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사는 끝났다. 사실관계도 정리됐다. 관련 규정도 다 확인했다. 징계위원회에 올릴 준비도 되어 있다. 보통 이쯤 되면 HR은 한숨을 돌려야 한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이 시점이 진짜 시작이다. 징계의 핵심은 사실이 아니라 수위, 즉 징계 양정이기 때문이다.
징계 양정을 논의하는 회의가 열리면 공기는 늘 비슷하다.
누군가는 "규정상 가능하긴 한데 너무 세지 않나"라고 말하고,
다른 누군가는 "이 정도면 경고로 끝내도 되지 않나"라고 말한다.
또 다른 쪽에서는 "이번에 확실히 정리하지 않으면 앞으로 기준이 무너진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회의는 길어지지만 결론은 잘 나지 않는다. 의견은 많은데 결정은 없다.
여기서부터 HR은 안다.
아, 오늘도 결론은 안 나겠구나.
원래 징계 양정은 이래야 한다.
위반 행위의 중대성
고의성 여부
반복 여부
유사 사례와의 형평성
그런데 실제 회의에서는 이 기준보다 다음 요소들이 더 큰 영향을 미친다.
그 사람이 얼마나 많은 영향력이 있는지
팀장이 얼마나 강하게 말하는지
노조 반응이 예상되는지
"이번 건은 좀 불쌍하지 않냐"는 누군가의 한마디
그 순간 징계 양정은 법과 규정의 문제가 아니라 조직 감정의 평균값이 된다.
게다가 회의가 길어질수록 논의는 점점 징계에서 멀어진다.
"이 사람 퇴사하면 인력 공백이 너무 크지 않나요?"
"요즘 분위기에 이 정도 징계는 리스크 아닐까요?"
"다음 분기 조직 개편도 있는데 지금 건드릴 타이밍은 아닌 것 같아요."
이건 더 이상 징계 양정 논의가 아니라 조직의 불편함을 누가 감당할 것인가에 대한 회의라는 걸.
HR이 가장 많이 하는 말
이 회의에서 HR은 이런 말을 반복한다.
"그럼 이전 사례랑 형평성이 안 맞습니다."
"기록으로 남았을 때 설명 가능해야 합니다."
"노동위원회 가면 이 수위는 방어가 어렵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징계 수위를 고민하느라 시간을 끌수록 상황은 더 복잡해진다.
대상자는 이미 주변에 이야기를 하고, 소문은 퍼지고, 감정은 쌓인다. 조율하려고 시작한 시간이 오히려 분쟁 가능성을 키운다.
그럼에도 조직은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잘못을 판단하는 데에는 모두가 동의하지만, 그 결과를 책임지려는 순간에는 한 발씩 물러선다.
결론이 나지 않으면 HR이 할 수 있는 일은 정해져 있다. 회의록을 더 남기고, 비교 자료를 더 만들고, 예상 시나리오를 더 정리한다.
"이 경우 리스크는 이렇습니다"라는 문장을 징계 양정의 버전대로 반복한다. 그렇게 징계 양정 회의는 결정을 위한 자리가 아니라, 결정을 미루기 위한 회의가 된다.
그리고 결국, 징계 수위를 두고 내부에서 합의하지 못한 그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어느 날 노동위원회에서 다시 펼쳐진다.
그때 HR은 깨닫는다.
징계 양정을 정하지 못한 대가는, 언젠가 노동위에서 대신 치르게 된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