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이 없는 성

프롤로그: 설계된 침묵

by 샤프

1796년 10월 16일, 밤 11시. 수원 화성 동북공심돈.


하늘이 찢어질 듯한 천둥소리와 함께 폭우가 쏟아진다. 어마어마한 양의 폭우가 쏟아지면서 번쩍이는 번개에 눈이 멀 정도였다. 번개가 칠 때마다 화성의 굽이치는 성벽이 거대한 용의 비늘처럼 번득였다.


나선형 벽돌 통로를 따라 공심돈(망루) 최상층에 오른 정조는 가쁜 숨을 몰아쉰다.

날씨 탓일까, 그의 발작적인 기침이 이어졌다. 폐가 굳어가는 병마로 인해, 기침할 때마다 손수건이 검붉은 피로 물들어버렸다. 하지만, 그의 병세는 그의 올곧음과 카리스마를 숨길 수 없다.


곁에 선 사내가 떨리는 손으로 등불을 들어 주군을 비춘다. 걱정스러워보이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그는 굳은 표정으로 자신의 주군의 옆을 지키고 서있었다.


정조는 품 안에서 비단으로 겹겹이 감싼, 한 검은 상자를 꺼냈다. 정성스럽고 고급스럽게 옻칠을 한 검은 상자였다. 그리고 기름 먹인 가죽으로 수십 겹 밀봉되어 있었다. 빗물에 젖은 상자 표면에는 금박으로 두 글자가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민국(民國)'


"다산. 저들이 나를 독살하려 든다면, 그것은 내가 왕이라서가 아니다. 내가 왕이기를 포기하려 했기 때문이다."

정조가 상자를 '다산'이라고 불린 그 사내의 손에 쥐여주었다.

정약용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정조는 젖은 갓끈을 고쳐 매며 방화수류정 아래 검게 입을 벌린 용연(龍淵)을 내려다보았다.


정약용은 재고를 간청하는 듯한 표정으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전하..."

"지금은 아니다, 다산."

정조의 목소리는 낮지만 단호했다.


"허나, 전하.. 이것이 세상에 나온다면......"


"지금 이것이 세상에 나오면, 노론 벽파는 나를 미치광이로 몰아세우고 이 나라를 도륙내겠지."

정조는 쓸쓸하게 빗방울이 쏟아지는 하늘을 응시했다.

여전히 비는 무엇이든 파괴할 기세로 거칠게 쏟아지고 있었다.


"나의 꿈은 너무 일찍 도착했다. 벽파 놈들은 내 목숨을 노리고, 백성들은 아직 왕 없는 세상을 상상하지 못해. 이것이 지금 공개되면, 피바람만 불 뿐이다."

그 둘은 조용히 한참을 서 있었다.


"언제 다시 꺼내게 되겠사옵니까?"

"조선의 벽돌이 아니라, 사람의 생각이 단단해지는 날."


정조는 품에서 청나라 상인에게 구한 코발트 안료가 든 병을 꺼냈다. 그리고 방화수류정의 특정 벽돌 위에 눈에 보이지 않는 점을 찍었다.

"기록하라. 달빛이 물을 거울삼아 뒤집히는 날(칠실파려안), 비로소 문이 열릴 것이라고."


정약용은 조심스럽게 보물처럼 소중하게 양 상자를 안고 물러갔다.


그의 발길이 닿은 곳은 공심돈의 지하, 설계도에 없는 비밀 공간.

그는 단순히 입구를 벽돌로 막지 않았다. 그는 당시 조선 최고의 공학자였다. 자신이 가진 모든 공학적 지식과 한 평생의 연구를 자신의 주군을 위해 바쳤다.


"그 누구도 발견할 수 없는 곳에 내 뜻을 담아주게"

"때가 되면 온 세상이 내 뜻을 알게 되는 날이 올 수 있도록."

자신의 주군이 한 부탁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청을 실현시키기로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다짐했었다.


공심돈의 지하에 다다른 정약용은 주저앉아 바닥을 살폈다. 그의 손이 바닥을 더듬었다.

바닥 벽돌 틈새에는 그가 청동으로 만든 미세한 진동판이 있었다. 그가 정교하게 끼워 넣은 진동판이었다.

그가 나선형 통로의 곡률과 내부 용적을 계산해 설계한 것이었다. 정약용은 상자를 구덩이 깊숙이 밀어 넣었다. 바닥에 있던 벽돌을 주워들고 그것이 마치 신기한 물건인 양 바라보았다.


쿵. 마지막 돌이 덮였다. 역사는 그날 밤, 지하 3미터 아래에서 숨을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