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의 무게는 납덩이처럼 무거웠다.
이제 증언은 확보했다. 남은 건 죗값을 치르게 하는 것뿐이었다.
이준이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판잣집을 나선 순간이었다.
현기증이 났다.
짧은 시간 동안 엄청난 양의 정보를 처리하는 이준의 머리가 지끈거렸다.
헛구역질이 나왔다.
이대로 있으면 안돼.
수영에게 가야 해.
그놈들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 상대를 알고 나자, 이준의 마음이 다급해졌다. 이준은 걸음을 재촉했다. 계속 비를 맞은 탓에 한기가 느껴졌다.
쏴아아아-
세찬 빗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던 골목.
칠흑 같은 어둠 속 양쪽 끝에서, 엔진 소리도 죽인 검은 승합차 두 대가 유령처럼 미끄러져 들어왔다. 전조등도 켜지 않은 차량들이 이준의 앞뒤를 완벽하게 틀어막았다.
끼이익-
타이어가 젖은 아스팔트를 긁는 소름 끼치는 마찰음과 함께 슬라이딩 도어가 열렸다. 검은 우비를 뒤집어쓴 건장한 사내 넷이 빗속으로 튀어 나왔다. 군더더기 없는 동작이었다. 그들의 손에 들린 쇠파이프가 가로등 불빛을 받아 섬뜩하게 번들거렸다.
"서이준 씨. 얌전히 타시죠."
선두에 선 사내가 빗소리를 뚫고 낮게 으르렁거렸다. 왼쪽 눈가를 가로지르는 흉터가 비에 젖어 붉게 도드라져 있었다. 이준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보내주신 좌표값은 잘 받았습니다. 그런데 사용법이 좀 까다롭더군요. 이사장님이 '직접' 설명을 듣고 싶어 하십니다."
이준이 주먹을 꽉 쥐며 뒷걸음질 쳤다. 도망칠 곳은 없었다. 사내는 이준의 저항 의지를 읽은 듯,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품에서 태블릿을 꺼내 들었다.
"거부하면... 저 예쁜 아가씨 폐에 가스를 좀 채워드릴까 하는데."
화면이 켜지자 이준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난장판이 된 연구실 구석, 한수영이 무릎을 끌어안고 공포에 질려 떨고 있었다. 굳게 닫힌 연구실 문틈 사이로, 회색 가스를 내뿜는 굵은 호스 하나가 뱀처럼 스멀스멀 기어 들어가고 있었다.
"수영아...!"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가스는 산소보다 무겁거든요."
이준의 눈에 핏발이 섰다. 놈들은 단순히 좌표만 훔친 게 아니었다. 자신의 목숨줄을 쥐고 흔들고 있었다.
"비겁한 개자식들..."
"타." "비켜!!"
타앗!
이준은 이성이 끊긴 짐승처럼 몸을 날렸다.
그대로 흉터 사내의 명치에 묵직한 발차기를 꽂아 넣었다.
"윽!"
사내가 비틀거리며 진흙탕에 처박혔다.
포위망의 한 귀퉁이가 뚫렸다.
성공인가?
이준은 그 틈을 타 빗속을 뚫고 달리려 했다. 하지만 놈들은 전문가였다.
퍼억-!
뒤에서 날아온 묵직한 둔기가 이준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뼈가 울리는 둔탁한 소리.
"크헉!"
숨이 턱 막히며 이준이 빗물 고인 바닥을 굴렀다. 내장이 뒤틀리는 고통에 몸을 웅크리기도 전, 젖은 머리채가 거칠게 잡혀 위로 솟구쳤다. 진흙이 입안으로 밀려들어 왔다.
쓰고 비릿했다..
피맛이었다.
"이사장님이 기다리신다고."
놈의 손에 들린 전기 충격기가 푸른빛을 튀기며 다가왔다. 망설임 없이이준의 뒷목에 충격기를 꽂아 넣었다.
지지직-!
"끄아아아악!"
근육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과 함께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지르며 수축했다.
시야가 하얗게 점멸했다.
뇌까지 타들어 가는 듯한 고통과 함께 빗소리가 아득하게 멀어졌다.
의식이 늪으로 빨려 들어갔다.
흐려지는 시야 속에서 마지막으로 떠오른 생각은 단 하나였다.
'수영이... 수영이한테... 도망치라고 해야 해...'
이준의 축 늘어진 몸이 짐짝처럼 승합차 트렁크 안으로 던져졌다.
이준의 시야가 암전 되었다.
쾅!
