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과 제법 오래 살아온 철없는 영이의 체험기
그녀의 전화는 2년간 계속되었습니다.
새벽 2시, 4시.. 시간을 가릴 것 없이 아무 때나 울려대는 전화..
전화를 받지 않으면 이따금씩 문자가 딸려왔습니다.
-OO언니, 주무세요? 제가 지금 너무 힘들어서요-라고 시작되는 문자들..
보통의 상식선에서 예의를 벗어난 그 전화를.. 시간을 가리지 않고 받을 만큼 저는 그 사람에 대해 아는 것이 없는 사이였습니다. 그 전화가 처음 시작되기 얼마 전 우연히 모 작가의 파티에 간 일이 있었고, 거기 모인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아픈 과거를 고백하며 치유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파티가 종료된 후 그 작가는 참여자들의 허락도 없이 차후에도 서로 만나 잘 지내라며 연락처를 모두에게 공개해버렸죠. 심지어 그 전화는 이렇게 제 의지와는 상관도 없이 시작되어 저를 공포에 빠뜨렸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당시 20대 초반이던 그녀에게 30대 중반인 제가 참 미더워 보여 그랬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꽤 아픈 얘기를 하면서도 덤덤한 모습에 인간적인 호감이 생겼을지도 모르죠. 유학을 가려한다고 고민을 상담해오길래 톡으로 이야기를 몇 번 나눈 게 전부인데.. 그 이후 그녀는 그렇게 부담스러운 연락을 집중적으로 시작해왔습니다.
처음엔 그저 예의 없는 행동에 기분이 나빠 전화를 무시했습니다. 보통은 이렇게 몇 번 전화를 무시하면 그다음부턴 전화를 하지 않는데 그 여학생은 포기하지 않고 잊을만하면 새벽시간을 가리지 않고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처음 무례한 전화가 시작되었을 때 오는 전화를 한번 받아서 따끔하게 혼을 냈어야 좋았을 것 같아요. 하지만 당시엔 저 역시 너무 힘든 삶 속에 갇혀있었고.. 혹여나 제가 내뱉은 쓴소리 때문에 어린 학생이 충격을 받아 이상한 짓을 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걱정이 되어 전화를 피하기만 했습니다.
곧 잦아들겠지 싶었는데 그 학생의 전화는 그렇게 2년이 지속되었고.. 제가 어느 정도 삶의 방향을 다시 찾았을 그때 참다못한 저는 결국 그녀에게 한통의 메시지를 보내고 말았습니다. 계속 이러면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본인의 아픔은 본인밖에 해결할 수 없다고..
너무 힘들어서 그랬다고.. 죄송하다고.. 그 여학생은 그 답장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연락을 하지 않았습니다.
오늘은 제 자신에게도 해당되는.. 우울증을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들의 '최소한의 의지'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위에 언급한 여학생의 이야기.. "거 그냥 얘기 좀 들어주지.." 생각하는 분들도 계실 수 있습니다. 물론 저와 오랫동안 연대를 가진 가까운 지인이라면 기꺼이 어느 정도 시간을 내주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제 지인들은 보통 저렇게 심야에 남에게 함부로 전화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모임에서 한 번 본 사람.. 그 사람이 제게 일방적으로 자신의 아프고 무거운 인생의 짐을 공유하자고 2년을 매달렸습니다. 그건.. 나를 신뢰한다는 고마움보다 엄청난 부담을 안겨주는 영문 모를 행위거든요. 그녀는 왜 덜컥 이런 행동을 하게 된 걸까요?
조심스러운 이야기지만.. 그냥 하겠습니다.
아픈 이야기를 털어놓을 때 받는 공감과 배려가 처음엔 눈물나도록 고맙게 느껴집니다. 그러다 점점 그것이 익숙해지면 '나는 아프니까 사람들이 나를 이해해 줘야 돼'로 생각이 바뀌어가죠. 그 친구의 생각도 아마 이러했을 것 같아요. 당신, 모임에서 내 아픈 얘기 들었잖아.. 나보다 나이도 훨씬 많잖아.. 그러니까 나를 이해해줘.. 늘 다른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러나 이런 식으로 인간관계를 하면.. 곁에 남을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전편에 이야기했지만 심지어 가족과 연인도 견디지 못하고 떠날 수 있습니다. 인간관계에서 오는 위로에 연연하지 않는 분이라면 상관없지만 우울감과 외로움을 인간관계를 통해 도움을 받고자 하는 분들이라면 자신이 혹시 이런 사람은 아닌지 생각해 볼 문제인 것 같아요.
타인의 위로와 배려가 당연하다 느끼는 사람이 되었을 때 가장 큰 문제는.. 자신이 더 이상 발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울증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서 비교적 많은 우울한 사람들,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을 만났는데요, 이들 중 대부분은 늘 변화 없이 과거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을 일으켜 조금이라도 걷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과했죠. 정도가 모두 같을 수는 없지만 저도 경험해봤습니다. 극도의 우울함이 삶을 지배하면 그 무력함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을요.. 그것이 사람의 의지로 잘 되지 않는다는 것을요..
"걷는 노력 따위 필요 없어, 그냥 이렇게 살 거야"한다면 상관없습니다. 인생은 완벽히 본인이 주체가 되어 사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우울한 매일 밤 유명한 강사의 강연을 찾아보고 함께 울고 웃고 지독한 우울증을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몸을 일으켜 세워 조금이라도 걸으려 하는 '최소한의 의지'가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거센 무언가에 억지로 저항하면 오히려 다칠 수 있습니다. 그럴 땐 그냥 파도가 잠잠해질 때까지 나를 방치하세요. 누워있든, 술을 먹든..
그러나 최고 정점의 우울감이 똑같은 상태로 오래도록 지속되진 않을 겁니다.
여름이라면 청량한 밤공기를 쐬는 것도 좋고, 겨울이라면 한낮의 따스한 햇살 속을 거닐어도 좋습니다. 방 안에서 혼자 계속 웅크리고 계시지 마세요. 자신의 리즈시절 한창 유행했던 노래들을 들으며 길을 걸어보세요. 처음엔 주저하며 나오지만 걷다 보면 나오길 참 잘했단 생각이 들 겁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많은 생각들 속에 살아갈 작은 희망들을 발견하게 되기도 합니다.
밖으로 나오라는 말이 타인과 억지로 인간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마음이 아플수록 그 마음이 충분히 아물 때까지 오히려 인간관계는 조심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좋은 사람들도 많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너무 많거든요.
바람이 내 이마를 얼마나 부드럽게 쓸고 지나가는지.. 귓가에 맴도는 새소리는 어느 새의 소리일까.. 노을이 얼마나 황홀한지.. 어둠에 잠겨가는 산의 모양은 어떻게 변하는지.. 자연 안에 있다 보면 어느새 '나'라는 존재는 그저 이 거대한 자연의 일부라는 생각이 드실 겁니다. 길가에 핀 이름 모를 작은 꽃 한 송이.. 그것과 내가 일치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 나를 지배하던 우울감이 조금은 잦아드는 경험을 하시게 될 것도 같아요.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 "나는 병신이야, 한낱 부족한 인간이야"가 아니라 그저 평범한 사람이야.. 이 거대한 자연의 일부야..라고 나를 조금은 객관적인 시선으로 멀리 바라보는 것..
혹시 그런 노력을 기울여 보셨나요?
그렇지 않았다면.. 진심을 다해 한 번 해보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