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은 폐공장을 빠져나와 빗속을 달렸다. 맞은 곳이 얼얼하고, 뜨거운 피가 흘러내렸지만, 지체할 수 없었다.
박진철은 서북공심돈이 가짜라는 것을 곧 깨닫고 진짜 목표인 동북공심돈으로 올 것이다.
'시간이 없다. 그들이 도착하기 전에 문을 열어야 한다.'
이준은 다급하게 지나가던 배달 오토바이를 세워 사정을 설명한 후, 스마트폰을 빌려 수영에게 암호 문자를 보냈다.
[좌표: Hwaseong-NE, 15deg. 30분 뒤 접선.]
수원 화성 박물관 인근 골목 / 새벽 1시 30분
빗줄기는 폭포수처럼 쏟아졌고, 골목은 이미 박진철의 사냥개들로 포위되어 있었다. 이준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젖은 벽에 몸을 기댔다. 스마트폰은 깨졌고, 대로변으로 나가면 CCTV와 차량 불빛에 1분 안에 발각될 상황이었다.
"이쪽으로 갔어! 쥐새끼 한 마리도 놓치지 마!"
고함 소리가 바로 옆 골목에서 들려왔다. 현대의 지도로 보면 이준은 독안에 든 쥐였다. 모든 도로는 막혔다. 하지만 역사학자의 눈에 비친 '지도'는 달랐다.
이준은 머릿속에서 2026년의 네이버 지도를 지우고, 1796년(정조 20년)에 간행된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의 도면을 펼쳤다.
'정조는 물길을 중요하게 여겼어. 성 안의 물을 밖으로 빼내면서도, 적의 침입은 막아야 했다. 그래서 만든 것이 은구(隱溝).'
이준의 시선이 주택가 담벼락 아래, 무성한 잡초와 쓰레기봉투로 가려진 낡은 철창으로 향했다. 사람들은 하수구라고 생각하는 곳.
하지만 그곳은 230년 전, 북은구(北隱溝)라 불리던 비밀 수로의 입구였다.
이준은 맨손으로 잡초를 뜯어내고 녹슨 철창을 잡아당겼다.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는 옆에 버려진 쇠파이프를 지렛대 삼아 틈새에 끼우고 온몸의 체중을 실었다.
끼이이익- 텅!
비명 같은 금속음을 내며 철창이 뜯겨나갔다. 이준은 망설임 없이 그 어둡고 축축한 구멍 속으로 몸을 던졌다.
"저기다! 저 놈이 하수구로 들어갔어!"
용역들이 뒤늦게 달려왔지만, 이준은 이미 냄새나는 어둠 속으로 미끄러져 사라진 뒤였다. 수로는 좁고 미끄러웠지만, 이준은 알았다. 이 길은 수원천(水原川) 지하를 가로질러, 성 밖의 안전지대까지 이어진다는 것을. 230년 전의 토목 기술이 현대의 포위망을 뚫는 순간이었다.
수영의 지하 작업실 (안전 가옥)
"선배! 살아 있었구나!"
북은구를 통해 빠져나온 이준이 흙탕물 범벅이 된 채 작업실 문을 열자, 수영이 기겁하며 달려왔다.
수영은 이준의 모습을 확인한 후 비명을 질렀다. 악취가 진동하는 하수구 찌꺼기와 빗물에 젖은 이준의 모습은 처참했다. 하지만 이준은 숨을 고를 새도 없이 젖은 가방을 작업대 위에 던지듯 올려놓았다.
"수영아, 감상에 젖을 시간 없어. 당장 노트북 켜."
"뭐? 형, 지금 꼴이..."
"박진철이 '서북공심돈'이 가짜라는 걸 눈치채는 데 30분도 안 걸려. 놈들이 차를 돌리기 전에 우린 '공명각(Resonance Angle)'을 찾아야 해."
수영이 떨리는 손으로 노트북을 부팅하며 물었다.
"각도?"
이준은 젖은 소매로 얼굴의 흙을 대충 닦아내고는 가방에서 삼중으로 비닐 포장된 낡은 고서 한 권을 꺼냈다.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 데이터베이스에서 몰래 백업해둔, 조선 최고의 화가 단원 김홍도(金弘道)가 그린 <화성추팔도(華城秋八圖)>의 초고해상도 영인본이었다.
"소리 증폭 장치는 준비됐어. 하지만 스피커를 공심돈의 어디에 두고, 벽면의 '정확히 어느 지점'을 때려야 공명(Resonance)이 일어나는지는 의궤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아. 그건 설계자(정약용)와 시공자(채제공), 그리고 정조 대왕만이 공유했던 1급 기밀 보안사항이었으니까."
"기록에도 없는 걸 지금 와서 어떻게 찾아?"
"정조는 기록의 왕이었지만, 동시에 고도의 암호 설계자였어. 그는 이 마지막 열쇠를 김홍도의 그림 속에 숨겨뒀지. 자, 이 모니터를 봐. 그림 속 '동북공심돈' 부분이다."
