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빗속의 사냥

by 샤프

1975년 8월, 수원 화성 복원 현장 / 비 내리는 밤

"만석아, 이번 공사만 끝나면 뭐 할 거냐?"

작업용 천막 아래, 빗소리가 양철 지붕을 요란하게 때리고 있었다.

작업 반장이 흙 묻은 작업복을 털며 물었다. 그 옆에서 서만석은 품 안에서 소중하게 비닐로 감싼 흑백 사진 한 장을 꺼내 닦고 있었다. 갓 돌 지난 아들을 안고 환하게 웃고 있는 자신의 사진이었다.

"우리 동철이, 자전거 하나 사주려고. 세발자전거 노래를 부르는데 돈이 있어야지."

만석의 눈가는 빗물인지 땀인지 모를 것으로 젖어 있었지만, 입가엔 미소가 번졌다.


사진에서 눈을 뗀 서만석이 작업 반장을 향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리고... 이상해. 이 현장 말이야."

"뭐가?"

"반장님도 느꼈지? 바닥 밑에서 자꾸 웅웅거리는 소리 나는 거. 그리고 박 국장 그 양반, 문화재 복원이 아니라 무슨 보물찾기하는 눈빛이잖아. 뭔가 있어."

만석은 담배를 비벼 끄며 안전모를 고쳐 썼다.

"아무튼 오늘 밤 작업만 끝나면 집에 갈 거야. 마누라랑 동철이가 기다려."


그것이 작업 반장이 본 친구의 마지막 웃음이었다.

그날 밤, 만석은 아들에게 줄 자전거 대신 차가운 콘크리트 덩어리를 덮어써야 했다.


2002년 5월, 수원 외곽의 작은 단칸방

제사상 위에는 향이 타들어가고 있었지만, 영정 사진은 없었다.

대신 1975년에 찍은, 만석이 작업모를 쓰고 웃고 있는 빛바랜 사진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도망간 사람 제사는 무슨 제사야! 빚쟁이들 피해 야반도주한 양반을!"

친척들의 고성이 좁은 방을 울렸다.

"아니야! 우리 아버지 도망간 거 아니라고!"

이준의 아버지, 서동철이 피 맺힌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는 매일 술에 절어 살았지만, 오늘만은 맨정신이었다.

하지만 친척들은 혀를 차며 하나둘 자리를 떴다.

방 안에는 어린 이준과 아버지만 남았다. 아버지는 떨리는 손으로 영정 대신 놓인 사진을 어루만졌다.

"이준아."

"......"

어린 이준은 일부러 대답을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네 할아버지가 노름 빚 때문에 도망갔다고 해. 공사판 돈 들고 날랐다고 욕해. 넌... 그 말 믿냐?"

이준은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가 울고 있었기 때문이다.

"네 할아버지는... 절대 가족 버릴 사람이 아니야. 그날 밤, 비가 억수같이 오던 날... 분명 무슨 일이 있었어."

아버지는 이준의 작은 손을 잡고 사진 위에 포개었다.

거칠고 투박한 아버지의 손이 따뜻하면서도 슬펐다.

"아빠는 배운 게 없어서 힘이 없다. 경찰서에 가도, 시청에 가도 미친놈 취급만 하더라. 하지만 이준이 너는... 너는 공부해야 해."

"공부?"

"그래. 똑똑해져서... 역사를 배우고 힘을 길러서... 이 땅 어딘가에 묻혀있을 네 할아버지, 네가 꼭 찾아드려야 한다. 그게 네 숙제야."


어린 이준의 눈동자에 사진 속 할아버지의 웃는 얼굴이 깊이 박혔다.

그날 밤, 이준은 일기장에 삐뚤빼뚤한 글씨로 적었다.


'나는 커서 역사 박사가 될 거다. 그래서 할아버지를 집에 데려올 거다. 꼭.'



"후우..."

이준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화성 성곽에 기대섰다. 밤바람이 찼다. 지갑을 열자, 투명한 비닐 창 너머로 50년 전의 그 사진이 보였다. 할아버지와 최달수가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사진. 아버지가 유품으로 남긴 유일한 단서였다.

