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없는 영이의 책 파먹기
긴긴 세월 동안 섬은 늘 거기 있어왔다.
그러나 섬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섬을 본 사람은 모두가 섬으로 가버렸기 때문이다.
아무도 다시 섬을 떠나 돌아온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 이청준 <이어도 중> -
2년 전 어느 봄, 힘든 마음을 달래려 혼자 급하게 제주도 여행을 떠났다. 2박 3일 나름의 힐링을 마치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 기내에서 우연히 마주하게 된 이 문장들.. 며칠간 나름의 위안을 받고 마음이 진정되었단 생각이 들었지만 여전히 허한 것이 무언가 결여되어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거기 있었지만 아무도 보지 못하는 섬, 한 번 보면 모두 그곳으로 건너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는 그 몽환적인 섬.. 나도 그 섬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이 스쳤던 것 같다.
기묘하고 조금은 영적인 느낌이 짙은 이청준 작가의 중편작 <이어도>. 인천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그렇게 우연히 소설 <이어도>를 만났다.
제주도 사람들의 상상 속에 존재하는 섬, '이어도'. 그 섬의 대외적인 공식명칭은 '파랑도'다.
해군은 이 파랑도의 존재유무를 확인하기 위해 대대적인 수색작업을 펼쳤고, 그 와중에 함께 승선을 한 취재기자가 배 안에서 실종된다. 그와 마지막 시간을 함께 보낸 해군중위는 그의 자살을 직감하고 그의 유족들을 만나기 위해 제주도를 찾아가며 이야기가 전개된다. 신문사 편집국장의 안내에 따라 가게 된 술집 '이어도'와 그 안에서 만나게 된 여인. 그녀와 하룻밤을 보내고 제주도를 떠나는 설정이 다소 억지스럽지만 벗어날 수 없는 운명에 순응하듯 소설 속 주인공들의 행동은 정해진 순리대로 흘러갔고.. 섬을 벗어나고 싶어했던, 그래서 자신의 여자에게도 섬을 벗어날 것을 강요했던 기자의 시신은 다시 뭍으로 밀려왔다. 죽어서도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의 굴레가 존재하는 것처럼..
이어도를 본 사람이면 머지 않아 모두 그 곳으로 갔다.
뱃사람이던 기자의 아버지는 눈부시게 빛나는 이어도를 본 후 영영 사라졌고, '이어도' 노랫가락을 늘 흥얼거리며 돌을 쌓던 그의 어머니도 마지막 순간까지 그 노랫말을 흥얼거리다 싸늘한 주검이 되었다. 기자의 어린 시절을 온통 얼룩지게 한 이어도.. 그에게 이어도는, '섬'이란 것은 혐오의, 동시에 공포의 대상이었다. 몽환적인 얼굴을 한 환상의 섬, 이어도.. 그러나 그 섬의 실체는 모든 제주도 사람들에게 '두려움'의 다른 이름이었다. 이어도를 목격하게 된다는 것은 곧 이 세상과의 작별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죽는다'의 미화된 표현, '이어도로 간다'. 거센 파도를 삶의 무대로 살아가야 하는 제주도 사람들에겐 죽음의 그림자가 늘 가까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 공포를 완화시키기 위한 마음의 안전장치가 곧 이어도가 아니었을까.
실종된 기자는 가상의 섬 이어도로 갔을까.
에덴동산과도 같은 환상의 섬, 이어도가 실재한다는 것은 섬 사람들의 환상을 여지없이 깨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다. 해군은 이어도의 다른 이름, 파랑도가 실재함을 밝히기 위해 2주간의 탐색활동을 벌였지만 끝내 그 섬을 찾지 못한다. 그러나 돌연 사라진 기자.. 그리고 그의 실종이 자살임을 확신하는 편집국장. 그는 기자가 해군이 찾지 못한 이어도를 홀로 목격했고, 모든 이들이 그랬듯 그 섬으로 가 가상의 섬 이어도의 전설 속으로 고스란히 편입되었다고 했다. 실재하지 않는 섬이 기자의 눈 앞에 홀연히 나타났고, 그래서 믿고 싶지 않았던 그 저주스런 전설은이 허구가 아니었음을 알고 절망했을 것이라 했다. 그래서 그는 운명에 순응하듯 이어도로 떠났을까? 어린 시절 그의 부모가 그랬던 것처럼..
누구나 '마음'이란 바다에 '이어도'를 띄워놓고 산다.
너무나 두려워 직면할 수 없는 상황이나 대상이 있다면 우리는 애써 그것에 좀 더 유한 다른 의미를 덧씌워 공포감을 최소화한다. 언제든 내 목숨을 집어삼킬 수 있는 '우울'에 '감수성'이라는 옷을 입히거나 두려운 '적'에게 '타인'이란 거리를 둠으로써 그것을 마주할 수 있는 용기를 얻는다. 2년 전, 인천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내가 떠나고 싶어했던 이어도.. 그 순간에도 직면하고 싶지 않은 현실을 도피할 수 있는 무언가가 절실했던 것 같다.
그러나 가상의 섬 이어도는 파랑도란 실명으로 마라도 서남쪽 149km 지점에 수중 암초로 존재한다. 실종된 기자가 이 사실을 알았더라면 죽음을 선택하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