수영이 모니터 화면을 확대했다. 붓 터치 하나하나가 살아있는 명화였다. 하지만 확대한 부분을 뚫어져라 보던 수영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음... 좀 이상한데? 김홍도는 사진보다 더 정밀하게 그리는 사실주의 화가잖아. 그런데 나선형 계단 쪽에 있는 창문 하나만 유독 길게 늘어져 있어. 마치 녹아내리는 엿가락처럼. 천하의 김홍도가 실수를 한 건가?"
"아니. 김홍도가 실수를 했을 리가. 이건 의도된 거야. 바로 '왜상(Anamorphosis)' 기법이다."
이준의 눈빛이 형형하게 빛났다.
"16세기 르네상스 화가 한스 홀바인의 <대사들>이라는 그림 알지? 정면에선 바닥에 있는 얼룩이 찌그러진 빵처럼 보이지만, 측면 27도 각도에서 비스듬히 보면 완벽한 '해골' 형상이 나타나는 그림. 김홍도는 당시 청나라를 통해 유입된 서양 화법에도 능통했어. 그는 의도적으로 좌표 데이터를 그림 속에 왜곡해서 숨겨놓은 거야."
이준은 보존과학용 소프트웨어를 실행시켜 '적외선 투시 필터(IR Reflectography)' 모드를 그림 위에 겹쳤다. 그러자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던, 먹 밑에 숨겨진 밑그림(초본)의 붉은 보조선들이 유령처럼 화면 위로 떠올랐다.
"이것 봐. 찌그러진 창문의 선들이 가리키는 소실점(Vanishing Point)들이 한곳으로 모이고 있어."
이준이 화면 위에 디지털 각도기를 대고 선들을 역추적하기 시작했다. 복잡하게 얽힌 선들은 공심돈 바닥의, 아무런 특징도 없는 특정 지점을 정확히 가리키고 있었다.
[북동쪽 모서리 기점 / 수평각 15.0도 / 수직 높이 1.2m]
이준이 주먹을 꽉 쥐었다. "찾았다. 정약용은 설계도에서 지우고, 김홍도는 그림 속에 숨긴 '소리의 문'이야. 박진철은 죽었다 깨어나도 이 좌표를 모를 거야."
수원 화성, 동북공심돈 앞 잔디밭 / 새벽 3시 05분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를 뚫고 훔친 1톤 트럭이 잔디밭 위로 미끄러지듯 멈춰 섰다. 이준과 수영은 트럭에서 뛰어내렸다. 박진철의 차량 행렬이 방향을 틀어 미친 듯이 달려오고 있을 것이다.
남은 시간은 기껏해야 15분.
문제는 현장이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 웅장하게 솟아 있는 동북공심돈의 하단부는 거대한 벽돌과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김홍도의 좌표가 가리키는 곳은, 육안으로 보기에 그저 이끼 낀 평범한 성벽일 뿐이었다.
"선배! 좌표는 분명 여긴데... 그냥 벽이야! 틈새가 전혀 없어! 해머로 깨야 해?"
수영이 거대한 쇠망치로 벽을 쿵쿵 두드려보았지만, 둔탁한 돌 소리만 울릴 뿐이었다. 겉보기엔 완벽하게 이어진 통짜 화강암 벽이었다.
절망감이 스쳐 지나갔다.
"아니. 깨는 게 아니야. 눈에 보이는 것에 속지 마."
이준은 비에 젖은 차가운 벽면을 손바닥으로 천천히 쓸어내렸다.
"박진철의 아버지가 1975년에 진짜 입구를 콘크리트로 덮어버리고, 그 위에 아주 정교하게 '가짜 돌 텍스처(Faux Stone)'를 입힌 거야. 미술적 기교로는 완벽해서 인간의 눈으로는 구분이 안 돼."
이준은 트럭 짐칸에서 가방을 열어 '고성능 휴대용 UV(자외선) 램프'를 꺼냈다. 주로 미술품 위조 감별이나 혈흔 탐지에 쓰는 특수 장비였다.
"하지만 놈들도 시간은 위조할 수 없어. 자연 상태의 돌에는 200년이라는 세월 동안 자라온 '지의류(Lichen, 돌꽃)'라는 미생물이 붙어 있어. 이 녀석들은 자외선을 받으면 고유의 형광빛을 내지. 이걸 '지의류 계측법(Lichenometry)'이라고 한다."
이준이 스위치를 켜고 빗물에 젖은 성벽에 UV 램프를 비췄다.
파앗-!
어둠 속에서 강렬한 보라색 자외선이 닿자, 성벽의 대부분이 푸르스름하고 신비로운 형광빛을 띠며 반응했다. 230년 된 돌의 피부가 숨을 쉬고 있었다. 하지만, 이준이 램프를 옆으로 슥 옮기자, 특정 구역(가로 2m, 세로 2m)만이 마치 블랙홀처럼 새카맣게 죽어 있었다
.
"찾았다. 여기만 빛나지 않아. 생명 반응이 없어. 이건 돌이 아니라 화학 안료로 칠한 시멘트 덩어리야."
이준은 그 '죽은 벽'의 중심을 향해 붉은색 락카 스프레이를 꺼내 거침없이 X자를 그렸다. 빗물에 붉은 페인트가 피처럼 흘러내렸다.
"여기가 타겟 포인트다. 수영아, 스피커 설치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