"아버지, 숙제 검사받을 날이 멀지 않았어요."

이준은 사진 속 할아버지의 눈을 응시했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50년 동안 덮여있던 돌덩이, 제가 다 부숴버릴 테니까."

이준의 눈빛이 매섭게 빛났다. 그는 폰을 꺼내 문화재청의 위치를 검색했다.

이제 사냥을 시작할 시간이었다.



문화재청 수원 사무소 뒷골목 / 밤 10시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하수구 역류하는 냄새와 빗물 비린내가 뒤섞인 어두운 골목.

김 국장은 이미 인사불성이었다.

값싼 소주 냄새를 풍기며 비틀거리던 그는 빗물 웅덩이를 밟을 때마다 신경질적으로 뒤를 힐끔거렸다.

그의 눈에 가로등이 들어왔다. 가로등이 여러 개로 겹쳐 보였다.

술에 잔뜩 취해 한 걸음, 한걸음 걷는 것이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늘 적당히 마시자던 그의 각오는 흔들린다. 항상 그렇듯이.

가로등이 치지직거리며 점멸하던 찰나였다.


어둠 속에서 불쑥 튀어나온 악력이 김 국장의 멱살을 낚아챘다.

거세고 분노가 느껴질 만큼 억센 힘이었다.

김국장은 휘청거렸다.

"윽!"

쾅-!

등짝이 거친 벽돌담에 처박혔다.

아찔했다..

폐부의 공기가 턱 막히며 김 국장의 눈이 뒤집혔다.

숨이 막혔다.

숨을 쉴 수 없었다.

정신을 못 차리며 버둥거리던 그는 최선을 다해 소리질렀다.

"누, 누구... 컥!"

"나야. 서이준."

서이준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김 국장을 내려다보았다.

분노에 찬 차가운 표정이었다.


이준은 빗물에 젖어 미끈거리는 김 국장의 얼굴을 벽에 짓이겨버릴 듯 눌렀다.

김 국장이 고통에 몸부림쳤다.

그의 비명이 골목을 가득 채웠다.


번개가 번쩍이며 이준의 얼굴을 비췄다.

핏발 선 눈은 이미 이성이 끊겨 있었다.

"당신이지!"

이준이 소리쳤다.

"연구실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협박 편지 쑤셔 넣은 새끼가!"


김 국장이 말할 틈도 없이 이준이 쏟아내듯 고함을 질렀다.


"75년의 진실이 그렇게 무서워? 수영이 털끝이라도 건드리면 네 놈 목구멍을 씹어서라도 죽여버리겠어!"

이준은 당연히 그가 뻔뻔하게 발뺌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손에 전해지는 김 국장의 떨림은 예사롭지 않았다.

그는 도살장에 끌려온 짐승처럼 덜덜 떨며, 오줌이라도 지릴 듯한 표정으로 이준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사, 살려줘... 나, 나는...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야!"

김 국장이 쥐어짜듯 비명을 토해냈다.

빗물과 침이 뒤섞여 그의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정말 볼품 없는 모습이었다.

안쓰러울 만큼..


"네가 자료를 훔치라고 지시한 걸 다 알아"

이준이 김 국장의 목덜미를 짓누르며 험악한 말투로 말했다.

"자료를 훔치라고 한 건 내가 아니야! 난 그냥... 자네가 포기하게 겁만 주라고 해서... 안 그러면 내 처자식까지 토막 내겠다고 했단 말일세..."

김 국장이 떨리는 목소리로 변명을 늘어놓았다.


이준의 미간이 구겨졌다.

겁만 주라고?

그럼 연구실을 박살 낸 놈들은 김 국장의패거리가 아니란 말인가?


"누가 시켰는데! 똑바로 말해!"

오만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김 국장은 공포에 질려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다.

"그 사람 이름을 어떻게 말해... 말하면 난 쥐도 새도 모르게..."

이준이 멱살을 잡은 손을 비틀어 기도를 강하게 압박했다.

