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만큼은 수채화여야 해
박완서 <그 남자네 집>

철없는 영이의 책 파먹기

by 철없는 영

<그 가을의 사흘동안>, <친절한 복희씨> 등을 통해 만나왔던 작가 박완서..

그의 첫사랑 이야기를 자전적 소설로 풀어낸 <그 남자네 집>을 통해 작가 박완서를 다시 만났다.


나에게 작가 박완서는.. 늘 새침한 구슬같은 아가씨였다.


늦은 나이에 문단에 등단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중년 이후에 본격적인 소설을 작성했을텐데도 불구하고 그의 문체는 살짝 새콤한 사과향 식초맛이 났다. 새콤해서 톡 쏘는 젊은 감각의 새침한 소녀.. 그런 문장 느낌에 매료되서 작가 박완서를 좋아하게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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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에 거침이 없다.

6.25 전후에 자신에게 벌어진 일들을 기술하면서 '궁기'란 단어를 참 많이도 썼다.

길거리에 거지꼴을 한 사람이 넘치고 넘치던 그때 딱 어울리던 단어였는지 모르지만 정확히 그걸 '궁기'라 표현하고 자신은 거기에서 조금 벗어난 위치에 있음을 보여주는 작가.. 거칠것없는 작가는 자신을 표현할때도 야멸찼다. "그때 난 새대가리였구나"


플라토닉 사랑을 일부러 추구한 것은 아니지만 시대적 분위기와 임신의 공포로 어쩌다보니 플라토닉한 사랑으로 시작과 끝을 맺게 된 첫사랑, 그..

그러나 주인공은 결국 안정적인 직업을 가진 은행원을 남편으로 택한다. 새가 요기조기 집을 구경하고 나서 가장 탄탄한 집을 가진 수컷과 짝짓기를 하듯.. 그래서 그의 삶을 송두리째 후회하거나 그로 인해 부정을 밥먹듯 저지르거나 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 결혼을 한 자신을 조금은 경멸하는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첫사랑에 대한 은은한 향수를 노인이 된 후에도 놓지 못한다.


나 어릴 적 우리집 뒤 어디 어디에 그런 집에 이런 남자가 살았었지.. 그때 나도 그런 격정적인 마음이 있었더랬지.. 더이상 젊지 않은, 점점 늙어가는 나를 위한 마음의 보상.. 첫사랑 그남자, 그리고 그 남자를 떠올리게 한 그 남자네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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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아련하고 아름다운 그때 첫사랑의 이야기에 중심을 둔 것이기보다 전쟁을 전후한 시대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때 거리의 모습, 사람들의 사는 이야기, 가족을 잃은 아픔, 고부간의 모습 등.. 우리가 생각하는 우리나라의 가장 힘들고 못살던 시대의 모습이 정말 그랬다고 입증하고 있는 증거랄까.. 그런 느낌들을 고스란히 전해받을 수 있었던 소설이었다.


결국 첫사랑 그 남자는 병을 앓고 성치못한 몸으로 살다가 주인공보다 일찍 삶을 마감한다. 남자도 가정을 꾸렸고 아이를 둘이나 두었다. 그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주인공은 남자를 마지막으로 다시 만났다. 그리고 쓰러지듯 무너지는 남자를 마지막으로 가슴에 안았다. 누가 봐도 어머니를 잃은 아들에게 위로를 건네는 이웃의 모습으로 괜찮다고 다독여주며 등을 쓸었다. 그러나 여자는 생각한다. 우리의 결별은 그것으로 족하다고..


작가의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다시 한 번 인생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첫사랑 그 남자를 선택했을까?

아니면, 첫사랑이란 영역은 언제나 늘 이렇게 수채화 느낌으로 맑게 남아있는 것이 옳은지..

작가의 다음 말이 궁금해지는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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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현재 시점에서 후배의 이사로 인해 그 남자의 집을 떠올리며 소설은 예전 일을 떠올리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작가는 다시 현실로 돌아와 말한다. "실컷 젊음을 낭비하려무나. 넘칠 때 낭비하는 건 죄가 아니라 미덕이다. 낭비하지 못하고 아껴둔다고 그게 영원히 네 소유가 되는 건 아니란다"


자신의 젊었던 날, 사랑 이외엔 다른 것이 보이기 전의 그는 그때의 충만한 감정과 미래따윈 계획하지 않았던 시간들을 일종의 낭비였다고 생각하면서도 살아가면서 충분히 해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때 그 남자와의 애절한 마음을 세상의 모든 도덕이나 법규에 얽매여 누르고 눌렀다면 더 큰 후회가 남았을 것같단 조심스런 고백..


시간은 유한하고 격정의 감정이 인생에 스미는 시간도 때가 있다고 소설은 말한다.


그 남자네 집..

수채화같은 기억으로 남아야 할 나의 그 남자네 집은 그 형체가 점점 희미해져 가고 있다. 그래서 노인이 되어서도 그리워할 어떤 맑은 기억을 가진 작가가 새삼 부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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