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전등 불빛처럼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by 배석준

어떤 영화가 좋은 영화일까? 나는 단적으로 ‘본인이 재미있게 본 영화’라고 생각한다. 평론가들이 아무리 좋은 영화라 주장한들 솔직히 내가 재미없으면 그건 안 좋은 영화 아닌가? 이는 결국 영화의 존재 이유와도 연결될 것이다. 누군가는 인류애의 구현에서, 누군가는 도덕적 메시지의 전파에서 영화의 목적을 찾기도 한다. 하지만, 글쎄, 과연 정말 그것들이 존재 이유일까. 만약 영화가 그런 목적만을 추구해야 한다면 이 세상의 영화 중 90%는 이미 사라져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지, 나는 나의 글이 영화를 이미 본 사람들에게만 읽혀졌으면 한다. 추천이라는 명목 하에 나의 재미를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높은 평점의 이유에도 ‘나의 이름을 걸고 추천한다’고 적어두었다. 내가 브런치에 글을 쓰게 된 본래 목적을 버릴 정도로 나의 마음이 움직인 영화에게만 이 평가를 부여해야겠다고 다짐했기 때문이다. 물론 ‘니가 뭔데 이름을 걸고 자시고 하냐’며 비웃는 사람들도 있겠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뭐, 그냥 그렇다는 거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1.jpg 샤오쓰, 캣, 비행기에게 시비거는 타이거 일당



앞에 서론이 길어진 이유는 일종의 변명을 하기 위해서다. 흔히 사람들은 평론가를 겉멋든 집단이라 평가한다. 아마 그들의 높은 평가에 공감할 수 없는 영화가 많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목록에 이 영화는 반드시 들어갈 거라 생각한다. 4시간에 달하는 러닝타임, 배경음악이라곤 단 하나도 들어가지 않은 정적인 드라마, 지극히 낮은 진폭의 기승전결, 다수의 인물과 배경을 따라가는 긴 호흡까지. 사람들이 지루하게 여길만한 요소들은 모조리 들어가 있다. 나 역시 초반에는 졸면서 이 영화를 봤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 역시 이 영화에 높은 평가를 줄 수밖에 없었다.

흔히 기념비적이라고 평가되는 영화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그 영화의 외적인 영향력이 커다란 경우도 있고, 고전 작품들의 경우에는 현대 영화의 토대가 되었기 때문에 그 기여도를 인정해주기도 한다. 이를테면 장 뤽 고다르 감독의 영화는 누벨바그 운동의 핵심적인 작품으로서 그 가치가 높다. 하지만 나는 솔직히 말해 과연 “네 멋대로 해라”가 처음 나온 그 때의 충격을 지금도 똑같이 줄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그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요소들도 그 영화가 등장한 이후 꾸준히 발전해서 이제는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 따라서 그 의의를 인정해주어야 한다는 주장에는 충분히 동의할 수 있지만 현재를 살아가는 나도 고전 영화들에 반드시 고평가를 해야 한다는 주장에는 결코 동의할 수 없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런 식의 평가에 들어가는 영화가 아니다. 대만 뉴웨이브 운동의 대표작이라는 평가도 많지만, 나는 그런 평가 없이도, 이 영화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그 가치가 증명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3.jpg 공부를 하기 전 마지막으로 밍을 만난 샤오쓰



일단 이 영화의 가치는 오히려 다른 이들이 단점이라고 평가할 만한 요소에서 출발한다. 바로 ‘지루함’이다. 이 영화의 지루함은 결코 낭비되지 않았다. 아무 의미도 없는 와이드 샷을 남발하지도 않았고, 쓸데없는 등장인물을 상세히 설명하느라 관객들의 진을 빼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 지루함은 한 시대의 한 순간을 정확하게 포착하기 위한 갖은 노력들에서 비롯되었다. 우리는 지금까지 과거의 한 순간을 다룬 영화들을 많이 보았다. 스스로를 리얼리즘이라고 평하는 영화들을 보며 나는 그들의 시각이 편협하다고 느낀 경우가 많았다. 너무 한 명의 시각에서 영화가 전개되었다던가, 영화적인 재미를 위해 드라마적인 요소를 너무 많이 강조했다던가. 보통 이러한 느낌들은 ‘정보의 생략’에서 비롯되는데, 생략이 드라마의 흐름을 위해서 필수적이긴 하지만 그로 인해 정확한 시각도 포기된다고 보는 것이 맞다. 그렇다고 모든 영화들이 객관적인 정보를 모두 담아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적어도 그럴거면 리얼리즘이 목표가 아니어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리얼리즘이라는 수식어를 당당히 목에 내걸만하다. 영화의 모티브는 1950 ~ 60년대 대만과 대만에서 일어난 최초의 미성년자 살인사건에 있고 따라서 주인공은 살인사건을 저질렀던 샤오쓰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에드워드 양 감독은 그의 시점만으로 영화를 전개해주지 않는다. 피해자인 밍의 입장에서 전개해주지도 않고, 샤오쓰 가족들의 아픔만에만 귀 기울이지도 않는다. 살인사건을 둘러싼 모든 이들의 모든 것들, 나아가 살인사건으로 표출되는 당시 대만의 어둠과 아픔과 혼란을 어설픈 상징으로 퉁치고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사실 그대로 전달하려 애쓴다. 그래서 얼핏 보면 살인사건과 전혀 관계없어 보이는 사건들까지도 감독은 생략할 수 없었으며 그렇게 쌓여진 방대한 양의 정보에서 비롯되는 피로감이 관객들의 지루함을 야기하는 첫 번째 요인이 되었다.