컥, 컥. 김 국장의 얼굴이 보랏빛으로 질려갔다.

이준의 눈이 살기로 가득했다.

그는 더 이상 잃을 게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김 국장은 눈 앞이 아득해졌다...


죽음의 공포 앞에서, 그는 결국 금기를 토해냈다.

"바... 박진철... 이사장님..."

쿠르릉-!

천둥소리가 고막을 때렸지만, 이준에게는 세상의 소리가 소거된 듯했다.

빗줄기가 뺨을 때리는 감각조차 사라졌다.


"누구?"

"박 이사장님이... 자네가 너무 깊이 파고들면 적당히 밟으라고... 안 그러면 내 횡령 장부를 검찰에 넘기겠다고..."

이준의 손에서 힘이 스르르 빠져나갔다.

지지대가 사라진 김 국장은 빗물 고인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헐떡였다.


‘박진철.’

이준은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 멍해진다.

자신이 적으로 여겼던 관료는 그저 약점이 잡힌 꼭두각시였고, 자신을 물심양면 도와주던 '구원자' 박진철이 모든 것을 조종하는 진짜 흑막이었던 것이다.

김 국장은 그저 쓰고 버릴 장기말이었고, 이준이 믿었던 구원자는 이 모든 비극을 설계하고 조종해온 진짜 괴물이었다.




며칠 전 이사장실.

이준이 감격에 겨워 허리를 90도로 숙이고 나갔다.

문이 닫히자마자, 박진철의 온화했던 미소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조명이 어두워진 집무실, 박진철은 어둠 속에서 어딘가로 전화를 건다.

수화기 너머 상대는 조금 전까지 이준이 그토록 증오했던 김성훈 국장이다.

"네, 이사장님. 보냈습니다."

김 국장의 비굴한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다.


박진철은 창밖의 서울 야경을 내려다보며, 유리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고 비릿하게 웃는다.

"김 국장, 수고했어. 자네가 학회에 압력 넣고 악역을 아주 실감 나게 해 준 덕분에, 쥐새끼가 나를 구세주처럼 믿더군."

"데이터는 확보하셨습니까?"

"계약서에 도장 찍었으니 놈의 모든 연구 결과는 이제 재단 소유야. 놈은 신나서 땅을 파겠지. 우리는 뒤에서 지켜보다가, 놈이 '진짜'를 찾는 순간..."

박진철이 손가락으로 유리창을 톡, 친다.

"뺏으면 돼. 계속 그렇게 멍청하고 나쁜 관료 연기 좀 더 해줘. 그래야 놈이 무서워서 나한테만 보고할 테니까."

전화를 끊은 박진철이 이준이 마셨던 위스키 잔을 바라본다.


"역사는 팩트가 아니야, 서 선생. 시나리오 작가가 쓰는 거지. 나처럼."





"박진철..."


이준은 충격에 휩싸인 채로 빗물에 젖은 김 국장의 멱살을 놓아주었다.


김 국장은 바닥에 쓰러져 콜록거렸다.

"거짓말 마. 이사장님이 그럴 리가..."

"그 양반은 75년 현장 소장이었던 자기 아버지를 우상화하는 인간이야! 아버지의 과오를 덮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사람이라고! "


분노가 머리끝까지 차올랐지만, 이준의 이성은 차갑게 작동하기 시작했다.

그의 말이 맞다면...?

일단 확인이 필요했다.

지금 당장 이사장실로 쳐들어가 봤자 계란으로 바위 치기였다.


박진철은 정재계를 주무르는 거물이다.

'심증'만으로는 놈의 털끝 하나 건드릴 수 없다.


놈을 무너뜨리려면 놈의 가면을 벗길 확실한 '증인'이 필요했다.


이준은 바닥을 기는 김 국장의 머리채를 다시 거칠게 움켜쥐었다.


"놈이 주범이라는 증거가 필요해."

이준이 망설인 끝에 덧붙였다.

"어, 없어... 다 죽었어..."

