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프롤레타리아를 거부한 철없는 영의 성장 이야기
애인을 기다리며 천변 벤치에서 잠깐 잠이 든 여자
그리고 눈사람이 되어 눈을 뜨게 되는 그녀
단 몇 십분 사이 인간에서, 굳이 분류하자면 인간 아닌 것이 된 그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분히 애인을 만나고 혼자 키우는 자신의 아이를 만나 상황을 이야기한다.
통증 없이 점점 부서져내리는 손가락을 들여다보며 자신이 더 이상 인간이 아님을, 그러나 여전히 생각이란 걸 하고 몸이 녹는 두려움을 견디면서 애인과 손을 잡고 입을 맞추는 자신이 언제까지 인간일 수 있을지 걱정하게 된다.
제12회 김유정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한강의 <작별>을 손에서 놓으며 불현듯 '인간'이란 범주에 대해 끝 모르고 뻗아나가는 생각들의 멀어져 가는 꼬리를 물끄러미 지켜보아야 했다.
금수와 달리 사유라는 것을 할 수 있고 그래서 양심이라는 제동장치가 악한 행위들을 걸러낼 수 있는 존재들..
어려서부터 배워온 인간의 정의에 대한 답안.
그러나 그렇게 굳건하게 믿고 있던 인간의 기본 정의는 나이를 먹고 세월에 깎기면서 함께 변질되고 흐트러졌다. 급기야는 절대 믿어선 안 되는 것, 때로는 개보다 불신해야 하는 존재.. 그렇게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마음가짐은 혐오에 가까운 것들로 점점 오염되어 갔다.
갑자기, 아주 근본적인 질문 하나가 떠올랐다.
그럼, 인간이란 존재의 대표적인 특징은 무엇인가?
그건 정확히 인간에게만 해당되는 특징이어야 한다. 더 나은 자신의 상태를 위해 굴리는 머리를 생각으로 본다면 그것도 인간만의 특징이 될 수 없고, 양심이라는 프레임에서 인간을 본다 해도 그 틀 밖으로 비어져 나가는 인간의 수는 점점 많아지는 것 같다. 양심 없는 쓰레기지만 인간의 탈을 쓴 그들부터 숭고한 천사지만 이 세계에서 잠시 인간의 모습을 한 사람들까지 그 넓은 스펙트럼에 모두 해당할 수 있는 인간의 특징이란..
언제든 여분의 시간을 보낼 책 한 권을 가방에 넣어 다니는 것처럼 그 질문을 한동안 내내 머릿속에 넣어 다녔다. 그러나 딱히 이렇다 할 결론들이 떠오르지 않았다.
근본적이지만, 그래서 누구에게 물어봐도 쉽게 답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은 질문이지만 수수께끼처럼 시원하게 풀리지 않는 의문이었다.
영화 <인시던트>를 보며 문득 갈구하던 답안의 희미한 윤곽을 본 것도 같았다.
과거, 현재, 미래를 분절해서 생각할 수 있는 존재.. 그래서 계획을 세우기도 후회를 하기도 하는 존재..
그것이 인간의 특징이 아닐까 하는 생각..
알 수 없는 이유로 주인공들은 벗어날 수 없는 한 공간 안에 35년을 갇히게 된다. 그 자리에서 똑같이 맴을 돌다가 사건을 일으킨 유발자가 죽음을 맞이하며 공간 밖으로 탈출이 가능해진다. 지겹도록 똑같이 반복되는 상황 속에서 누군가는 끊임없이 자신을 단련하고, 누군가는 그저 상황을 견디기에 급급하다. 갇힌 공간 안에서 죽어가는 누군가가 이렇게 얘기한다.
"나는 한 번도 인생을 즐기지 못했어, 늘 다음을 기다리며 살았지. 그리고 정작 그때가 오면 그 전이 더 좋았던 걸 알고 후회만 했어."
영화 <인시던트>에 대한 해석은 더욱 광범위하지만 며칠 동안 숙제처럼 풀리지 않던 의문의 답안이 그곳에서 급작스레 얼굴을 내밀었다.
처음엔 현재를 인지하고 카르페디엠을 의식적으로 이행하려는 자세가 인간의 특징이라는 생각에 잠시 머물렀다. 그러나 그 생각은 발 밑에서 맛있게 간식을 먹는 반려견의 행복한 모습을 보는 순간 사라지고 말았다. 카르페디엠.. 얼마나 하기 힘든 것이기에 삶의 구호처럼 외쳐대는 것일까!
과거, 현재, 미래로 분절된 시간을 사는 인간만이 유일하게 하지 못하는 그것, 현재를 즐겨라!
선한 누군가는 숭고한 가치를 위해 현재의 일부를 떼어 저축하고, 악한 누군가는 광기와 탐욕에 현재를 갉아먹는다.
과거와 미래의 시간 분절이 없다면, 그래서 후회와 계획이란 개념 자체가 없다면, 우리는 결코 '인간적'으로 진화하지 못했을까?
금수와 달리 품위와 체면이라는 것을 유지하는 또 하나의 시대적 '인간적'인 정의가 고개를 들고 보니 아마도 이 '인간'의 특징을 명쾌하게 결론짓고 싶다는 생각은 출발부터 불가능한 것이 아니었나 싶다.
인간과 인간이 아닌 것..
인간의 모습을 한 모든 사람들은 예외 없이 인간이란 범주 안에 포함될 수 있을까?
동물, 그 밖의 사물과 명확하게 경계를 구분할 수 있는 대찬 선을 우리는 과연 그릴 수 있을까?
인간의 특징을 두고 고민하던 머리는 다시금 그 아랫 범주인 구획의 단계로 내려섰다.
펜을 잡은 손이 망설이며 방황할 뿐 어디에도 이렇다 할 점 하나를 찍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