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수살인>
담백하다. 이 영화를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말이 아닐까 싶다. 형사 한 명의 시선을 직선적으로 따라가면서 복잡한 기교나 혼란스러운 전개 없이 묵묵히 앞으로 나아간다. 너무 오랜만에 봐서인가, 오히려 신선하기도 했다.
사실 담백해서 좋다는 말은 장점 아닌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어떻게 보면 형사 영화로서 해야 할 것만 딱 했다는 건데, 이것만 가지고 영화를 칭찬하는 것도 솔직히 웃기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 입장에선 떡볶이가 간이 맞고 고추장 맛이 난다라고 이야기하는 것과 다를 게 없다. 적절하게 맛있지만 그렇다고 맛집이라고 이야기할 것까지는 아니다. 단, 주변의 떡볶이 집이 죄다 간도 제대로 못 맞추는 주제에 새로운 것을 해보겠답시고 이상한 생크림 같은 것을 넣고 있다면 말이 달라진다. 아마 지금 한국 영화를 보는 관객들의 생각이 딱 이정도가 아닐까 싶다. 그래서 이번에는 영화 자체에 대해 딱히 할 말이 많지도 않아서 한국 수사물 영화에 대해 잠깐 짚고 넘어가볼까 한다.
일단 형사물로서 해야 하는 것이라는 게 무엇인지에 대해서부터 말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정통적인 형사물은 범인과 형사라는 캐릭터에서 출발한다. 형사는 집요하게 사건을 파고들고 사건의 진상을 대충이나마 파악할 정도로 머리가 좋아야 한다. 그리고 범인은 보다 비상하고 창의적인 방식으로 끔찍한 범죄를 저질러서 관객들의 부하를 치미게 만드는 동시에, 쉽게 의중을 알기가 어렵도록 만들어서 마지막에 반전의 주체가 되면 좋다. 이렇게 캐릭터를 잡고 나면 남는 것은 사건 정도다. 누구를, 언제, 어떻게, 그리고 무엇보다 왜 죽이게 되었는지 상세하고 설득력 있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끝내 관객들이 상상도 못한 방식으로 이 사건이 해결되면 인과응보라는 흔한 카타르시스가 관객들에게 부여되는 것이다. 범인은 고구마로 꽉 숨통을 막고 이를 형사라는 사이다가 시원하게 뚫어주는 것, 이것이 형사물에서 가장 핵심적인 재미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공식에 어긋나거나 일부로 비트는 영화들도 있다. 대표적으로 “살인의 추억”은 사건을 해결하지 못함으로서 느끼는 답답함을 오히려 관객들에게 메시지로 전달했고, “베테랑”이나 “불한당”같은 영화들은 액션이나 퀴어 요소를 가미해 추가적인 재미를 만들었다. 이러한 영화들이 등장하는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더 이상 이전과 같은 방식만으로 관객들에게 재미를 주기 어렵다는 점이 그 중 하나로 꼽힐 수 있을 것이다. 즉, 너무 많은 영화들이 전통적인 방식으로 끌 수 있는 흥미는 다 끌어 놓았기 때문에 이제는 같은 방식이 먹히지가 않는 것이다.
허나 지금까지 한국 영화의 문제는 제대로 된 장르의 규칙조차 지키지 못하면서 또는 규칙을 새롭게 바꿀 능력이 되지도 못하면서 새로운 것을 어설프게 시도한다는 점에 있었다. 기껏 관객들을 자극적인 연출로 불편하게 만들어놓고 이러한 감정을 해소시켜주지도 않은 채 사실은 그것이 메시지였다고 이야기한다던가, 제대로 된 사건을 만들어내지도 못하면서 웃음만 주겠다고 철지난 코미디를 잔뜩 늘어놓는 식이다. 이런 상황에서 “암수살인”은 오히려 기존의 공식을 철저하게 지키고 쓸데없는 액션, 코미디, 로맨스, 신파극을 모두 배제했기에 더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선택이 비범하다고는 볼 수 없지만 결과적으로 좋은 고집이었다는 점은 인정해야할 것 같다.
그러나 이는 바꿔 말하면, 이 영화가 사실 그저 흔한 형사물에 불과하다는 말도 될 수 있다. 얼핏 보면 암수살인이라는 신선한 소재를 이용한 것 같지만 사실 본질은 기존의 영화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형사와 범인 사이의 머리싸움인 것이다. 형사는 사건을 파악하려 애쓰고 범인은 진상을 감추려고 애쓴다. 차이는 범인이 이미 다른 사건으로 잡혀서 유치장에 갇혀있다는 상황 정도다. 물론 이 영화에선 이러한 차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초반에는 범인이 왜 먼저 자백을 하는지 의구심을 자아냈고, 이후에는 전 형사를 통해 대충 속내를 밝힘으로서 범인의 비상함을 두드러지게 표현했다. 또한 범인이 갇혀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증거 인멸을 시도하거나 경찰을 방해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음에도, 명확한 증거가 없기 때문에 그리고 그 열쇠를 범인이 쥐고 있기 때문에 머리싸움이 가능해졌다. 이는 분명 좋은 소재 선택 덕분에 얻을 수 있는 효과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큰 흐름에서 본다면 결국 결말은 범인이 아무리 머리를 쓰고 몇 번 경찰을 이겨먹는다 한들 결정적인 실수와 그것을 파악한 경찰의 집요한 노력 때문에 덜미를 잡히고 마는 것이라고 정해져 있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래서 영화를 꽤나 많이 본 사람이라면 중간 중간 김윤석과 주지훈의 연기력 때문에 긴장감을 느낀 적은 있어도, 강태오와 김형민의 예측할 수 없는 운명 때문에 긴장감을 느끼지는 못했을 것이다. 특히 중후반에 김형민이 파출소로 좌천되고 사진을 새롭게 살펴보는 시점부터는 급격히 김이 빠져버리는 느낌이 들었다.
이는 배우의 연기력에 너무 많이 의존하는 감독의 연출력 부족에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편집 기술과 대사 몇 줄만 더 세밀하게 다듬어 나갔다면 아마 더욱 긴장감 있는 장면 연출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중간 중간 다소 어색하게 느껴지는 대사와, 배경음악과 대사의 음량 조절이 맞지 않았던 점도 조금 거슬렸다. 전반적으로 좋은 소재와 깔끔한 전개로 기본적인 영화로서의 미덕은 갖추었지만, 실화라는 변명 속에 창의성을 키우려는 노력이 부족했으며 다소 투박한 만듦새가 아쉬웠던 영화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평점 : 3 / 5
*****기준******
1 : (망작) 이걸 본 시간이 아깝다.
1.5 : 봤던 거 한 번 더 볼껄.
2 : 장점보단 단점이 많네.
2.5 : 단점 하나가 너무 크다.
3 : (평작) 뭐, 장단점 크기는 비슷하다.
3.5 : 장점 하나가 압도적이다.
4 : (수작) 단점이 거의 없다.
4.5 : 내 이름을 걸고 추천할 수 있다.
5 : (명작) 죽기 전에 하나만 더 볼 수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