김 국장이 이준의 망설임을 눈채 채고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거짓말 마! 네 놈이 비리 장부로 약점 잡혔다며. 그럼 너도 놈의 목숨줄 하나쯤은 쥐고 있을 거 아냐! 살고 싶으면 불어!"

이준의 서슬 퍼런 호통에 김 국장이 덜덜 떨며 품 안에서 젖은 수첩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뒷장을 넘겨 볼펜으로 흘려 쓴 주소 하나를 가리켰다.


"최... 최달수 반장. 그 양반이 유일하게 살아있어."

"최달수?"

"당시 작업반장이야. 내가 입막음조로 관리하고 있어. 이 주소... 재개발 지구 판잣집에 숨겨뒀네."

김 국장은 기어가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 사람이 그날 밤의 진짜 지시자를 봤어."

이준은 수첩을 낚아채 주소를 확인했다.


수원 외곽, 화서동 재개발 지구 33번지.


"최달수라는 사람, 사진이 필요해."

이준이 차갑게 김 국장을 노려보았다.

김 국장은 휴대폰 사진첩을 뒤져 당시 작업 반장 최달수의 사진을 이준에게 주었다.

익숙한 인물이었다.

이 사람, 누군지 아는 사람이다.

혹시...

그럴 리가 없다...

믿을 수 없는 사실에 이준이 휘청거렸다.

지독한 운명이었다.

어쩌면 사명일지도 모른다.

그의 모든 선택이 그를 이 길로 이끌었다.

때로는 틀린 선택일지라도 필연이었던 것이다.


'그래, 어쩌면 운명일 지도 몰라.'

운명의 장난을 그는 받아들이기로 했다.


박진철이 유일한 목격자를 살려둔 건 자비가 아니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감시 아래 두고, 서서히 말라 죽게 만들기 위함이었다.

"거기가 마지막 퍼즐이야."

이준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빗속으로 뛰어들었다.



수원 외곽, 화서동 재개발 지구 33번지.


이준은 김 국장이 뱉어낸 주소를 네비게이션에 찍고 빗길을 달렸다.

와이퍼가 미친 듯이 춤을 췄지만 쏟아지는 폭우를 감당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이준은 빗길을 뚫고 엑셀을 짓이겨 밟았다.

핸들을 잡은 손마디가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의 젖은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도착한 곳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판잣집이었다.


이준은 썩어가는 나무 문을 거칠게 열어젖혔다. 방 안은 지옥이었다. 쓰레기 더미와 소주병 냄새. 그 구석에 뼈만 앙상하게 남은 노인, 최달수가 이불을 뒤집어쓴 채 떨고 있었다.

"누, 누구냐...!"

노인은 이준의 그림자가 드리우자마자 비명을 지르며 벽으로 기어 물러났다.

"돈은... 돈은 다 썼습니다... 제발, 때리지 마십쇼...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이준의 가슴이 턱 막혔다. 그것은 치매 노인의 헛소리가 아니었다. 김 국장, 혹은 박진철의 하수인이 찾아올 때마다 겪었을 폭력과 공포가 만들어낸 조건반사였다.


이준은 가슴이 미어지는 것을 느꼈다.

눈 앞에 있는 노인은 사진 속의 젊고 탄탄한 청년이 더 이상 아니었다.

마치 공포에 먹혀버린 짐승 같은 모습이었다.

이준은 천천히 무릎을 굽혀 노인과 눈을 맞췄다.


"영감님. 저 돈 받으러 온 깡패 아닙니다."


이준이 품 안에서 낡고 빛바랜 흑백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작업모를 쓴 젊은 인부 두 명이 어깨동무를 하고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이었다.

한 명은 젊은 시절의 당시 작업반장 최달수, 다른 한 명은 이준의 할아버지였다.

"이 사진... 기억나십니까?"

최 영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흐릿한 시야로 사진 속 얼굴을 확인한 순간, 그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이건... 만석이...?"

"네. 50년 전 그날 밤, 영감님이 지켜주지 못했던 친구... 서만석 씨가 제 할아버지입니다."

이준의 고백에 최 영감의 숨이 턱 멈췄다.

