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과 제법 오래 살아온 철없는 영이의 체험기
이제 그만 살아도 되지 않을까.. 떠나려면 난 무엇을 정리해야 할까..
눈물도 말라 이제 제법 덤덤해진 건조한 마음 안에서 이따금씩 이런 생각들이 불쑥 고개를 내밀 때가 있어요. 우울증이 만성이 되면 점점 이렇게 변해가는 것 같아요. 아주 격정적으로 슬픈 감정이 몰아치기보다 무언가 힘이 쭉 빠진 채 흐늘흐늘 멀건 시선으로 상황들을 가만히 지켜보는.. 영혼이 아직 내 육신을 이탈하지 않았는데 가끔씩 나의 존재를 먼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는 때가 있어요. 그러고는 조금 떨어진 나에게 내가 말하죠.
사실 그래서 이번 주엔 급하게 약봉지를 두 개 뜯었습니다.
제겐 몇 달 전 마지막으로 정신과에서 처방받은 2주 분량의 항우울제가 있었어요. 의지와 노력으로 우울증을 다스리다 이렇게 자력으로 어떻게 안 되겠는 상황이 찾아오면 어쩔 수 없이 약의 도움을 받습니다. 약을 먹으면 거짓말처럼 30분 후쯤에는 이성적인 판단이 돌아오는 느낌이 들어요. 우울할 때 축 처진 차분함과 다른.. 이성이 조금은 차가워진 위험하지 않은 차분함.. 그것이 느껴지면 안도감이 찾아옵니다. 잘했다.. 잘 버텨냈다.
약을 저처럼 복용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약을 복용하고 중단하고 하는 것은 전적으로 전문의와 상의해서 이뤄져야 하는 영역입니다. 이제 막 우울증이 시작된 분들이라면 더욱 체계적인 관리가 필요할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하지만 신경정신과를 방문하기 전 병원을 잘 알아보고 결정하시길 권해드립니다.
처음 '정신과'라는 타이틀을 단 병원을 찾은 것은 10여 년 전쯤인 것 같아요. 우울감은 훨씬 그 이전부터 시작됐지만 그 감정이 내 생활을 방해한다고 인지하며 병원을 찾게 된 것이죠. 당시만 해도 요즘처럼 정신과에 대한 편견이 비교적 완화된 시기가 아니었어요. 이제 막 30대가 된 저는 당시 직장도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행여 내원 기록이 알려져 불이익을 받지 않을까 비급여 처리로 병원을 방문하게 됩니다. 그런데 걱정하시는 것처럼 취업이나 어떤 중요한 일에 본인의 동의 없이 진료기록이 열람되지 않습니다. 그건 엄연한 불법이고 혹시 재판에 서게 되더라도 판사의 정식 서면요청이 있을 때 병원의 동의 하에 정보가 공개됩니다.
몰래 병원을 방문하려던 저는 인터넷으로 오랫동안 여기저기 정보를 검색했죠. 지인에게 "어느 병원이 좋아?" 질문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까요. 그렇게 검색 끝에 강남권에 한 병원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법 많은 연예인들이 찾았고 주부들이 자주 보는 아침 방송에도 몇 번 소개가 되었다는 걸 알고 나니 조금 믿음이 가기도 했죠.
전화로 사전예약을 하고 병원을 찾아갔습니다. 의사를 만나기 전, 제법 긴 문진검사와 뇌파검사(뭔가를 손가락에 붙였는지 머리에 붙였는지는 기억이 잘..) 후 드디어 의사를 만났죠. 하도 오래된 옛이야기라 무슨 이야기들을 나눴는지 기억이 잘 나진 않지만 그리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누진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의사의 질문에 대답을 하는 동안 의사는 고개 한번 들지 않고 책상 위에 놓인 노트북 자판을 계속해서 두드렸습니다.
그리고는 침을 맞았던 것으로 기억해요. 그곳은 한방과 양방치료가 같이 이루어지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침을 꽂고 누워있는 제게 의사가 말했죠. 약 처방을 해야 하는데 한방은 얼마, 그게 부담스러우면 양방은 얼마.. 가급적이면 부작용이 적은 한방약을 권했으나 너무도 부담스러운 가격에 선뜻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그보다 솔직히 상담을 받으면서부터 의사에 대한 신뢰가 무너져 '다신 오지 말아야겠다' 생각을 하고 있었죠. 그렇게 진료를 끝내고 치료비를 지불하는데 작은 아로마 오일 한 병을 건넵니다. 저의 첫 정신과 방문은 그렇게 끝이 났고 그날의 안 좋은 기억 때문에 이후론 정신과를 찾지 않았죠.
정신과 방문을 놓고 고민하면서 무엇이 나를 그곳으로 가게 만들었나.. 한참을 생각했습니다. 여러 가지 복합적 원인이 있겠지만 결론적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 크다고 생각하는 간극이, 물론 사회적 성과에 기준을 둔 그 격차가 저로 하여금 무력감과 우울감을 느끼게 한 것 같아요.
내가 이렇게 부족했나? 난 제법 괜찮다고 생각하는데.. 왜 난 매번 이렇게 살고 있을까? 난 왜 이렇게 운이 없을까.. 등등
최근엔 잠이 오지 않는 밤마다 유튜브로 다양한 강연들을 보고 있어요. 김미경, 김창옥 강사, 법륜스님까지.. 갑자기 법륜스님의 이 말이 떠오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너무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어. 그냥 내가 길가에 풀 한 포기 같다.. 이래 생각해야지 내가 너무 잘났다고 생각하면 안 돼요."
물론 이 또한 정말 필요한 삶의 자세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스님의 이야기에 감히 반기를 들어봅니다. 아주 허황된 꿈을 꾸는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나 현실의 나보다 조금 더 나은, 그것이 사회적 성과든 개인적 양심이든 이상향을 그리며 살아갑니다. 그 간극이 노력으로 채워질 때 성취감이란 걸 느끼기도 하고 발전이라는 걸 하게 되기도 하죠. 좀처럼 좁힐 수 없는 차이는 마음의 병으로 연결되니 그 간격에 세밀한 계단을 놓아 단계적 성공을 맛보며 살아가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저 역시 그렇게 살려고 노력 중입니다. 습관이 될 만큼 무한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원하는 모습이 내 안에 슬며시 스며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 같습니다.
유사한 원인으로 아파하고 있는 분들이 있다면.. 기억하세요.
그 깊은 우물에서 탈출하고자 한다면 내가 있는 현재의 위치를 정확히 알고 우물의 깊이를 가늠해야 한다는 것.. 아프지만 자신을 직면하는 일이 그 시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