두 번째 요인은 촬영 방식에 있다. 이 영화는 항상 등장인물들에게 선을 두고 그 밖에서 그들을 관찰한다. 방안에서 샤오쓰 가족이 식사하는 장면은 방 밖에서 관찰하고, 다른 학교의 갱단에게 공격하러 가는 소공원단의 모습은 학교 건물 밖에서 관찰한다. 이는 우연이 아니다. 감독은 의도적으로 사건이 벌어지는 공간의 안과 밖을 구분해 그 선까지 확실하게 화면에 담았다. 방이라면 문과 벽으로, 집이라면 창문으로, 심지어 물리적으로 안과 밖이 구분되지 않는 곳이라면 화분이나 나무로라도 그 선을 두었다. 이러한 방식이 가지는 핵심적인 효과는 ‘감정이입의 방해’이다. 즉, 영화 속 상황을 마치 나의 일처럼 이해하고 등장인물이 겪는 일을 내가 겪는 일처럼 느낄 수 없게 했다는 뜻이다. 따라서 관객들이 지루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 내 일처럼 느껴지지 않으니 긴장감이든, 간절함이든, 무엇이든 와닿지도 않고 따라서 ‘박진감 있게’ 영화를 보는 것이 어려워진다. 하지만 이렇게 했을 때 가지는 반사적인 효과는 철저히 객관적인 시각이 부여된다는 것이다. 누구에게도 편향되지 않고 제3자의 시각에서 등장인물들을 보는 것, 당시의 대만의 상황을 철저히 객관적인 시각에서 보는 것, 이것이 감독이 의도했던 바라고 생각한다.

나름의 설명을 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지루함을 묵인하고 이해해달라는 뜻은 아니다. 맨 처음 언급했듯이 아무리 명작이라 한들 재미없으면 안 보면 된다. 단지 나는 그 지루함이 감독의 역량 부족이나 헐거운 만듦새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며 따라서 지루함을 지루함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완벽한 목표를 위해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반작용으로 볼 수도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뿐이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4.jpg 아주 중요한 소재인 손전등



이러한 나의 평가가 더욱 설득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한 가지 의문을 더 거쳐야 한다. ‘그렇다면 100% 객관적인 시각이라는 것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이다. 사실 다른 학문들에서조차 해결하지 못한 난제를 고작 영화 하나가 해결할 수 있을 리는 없다. 애초에 영화의 리얼리즘도 하나의 지향성일 뿐 이뤄낼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하지만 에드워드 양 감독은 하나의 사물을 통해 약간은 우회적인 답변을 내놓는다. 바로 ‘손전등’이다.

샤오쓰가 맨 처음 촬영장에서 훔쳐온 손전등은 다시 촬영장으로 되돌아가기까지 거의 항상 화면 속에 등장한다. 야간부에 등교할 때도, 밍과 촬영장에서 이야기를 나눌 때도, 그리고 129파와의 패싸움에서도 손전등은 언제나 샤오쓰의 손에 있었다. 샤오쓰는 손전등을 통해 또는 껐다 켜졌다를 반복하는 전등빛을 통해 사건을 부분적으로 파악했다. 때로는 그렇게 비춰진 공간이 사건의 핵심적인 부분이기도 했지만, 때로는 나머지를 소문이나 편견으로 채워 넣어 사태가 극단적으로 진행되기도 한다. 대표적인 장면이 바로 슬라이를 구하러 간 학교에서 한 여학생을 목격한 장면이다. 감독은 그 장면을 샤오쓰에게 보여주었고 관객들에게는 이후의 대사를 통해 샤오쓰가 그와 관련된 소문을 퍼뜨린 것처럼 묘사했다. 그래서 관객들은 대충 다음과 같이 상황을 파악했을 것이다. ‘샤오추이와 슬라이는 사귀는 사이였고 둘이 몰래 학교에서 만나고 있었구나, 그리고 그걸 본 샤오쓰가 친구들에게 소문을 낸 것이 소공원파 내부의 권력 다툼으로까지 이어지게 된 거구나.’

하지만 막바지에 이르러 샤오추이가 테니스장에서 이야기해준 전말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사실 그곳에 있던 여학생은 샤오추이가 아니라 밍이었으며, 허니와 사귀는 사이였던 밍이 본인과 만나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슬라이가 역으로 소문을 낸 것이었다. 샤오쓰의 행적을 쫓아가는 영화의 흐름상으로는 그 장면이 밍의 새로운 면을 알려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보다 넓게 보면 결국 샤오쓰와 관객들 모두가 잠깐의 불빛, 아이들의 소문, 공개된 정보만으로 전부를 알아차릴 순 없다는 것을 알려주는 장면이었다. 즉, ‘우리가 얼마나 아무것도 모르는지’ 말해주는 것이다.

