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프롤레타리아를 거부한 철없는 영의 성장 이야기
비난의 말이 가슴 여기저기를 난도한 날, 어쩐지 서름해지는 맘 속 공허가 견디기 힘든 날, 언제부턴가 그런 날에도 책장을 펼쳤다. 진정도 채 되지 않은 떨리는 손으로 왜 책을 집어 들게 되었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기이한 습관의 그 첫 순간을 기억할 순 없지만 요즘도 종종 급하게 안정제를 찾는 사람처럼 옆에 놓은 책을 향해 가련하고 간절한 손을 뻗는다.
물론 평온할 때처럼 활자가 정상적으로 눈에 들어오지는 않는다. 이미 지나간 곳에 다시 눈이 머물고 같은 줄을 여러 번 반복해 읽으면서도 그 의미를 뇌로 흡수하지 못한다. 눈으로 더듬고, 더듬기를 무한 반복.. 이내 곧 그 줄이 닳아 없어지지 않을까 하는 찰나의 엉뚱한 생각이 멍한 의식 속에서 부터 나를 현실로 밀쳐낸다.
근 두 달 동안 한강 작가의 모든 작품을 읽었다.
책을 좋아하면서도 일명 'OO빠'라고 할 만큼 좋아하는 작가가 없었다. 여전히 내 독서량이 부족한 이유일 수도 있겠고, 나이에 비해 인생의 단물 쓴물을 여러 번 맛봤다 자부하는 약간의 오만함이 이유인지도 모른다. '그래 참 좋은 말이지..'하고 책장을 덮으면 정확히 일주일 후쯤 휘발되고 마는 이야기들.. 때론 나의 학습능력이나 기억력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고민을 거듭한 날들도 있었다.
한강 작가를 처음 만난 건 <채식주의자>라는 작품을 통해서였다.
이따금씩 매체를 통해 그의 뉴스를 들은 기억이 있다. 한국인 최초로 국제적인 상을 수상했다.. 등등.. 좀 더 일찍 작품을 통해 그를 만날 수 있었을 텐데.. 그런 뉴스들이 그의 작품으로 이어지는 가교를 부숴버렸다. 조금만 유명세를 얻으면 너도나도 작가라 출간하고 강연으로 돈을 버는 사람들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나는 매체에 등장했단 이유만으로 그를 도매금으로 넘겨버린 것이다. 이쯤에선 나의 못나고 옹졸한 선입견과 시기의 마음을 인정해야 할 것 같다.
<채식주의자>가 왜 그토록 내 마음에 오랜 파문을 일으켰는지 모르겠다. 다른 매거진에 쓴 책 후기엔 '만나지 말았어야 할 인연들'이란 제목을 달아 불행한 커플들의 어긋난 인연에 대해서만 언급한 적이 있다. 그런데 그때 차마 말하지 못했던, 더 깊은 밑바닥에 숨겼던 느낌은 이유 없이 육식을 끊고 생명의 빛이 꺼져가는 주인공 영채가 꼭 나를 보는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그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아니, 그 기이함이 어디서 발원한 것인지 알려고 하지도 않았으면서 세상은 참 간편하게도 그녀를 이렇게 지칭했다. 채. 식. 주. 의. 자..
몇 년 전 모 방송사 'OO특공대'에서 전국 방방곡곡 맛집을 다니며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그들이 탐스럽게 음식을 먹는 모습을 방송한 적이 있다. 다소 과장되게 고기를 뜯고 후루룩 국물을 삼키는 사람들의 모습을 클로즈업 한 기획의도는 알겠으나, 어쩐지 난 그 모습이 부담 스러 채널을 돌리곤 했다. (정신적으로 좀 이상하게 들리려나?;;;) 뜯기는 고깃점, 희번뜩한 사람들의 눈.. 후루룩 국물 소리, 벌게진 입술과 괴이한 감탄사.. 그것이 왜 그리 보아 넘기기 힘들었는지 모르겠다. 그런 시선으로 바라보면 미친 사람처럼 냉동실 고기들을 모조리 꺼내 휴지통에 처박던 영채가 조금은 이해가 될 것도 같다.