육중한 차문이 닫히고, 승합차는 빗속의 어둠 속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서울 외곽, 폐공장 지하 기계실 / 새벽 1시
좌아악-!
폐부 깊숙한 곳에서부터 짐승 같은 거친 숨소리가 터져 나왔다.
"커헉! 컥, 허억...!"
이준의 세상은 얼음장 같은 물 폭탄과 함께 강제로 열렸다.
마치 깊은 물 속에서 수면 위로 급격히 끌어올려진 사람처럼, 이준은 필사적으로 산소를 들이켰다. 콧속으로 밀려 들어온 물이 기도를 자극해 격렬한 기침이 터졌다. 젖은 머리카락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이 속눈썹을 찔렀다.
버둥거리던 이준이 가장 먼저 느껴진 것은 추위였다. 뼛속까지 시린 냉기가 젖은 옷을 타고 전신을 휘감았다. 턱이 제멋대로 덜덜 떨려 이가 딱딱 부딪쳤다.
그다음 찾아온 것은 고통이었다. 뒷목에서부터 시작된 끔찍한 두통이 뇌를 쪼아대는 것 같았다. 전기 충격기에 당했던 부위였다. 전신의 근육이 불에 덴 듯 욱신거렸고, 입안에서는 녹슨 동전 같은 비릿한 피 맛이 났다.
'여긴... 어디지?'
이준은 본능적으로 얼굴을 닦으려 팔을 들어 올렸다. 철그럭. 하지만 팔은 허공에서 멈췄다.
"으윽..."
손목이 무언가에 단단히 조여져 있었다. 이준은 흐릿한 눈을 가늘게 뜨고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칠 벗겨진 철제 의자에 앉아 있었다. 양 손목은 등받이 뒤로 꺾여 플라스틱 케이블 타이로 묶여 있었고, 발목 역시 의자 다리에 고정되어 꼼짝할 수 없었다. 손목을 비틀어보려 했지만, 타이가 살을 파고드는 날카로운 통증만 돌아왔다. 이미 피가 통하지 않아 손끝이 저려오고 있었다.
"정신이 좀 드나?"
어둠 속에서 나직하고 건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준은 고개를 들어 소리가 난 곳을 찾았다. 천장에 매달린 낡은 백열전구 하나가 위태롭게 흔들리며 지하실을 비췄다. 코를 찌르는 곰팡이 냄새, 바닥에 고인 썩은 물, 기름때 묻은 폐기계들. 그리고 그 불결한 풍경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반짝이는 최고급 구두 한 켤레가 보였다.
또각. 또각.
구두 굽이 시멘트 바닥을 울리는 소리가 심장 박동처럼 가까워졌다. 이준의 시선이 구두를 타고 올라가, 말끔하게 다림질된 정장 바지를 지나, 마침내 남자의 얼굴에 닿았다.
박진철이었다. 그는 이준이 뱉어낸 물과 토사물이 튀지 않는 안전거리에서, 하얀 손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이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서 선생. 잠꼬대가 심하더군. 수영인가 뭔가 하는 여자 이름을 계속 부르던데."
박진철이 손수건을 구겨 바닥에 툭 던졌다. 하얀 천이 더러운 진흙탕 물에 서서히 젖어 들어갔다. 그것은 이준과 한수영의 운명을 암시하는 것 같았다.
"여기가... 어디야..." 이준의 목소리는 갈라져서 쇳소리가 났다.
"자네가 알 필요 없는 곳. 혹은... 자네의 무덤이 될 곳."
박진철이 미소 짓자, 그의 뒤 어둠 속에서 야구방망이를 든 거구의 사내들이 킬킬거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이준은 깨달았다. 이곳은 법도, 상식도 통하지 않는 야만의 공간이다. 그리고 지금부터 벌어질 일은 '대화'가 아니라 '사냥'이라는 것을.
이준의 눈동자에 맺혀있던 혼란이 사라지고, 생존을 위한 차가운 이성이 그 자리를 채우기 시작했다.
"서 선생. 그냥 모른 척 연구만 하지 그랬어. 왜 잠자던 유령들을 깨우나?"
박진철의 목소리는 소름 끼칠 정도로 차분했다.
"당신이 우리 할아버지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다 알았어. 당신은 문화재 지킴이가 아냐. 살인마지."
박진철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가 턱짓하자, 옆에 있던 사내가 이준의 복부를 무자비하게 걷어찼다.
"억!"
이준이 의자째 옆으로 넘어지며 바닥을 굴렀다.