이외에도 감독은 카메라와 음향을 통해 보다 적극적으로 관객들에게서 진실을 숨긴다. 샤오쓰가 밍이 젊은 의사 선생과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고 그 방에서 나온 그녀와 이야기하는 장면을 찍을 때는 마치 그곳에 우연히 서있던 학우처럼 카메라가 살짝 렌지를 돌린다. 등장인물들이 사적인 대화를 나눌 때는 그들의 프라이버시를 보호해주는 것처럼 묵음으로 처리하기도 한다. 결국 관객들은 그저 손전등처럼 부분적으로 흐릿하게 비춰주는 진실을 통해 나머지의 어둠을 파악했고 그 과정에서 각자 정황을 추측하지만 그 정황을 사실인 것처럼 자만했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이 이야기의 결말은 보여준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jpg 밍의 카메라 테스트



이러한 맥락에서 내가 가장 흥미롭게 생각했던 등장인물은 밍이었다. 밍은 허니, 슬라이, 샤오쓰를 비롯해 영화 속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남자들의 관심을 받는 인물이다. 심지어 학교에서 만난 젊은 의사 선생과의 묘한 관계도 암시되었고, 샤오마와의 관계까지 의심한 샤오쓰의 손에 비참한 죽음을 맞았다.

이처럼 그녀와 엮인 남자들이 많은 탓인지, 이 영화에 대한 대부분의 평가는 그녀를 악역처럼 취급하는 경우가 많았다. 사람들은 그녀가 모든 일의 원흉인 것처럼 가리키고 있었다. 하지만 사실 엄밀하게 따지면 그녀가 먼저 남자들에게 접근하는 장면은 단 한 번도 등장한 적이 없다. 의사 선생과의 관계에서도, 샤오마와의 관계에서도, 그 외의 조직의 잔챙이들에게 추파를 받는 장면에서도 그녀는 언제나 수동적인 입장이었다. 물론 그녀도 스스로 남자들에게 인기가 많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그 점을 악용해서 먼저 남자에게 접근한 적은 없다. 특히 샤오마와의 관계에서 그녀가 샤오마의 관심을 이용해 엄마의 일자리와 본인의 주거 문제를 해결한 것처럼 나타났고, 샤오쓰도 그런 식으로 해석해서 결국 비참한 결말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과연 그런 관계를 처음부터 그녀가 의도했을까? 샤오마와 밍이 처음 만나는 장면에서 밍은 샤오마의 총을 들고 장난을 치다가 샤오마에게 뺨을 맞았다. 과연 그 순간도 밍이 샤오마의 관심을 끌기 위한 의도했던 것일까?

나는 이 또한 손전등 빛의 일부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본 것은 그저 남자들이 밍에게 적극적으로 구애한 것, 그리고 밍은 그러한 관계 속에서 본인이 취할 수 있는 이득을 취한 것 정도다. 그마저도 그녀가 그러한 이득을 위해 악의적으로 접근했다고 볼 수도 없고, 설사 이익을 위해 접근했다고 한들 일차적인 원인은 남자들의 멍청함에 있을 뿐이다. 그녀는 남자들의 관심을 받으면서도 그들은 그저 본인에게서 감정을 바라다가 떠나버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남자들의 사랑이 일시적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으며 그렇기에 그들에게 기대는커녕 혐오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그녀가 빨래를 하다가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그녀의 속내가 가장 솔직하게 드러난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5.jpg 밴드를 배경으로 밍과 샤오쓰의 대화



물론 나와 아예 다른 시각으로 이 영화를 본 관객도 많을 것이다. 그들의 시각 또한 모두 존중받아 마땅하다. 나도 다시 한 번 영화를 보면 또 다른 것이 보일 것 같다. 그 때는 샤오추이가 보일수도, 샤오쓰의 가족이 보일수도, 슬라이가 보일수도 있다. 아니면 당시의 대만 전체의 상황이 내 눈에 박힐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리얼리즘이 가지는 가장 큰 의의가 아닐까 생각한다. 누가, 언제,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항상 새로운 것을 얻어갈 수 있는 것. 그리고 그것이 가능할 만큼 풍성한 내용을 하나의 영화 속에 담아냈다는 것.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인 무라카미 하루키가 지향했던 ‘종합소설’이 바로 여기에 있을지도 모른다.




평점 : 4.5 / 5


*****기준******

1 : (망작) 이걸 본 시간이 아깝다.

1.5 : 봤던 거 한 번 더 볼껄.

2 : 장점보단 단점이 많네.

2.5 : 단점 하나가 너무 크다.

3 : (평작) 뭐, 장단점 크기는 비슷하다.

3.5 : 장점 하나가 압도적이다.

4 : (수작) 단점이 거의 없다.

4.5 : 내 이름을 걸고 추천할 수 있다.

5 : (명작) 죽기 전에 하나만 더 볼 수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