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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없는 영 Jun 28. 2019

알약 여섯,

우울증과 제법 오래 살아온 철없는 영이의 체험기

#우울증 약에 관한 잘못된 편견들


OO 씨 참 대단한 것 같아. 어떻게 그 약 먹고 몽롱하고 느슨한 상태로 글을 써?


다른 질병으로 병원에서 주기적으로 약을 먹는 지인은 본인의 약에 항우울제가 들어있다며 신경정신과 약을 먹는 제게 이런 말을 합니다. 어디서부터 이 잘못된 생각이 아니라는 걸 말해줘야 할까.. 잠시 생각하다 별로 의미가 없는 일 같아 그냥 대답을 포기합니다. 


항우울제나 항불안제를 먹는다고 해서 일상이 모호해질 만큼 몽롱하거나 느슨해지지 않아요. 이게 무슨 향락성 마약이나 마리화나도 아니고..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세로토닌 분비에 장애가 생겨 그걸 정상인과 (우울증 환자를 비정상으로 구분하는 건 아니지만.. 편의상) 같은 수치로 조정하는 것뿐인데.. 그럼 일반인들은 모두 몽롱한 상태로 삶을 살고 있나요? 가끔 이렇게 오지랖성 발언을 들으면 참.. 대한민국에서 우울증을 공개적으로 앓는다는 것이 여전히 힘든 일이구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항우울제가 꼭 우울증 치료에만 처방되는 것은 아닙니다. 호르몬 치료를 받는 분들이나 만성두통으로 고생하는 분들의 약에도 종종 항우울제가 포함되어 있어요. 그러니 여러 다른 약에 이거 한 알 포함되어 있었다고 우울증 환자들은 이러네 저러네 함부로 말씀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개인적으로 우울증 약을 접해본 후 느낀 첫 생각은 '신세계를 만났다'였어요. 취재를 다녀온 후 억지로 억지로 기사를 하나 겨우 써내던 이전과 비교했을 때 약을 복용한 후 단기 집중력이 급 상승하는 걸 느꼈거든요. 앉은자리에서 뚝딱 여러 개의 기사를 해치워버렸습니다. 발을 질질 끌며 한걸음이 버겁던 사람이 갑자기 붕붕 달리는 기분이랄까.. 


잠도 정말 깊이 잤습니다. 평소 수면장애를 앓고 있어서 새벽녘에 겨우 잠들었다 몇 시간 쪽잠을 자고 일어났거든요. 게다가 그 시간마저도 온전히 잠들지 못하고 말도 안 되는 온갖 꿈으로 두세 번 주기적으로 깨기를 반복했습니다. 그런데 약을 먹으면 아침까지 깨지 않고 푹 잘 수 있었죠. 취침 전 약을 먹으면 정확히 30분~1시간 후 깊은 잠으로 빠져들었습니다.


얼마 전 읽은 우울증 관련 체험기에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울증 약을 복용하고 오랫동안 포기하고 살았던 안정된 일상으로 조금씩 편입해 들어갈 수 있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우울증 약을 소지하지 않으면 그 안정된 느낌이 깨질까 봐 두려운 마음에 불안해하는 경우가 많았죠. 


과도한 스트레스나 마음 씀으로 일상의 균형이 깨진 보통 사람들이 찾는 곳이 신경정신과고, 그들은 보통 사람들처럼 다시 일상의 균형을 되찾고 싶은 마음에 약을 복용합니다. 삶과 분리된 위험인자들이 아니라 당신도 그럴 수 있고 누구나 극한의 우울감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죠.



그런데 누구나 장단점이 있고 동전에도 앞뒷면이 있듯이 우울증 약에도 부작용이 있었습니다. 제 경우엔 인간의 1차적 기본 욕구가 극도로 사라진다는 것이 그것이었죠. 가장 가깝게 느낄 수 있었던 건 식욕과 성욕의 감소였습니다. 평소에도 식탐이 거의 없는 사람인데 여기에 그마저 그 식욕마저 없어지니 일상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아직 완경을 (아직은 폐경이란 말이 더 보편적이니..) 생각하기에도 너무 이른데 성욕이 거의 무(無)에 가까운 것은 여러 가지로 문제가 있었습니다. 담당 의사와 얘기를 나눠봤지만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럼 약을 좀 조정해 볼게요."라는 답변만 들을 수 있었습니다.

책에서 만난 어떤 분은 오히려 일상이 너무 권태롭게 느껴져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불안함을 느꼈다는 부작용을 이야기했습니다. 같은 우울증 약이라고 해도 사람에 따라 부작용 증상은 극으로 달리 나타나는 것 같았죠. 저처럼 1차적 욕구가 급격하게 감소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오히려 그 욕구들이 더욱 증가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모 다큐 프로그램에서 항우울제는 부작용이 없는 안전한 약이라고 말한 전문가의 말도 100% 신뢰할 수는 없는 것 같네요. 


그래도 가족 중에 누군가는 제가 우울증 약을 복용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 같아 엄마에게 처음 그 사실을 털어놓았을 때, 엄마의 반응은 이랬습니다. 이제 그럼 결혼은 다 한 거 아니냐는 식의..  심지어 내 가족도 이런데 누구에게 이 병을 이해받을 것인가.. 싶은 생각이 들어 씁쓸했던 기억이 있네요. 지금 대한민국에서 우울증 약을 먹는다는 것은 대체로 사람들에게 이런 느낌으로 다가오나 봅니다. 뭔가 엄청나게 잘못된 일이 일어났구나.. 그런 시선과 편견들이 정작 힘든 마음보다 우울증을 앓는 사람들을 더 힘들게 하는 것 같아 안타깝네요.


주기적으로 취재를 나가는 모 단체 직원분께서 오랫동안 보이지 않다가 아주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내셨습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던 와중 그분은 제게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제가 그동안 우울증으로 고생을 좀 했습니다."

성실하고 선하게 한 가정을 책임지는 중년의 가장.. 그리고 우울증.. 

이것이 현실입니다. 단지 드러내지 못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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