내장이 뒤틀리는 고통에 신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검은 우비를 입은 사내가 이준을 보며 비열하게 웃었다.
"서이준 씨. 표정이 안 좋으시네. 연구실 선물은 잘 받으셨나?"
"데이터.. 다 가져갔잖아. 그럼 문 열러 가지 왜 날 찾아왔어?"
이준이 이를 갈며 물었다. 그러자 사내가 어깨를 으쓱했다.
"가져는 갔지. 근데 우리 기술자들이 좀 멍청해서 말이야. 숫자만 잔뜩 있고, 이걸 스피커에 어떻게 세팅해야 하는지 감을 못 잡더라고. 오차 범위가 0.1도라나 뭐라나."
사내가 이준에게 다가오며 나직이 속삭였다.
"이사장님이 사용 설명서가 필요하시대. 좌표를 만든 장본인이 직접 와서 세팅해 달라고 하시더군."
이준의 눈빛이 흔들렸다.
놈들은 좌표(재료)는 훔쳤지만, 현장의 변수와 미세 조정(요리법)은 모른다.
'아직 기회는 있다.'
놈들이 문을 못 열고 쩔쩔매는 그 시간, 그 틈이 이준이 파고들 유일한 살길이었다.
박진철이 쓰러진 이준의 머리채를 잡아 올렸다.
"감정 싸움은 그만하지. 좌표와 여는 방법, 어디야? 불지 않으면 자네 후배... 가스 밸브를 최대로 열어주라고 할까?"
이준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여기서 끝까지 버티면 수영이가 죽는다. 그리고 어설픈 거짓말은 통하지 않는다. 이준은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로, 치밀하게 계산된 연기를 시작했다.
"허억... 알겠어... 말할게... 수영이는 건드리지 마."
"진작 그럴 것이지. 좌표가 어디지?"
"서... 서북공심돈이야. 지반이 약해서... 내일 정오에... 특수 장비로만 들어갈 수 있어."
"증거는?"
"내 노트북... 바탕화면... 'Final_Key' 폴더를 봐. 거기 보정값이 다 있어... 거짓말 아냐..."
박진철이 비서에게 눈짓했다. 노트북을 확인한 비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준이 만약을 대비해 만들어둔 미끼 파일이었다.
"좋아. 내일 정오에 서북공심돈으로 간다."
"이 놈은... 어떻게 할까요?"
"일단 살려둬. 세팅을 할 때 정보가 필요해."
박진철이 이준을 흘겨보며 사내에게 말했다.
"그리고, 일이 다 끝나면... 처리해. 사고사로 위장하고."
박진철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주력 부하들을 데리고 지하실을 빠져나갔다. 이제 남은 건, 이준을 감시하고 처리할 덩치 큰 사내 두 명뿐이었다.
사내 하나가 "담배 한 대 빨고 오겠다"며 밖으로 나갔다.
지하실에는 야구방망이를 어깨에 걸친, 곰 같은 덩치의 사내 한 명만이 남아 이준을 감시하고 있었다.
이준은 뒤로 묶인 손을 꼼지락거렸다.
무언가가 잡혔다...
다행히 놈들은 이준의 뒷주머니에 꽂혀 있던 현장 조사용 장비들을 '그저 잡동사니'로 취급해 압수하지 않았다.
이준은 머리를 굴렸다.
생존을 위해서는 믿을 것은 자신 밖에 없었다.
"저기..."
이준이 퉁퉁 부은 입술을 달싹이며 사내를 불렀다. 사내는 들은 척도 않고 스마트폰만 만지작거렸다.
"야, 거기 덩치."
이준이 일부러 나직하게 사내를 불렀다.
"뭐? 조용히 안 해? 확 재갈 물려버린다."
"이사장님한테... 보고는 제대로 했냐? 노트북 암호 말이야."
그 말에 사내의 시선이 이준에게 꽂혔다.
"아까 불었잖아. Final_Key라고."
"그건 폴더 이름이고...
파일 암호는 안 가르쳐 줬는데? 그거 없으면 파일 여는 순간 데이터 다 날아가게 설정돼 있어. 그럼 너희 다 죽을 텐데."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리는 이준을 보는 사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박진철은 완벽주의자였다. 만약 중요한 데이터를 날려먹는다면 그 불똥은 고스란히 감시역인 자신들에게 튈 게 뻔했다. 반대로, 자신이 암호를 알아낸다면 공을 세우는 셈이었다.
사내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야구방망이를 고쳐 쥐고 이준에게 다가왔다.