50년 동안 매일 밤 꿈속에서 피를 토하며 원망하던 친구의 얼굴이, 눈앞의 청년에게서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만석이... 손주라고...?"

"할아버지는 사고로 돌아가신 게 아니잖아요. 평생을 의문 속에 살았습니다. 시신도 못 찾고, 위령비 하나 없이... 도대체 그날 밤 땅속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최 영감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것은 공포가 아니라 참회였다. 친구의 핏줄이 자신을 찾아왔다는 사실이, 굳게 닫혀있던 그의 입을 열게 했다.

"내가... 내가 죄인이야... 만석이는 살 수 있었어..."


최 영감은 오열하며 이준의 바짓가랑이를 잡았다.

"우리가 밀실 입구를 찾았는데... 갑자기 천장이 무너졌어. 만석이가 다리에 돌이 깔려 못 나오고 있었지. 내가 끌어내려고 했는데..."

"그런데 왜 두고 나오신 겁니까!"

"그 놈이... 그 악마가...!"

최 영감은 허공을 가리키며 발작하듯 소리쳤다.

"그 놈이... 흙 한 방울 안 묻은 구두를 신고 내려와서는 총을 겨눴어! '구조할 시간 없어. 비밀이 새 나가면 다 죽어. 그냥 묻어버려!' ...그 놈이 산 채로 묻으라고 시켰어!"

이준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 놈이 누구죠?"

"박진철....!"

영감이 비명처럼 지른 소리에 소름이 돋았다.

막연했던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할아버지는 사고사가 아니었다.


박진철이라는 괴물에 의해 삭제된 것이었다.

"그때 내가 만석이 손을 놓지 말았어야 했는데... 총이 무서워서... 내가 도망쳤어... 으흐흑..."


이준은 흐느끼는 노인의 어깨를 감싸 쥐었다.


"자책하지 마세요. 죄는 도망친 사람이 아니라, 방아쇠를 당긴 놈이 져야 합니다."

이준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놈은 단순한 문화재 도둑이 아니었다. 할아버지를 죽인 원수였다. 이제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개자식..."



최 영감을 진정시킨 이준은 차분하게 대화를 나눴다.

백내장이 낀 흐릿한 눈으로 화면을 훑던 최 영감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호흡이 거칠어지더니,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뇌리에 50년 전 그날 밤의 지옥도가 생생하게 떠올랐다.

"이... 이 놈이야...!"

최 영감의 앙상한 손가락이 액정을 뚫어버릴 기세로 박진철의 얼굴을 찍어 눌렀다.

"뱀 눈깔... 그래, 사람을 벌레 보듯 하던 저 차가운 뱀 눈깔!"

최 영감이 발작하듯 소리를 질렀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밤이었어. 인부들한테 총을 겨누던 게 박진철이었어... 아비인 박정훈 국장 옆에서... 흙 한 방울 안 묻은 구두를 신고 서 있었지. 우리 만석이가, 자네 할아버지가... 제발 살려달라고, 집에 갓난아기가 있다고 비는데..."

최 영감은 머리를 감싸 쥐며 오열했다. 자신이 침묵했기에 친구가 묻혔다는 죄책감이 50년 동안 그를 갉아먹고 있었다.

"...저 악마 새끼가 산 사람을 구덩이로 밀어 넣으라고 지시했어! 내가 봤어! 내가 다 봤다고!"

이준의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뻔했다. 모든 퍼즐이 끔찍한 형상으로 맞춰졌다. 박진철은 50년 전 자기와 아버지가 저지른 학살을 덮기 위해, 피해자의 손자인 이준=에게 연구비를 대주고, '역사를 바로 세우라'며 등을 떠밀었다. 이준이 실패하면 영원히 묻히는 것이고, 만약 성공해서 문을 연다면 그 안에 든 '증거'만 가로채 완벽하게 파기할 셈이었다.


"빌어먹을... 나는 놈이 던져준 뼈다귀를 물고 꼬리를 흔들던 사냥개였어."


이준은 치밀어 오르는 구역질을 참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입안에서 비릿한 피 맛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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