보이지 않았고, 검은색, 흰색 털을 가진 고양이만 눈앞에 나타났다.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아무래도 아파 하늘나라로 가지 않았을까 생각되지만 잘 모르겠다.     



그렇게 노란색 고양이가 보이지 않고  검은색, 흰색 털을 가진 고양이는 공방에서 작게 만들어 놓은 조형물 꼭대기에 외롭게 앉아 있는 순간이 많다. 몇 년을 함께 했던 그리고 항상 공방에서 같이 뛰어놀던 친구가 없어진 탓일까. 눈빛에는 힘이 없고, 지치고, 외로워 보인다. 그렇게 불러도 오지 않던 고양이는 부르면 나에게도 망설이다 곁으로 온다. 내 곁으로 오면 노란색 고양이처럼 애교를 부리지는 않지만 외로운가 보다. 나의 손길에 슬쩍슬쩍 피하기는 하지만 예전처럼 1m 이상 가까이 오지 않았던 녀석이 그렇게 오는 것이 마음이 씁쓸하다. 친구가 있으면 좋으련만….




끝까지 책임질 자신이 없어 내가   있는 , 가끔 산에   그저  녀석의 밥을 챙겨주는 일이다. 이따금 미안한 감정이 든다. 그렇게 단짝 친구가 없어진 녀석의 외로움을 어떻게 달래   없을까. 사람도 외로움을 타는 것처럼 고양이 역시 외로움을 타겠지. 고양이 역시 가장 가까운 이가 없어졌을 때는 더더욱 그렇지 않을까? 그렇게 나는 산을 타면서  세상에서 함께 살아갈 것들에 대해 바라보게 된다.      




단짝 친구가 없어진 검은색, 흰색의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 털을 가진 녀석의 얼굴에 하루빨리 생기가 돋기를 바라며, 그 녀석이 나를 친구로 생각해줬으면 좋겠다. 인생을 살면서 곁에 소중한 사람을 잃는 슬픔의 감정이 동물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녀석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오늘따라 노란색 털을 가진 녀석도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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