"수작 부리는 거면 네 혀부터 자른다. 암호가 뭔데?"
사내가 이준의 얼굴 가까이 귀를 들이밀었다. 이준의 입꼬리가 비릿하게 올라갔다. 입안에는 아까 터진 입술과 잇몸에서 흘러나온 피가 한가득 고여 있었다.
"암호는..."
사내가 더 잘 듣기 위해 고개를 숙이는 찰나.
퉤엣-!
이준은 입안에 머금고 있던 걸쭉한 핏물을 사내의 양 눈을 향해 정확히 뱉어냈다.
"으악! 아 시발!"
비릿한 피가 눈 점막을 덮치자, 사내는 본능적으로 욕설을 내뱉으며 눈을 비비기 위해 상체를 뒤로 젖혔다.
'지금이다.'
이준은 뒤로 묶인 손으로 뒷주머니의 휴대용 고광량 UV 라이트를 꺼냈다. 보지 않고도 손끝의 감각만으로 버튼을 길게 눌러 [18Hz Strobe Mode]로 전환했다.
"인간의 뇌파가 가장 견디기 힘든 주파수지. 받아라!"
이준은 몸을 비틀어 사내의 얼굴 정면을 향해 라이트를 비췄다.
번쩍! 번쩍! 번쩍! 번쩍!
어두운 지하실의 어둠을 찢고 보라색 자외선 섬광이 초당 18번, 미친 듯이 명멸했다.
단순한 눈부심이 아니었다. 시신경을 타고 들어온 고속 점멸 신호는 뇌의 알파파를 교란시켜 평형감각을 마비시키는 플리커 현기증(Flicker Vertigo)을 유발했다. 헬기 조종사들이 회전하는 날개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에 기절하듯, 사내는 극심한 구토감과 함께 비틀거렸다.
"우웩... 아악! 눈이... 세상이 돌아...!"
사내가 멀미를 하듯 바닥을 구르며 혼란에 빠진 틈을 타, 이준은 뒷주머니의 두 번째 무기를 꺼냈다.
'급속 냉각 스프레이'. 원래는 껌이나 오염물을 얼려서 떼어낼 때 쓰는 보존과학 도구였다.
이준은 뒤로 묶인 손목의 케이블 타이에 스프레이 노즐을 대고 집중 분사했다.
치이익-!
하얀 김과 함께 손목이 타들어 가는 듯한 냉기가 느껴졌다. 살점이 떨어져 나갈 듯한 고통이었지만, 이준은 이를 악물고 참아냈다.
"나일론 분자는... 영하로 내려가면 유리처럼 약해지지. 이걸 '냉각 취성'이라고 해."
플라스틱 타이가 하얗게 성에가 끼며 꽁꽁 얼어붙었다. 이준은 손목에 핏줄이 터질 듯 힘을 주며 바깥쪽으로 비틀었다.
파삭-!
경쾌한 파열음과 함께, 강철 같던 케이블 타이가 마른 과자처럼 산산조각 났다.
"후우... 후우..."
자유를 얻은 이준은 망설임 없이 의자에서 일어나, 눈을 감싸 쥐고 헛구역질을 하는 사내의 명치를 걷어찼다.
"케헥!"
사내가 기절하듯 쓰러질 때, 밖에서 담배를 피우던 다른 사내가 소란을 듣고 철문을 열었다.
"야! 무슨 일이야!"
이준은 벽에 걸려 있던 소형 분말 소화기를 낚아채 안전핀을 뽑았다.
"화학 수업 끝났다. 이제 집에 가야지."
푸슈슈슈슈-!
좁은 지하실이 순식간에 하얀 소화 분말로 뒤덮였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백색의 안개 속. 놈들이 기침하며 허우적거리는 사이, 의자로 사내의 정강이를 찍어버렸다. 사내가 쓰러지자, 바닥에 굴러다니던 깨진 유리 조각으로 담배를 피우고 들어온 사태를 찔렀다.
지하실이 소화기로 뒤덮여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상황. 혼란을 틈타 이준은 철문을 박차고 나간다. 폐공장의 미로 같은 복도를 지나 밖으로 나오자 쏟아지는 빗줄기가 얼굴을 때렸다.
이준은 피 묻은 입술을 닦으며 어둠 속으로 달렸다.
'박진철은 가짜 좌표로 갈 거야. 나에겐 시간이 없어.'
진짜 '문'을 열기 위해, 이준은 빗속을 뚫고 동북공심돈을 향해 질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