<바람이 분다, 가라>, <희랍어 시간>, <노랑무늬 영원>, <여수의 사랑>, <내 여자의 열매>, <검은 사슴>, <그대의 차가운 손> 등 작가의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만나며 나는 <채식주의자>의 영채를 여러 번 다시 대면해야 했다. 장소와 시간만 바뀌었을 뿐, 한 점 바람같이 유약하고, 자유롭고, 인간 흔적의 독한 냄새가 적은 영채는 작가의 작품 속에서 다른 인물들로 다시 태어났다.
영채의 아픔을 너무도 잘 이해하고 있는 작가.. 그래서 자신의 작품에서 여러 번 그녀에게 생명을 준 작가..(물론 여수의 사랑에서 자흔, 혹은 검은 사슴에서 의선을 먼저 만났다면 생명 주체의 이름이 달라졌겠지만) 그래서일까? 작가가 마치 내 속 이야기를 이해하는 절친 같은 느낌이 들었다. 고기 뜯는 사람들의 모습을 멀리 하는 나에게 채식주의자라 손쉽게 칭하지 않고 그 이유를 차분히 물어올 것만 같은.. 영아기 때 엄마 젖을 충분히 먹지 못했냐 묻는 심리상담사보다 더 큰 위로를 건넸다. 일면식도 없는 작가가 작품을 통해서 나의 아픔을 가만가만 쓸어주고 있었다. 그것이 내가 두 달의 시간을 작가에게 바친 이유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한강 작가의 작품을 접하며 마음의 어딘가가 어두워지거나 무너져내리는 경험을 한다. 그래서 그는 어두운 소설만 쓰는 작가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나는.. 영채의 모습으로, 자흔의 모습으로, 때론 의선의 모습으로 새롭게 빚어지는 작가 내면의 어떤 생명체.. 그 발원지가 작가의 마음에 샘으로 고여 있는 것이 느껴져 참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 아픈 삶을 대면하고 고개 돌리기 전에 거기에 가만히 손을 뻗어보고 그 온도를 가늠해보고 싶은 내가 최소한 외따로 떨어진 유일한 개체는 아니라는 생각과 안도감.. 한강 작가의 아픈 이야기들은 어느새 내 삶의 한 축을 지지하고 있었다. 낙담으로 와르르 무너져내리는 마음 구석의 덩어리와 부스러기, 분진들이 강으로 추락하여 어디론가 쓸려가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것을 최소한 막아내려 버티고 선 애잔한 축대..
친구..
슬픔과 기쁨을 진심 어린 맘으로 공유하는 사이.. 그것이 정의라면 책은 내게 가장 절친한 벗이다. 이제는 불안정하게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의 연락처를 뒤지기보다 곁에 둔 책 한 권에 먼저 손이 가고, 오래도록 마음을 들쑤시는 고민이 있어도 유사한 이야기를 담은 책 내용을 참고로 삼는다. '차라리 책한테 물어봐'라는 다른 매거진의 제목도 그런 이유에서 붙여지기도 했다. 마음이 썪어들어가는 내 간절한 고민이 입을 통해 누군가에게 전해지는 순간 잠시 노닥거리기 좋은 가십의 주 재료가 되어버리는 경우가 왕왕 생겨버리니 말이다.
책.. 좋은 벗들.. 한강 작가의 아픈 이야기들.. 뒤늦게 만난 절친..
아직도 내 마음엔 사흘이 멀다 하고 바람이 불어댄다. 사근한 봄바람이면 좋으련만 시야가 불분명하도록 격정적으로 몰아치는 모래바람이거나 생명이 있는 것들은 존재할 수 없이 모든 것을 냉각시키는 극한의 칼바람.. 그럴 땐 밖으로 통하는 모든 문을 걸어 잠그고 작은 내 공간에서 조용히 책을 펼쳐 든다. 좋은 벗들과 살아남을 방법들을 궁리한다. 그렇게 몸을 웅크리고 살인적인 극한의 위기가 몸을 타고 지나가는 것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