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보이지 않는 바늘구멍

by 샤프

수원 화성 행궁 근처, 임시 연구실 / D-Day 2일 전


새벽 3시. 컵라면 용기와 에너지 드링크 캔이 산처럼 쌓여 있는 연구실.

분위기가 무거웠다.

256.4Hz라는 주파수(열쇠)는 찾았지만, 정작 '자물쇠'에 닿을 방법이 없었다.

컵라면을 얼마나 먹었는지, 제대로 된 식사가 그리웠다.

상쾌한 공기가 필요하다.

이 갑갑한 연구실에서 벗어나고 싶다.

하지만, 이렇게 마음 놓고 연구할 수 있는 기회가 이준에게는 꿈 같은 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불평이나 하다니.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안 돼. 시뮬레이션 결과, 전멸이야."

수영이 신경질적으로 키보드를 밀어냈다.

모니터 화면에는 동북공심돈의 3D 단면도가 붉은색 '실패(FAIL)' 경고등으로 뒤덮여 있었다.

수영이 머리를 감싸쥐었다.


"오빠 말대로 256.4Hz를 쐈어. 근데 소리가 바닥에 닿기도 전에 다 튕겨 나가. 1975년에 덮은 콘크리트 두께가 50cm야. 이건 방음벽 수준이라고. 소리가 아니라 대포를 쏴도 안 뚫려."

수영이 화면의 수식을 가리켰다.

이준은 수영 쪽으로 다가갔다.


"음향 임피던스(Acoustic Impedance) 차이가 너무 커. 공기 중에서 쏘는 소리가 단단한 콘크리트를 만나면 99.9% 반사돼. 지하에 있는 1796년의 자철석 장치까지 진동이 전달될 확률? 0.0001%도 안 돼."


이준은 묵묵히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1796년의 정교한 벽돌 위를 덮은 1975년의 투박한 시멘트.

그것은 마치 역사 위에 덧칠해진 폭력처럼 보였다.

너무나 잔인하다.

저렇게 소중한 문화유산을 무자비하게 덮어버리다니.


"뚫을 수 없다면... 틈을 찾아야지."

이준이 수영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격려했다.

"틈? 콘크리트를 통짜로 부었는데 틈이 어딨어?"

짜증 섞인 말투로 수영이 쏘아붙였다.

"아니, 있어. 1975년 복원 공사는 군사 정권의 속도전이었어. '빨리빨리'가 미덕이던 시절이지."


이준이 태블릿을 가져와 당시 시공 일지를 확대했다.

"여기 봐. 10월 14일 비 옴. 10월 15일 타설 강행. 비 오는 날 콘크리트를 부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수영의 눈이 커졌다.

"수분이 증발하면서 내부에 미세한 균열이 생겨. 그리고 기존에 굳은 콘크리트 위에 새 콘크리트를 덧부을 때 생기는 이음매..."


"콜드 조인트(Cold Joint)."

이준과 수영이 동시에 외쳤다.


"바로 그거야." 이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들은 완벽하게 밀봉했다고 생각했겠지만, 서로 다른 시간에 부어진 콘크리트는 절대 하나로 합쳐지지 않아."

이준이 연구실을 왔다갔다 걸어가며 말을 이었다.

"그 미세한 틈, '콜드 조인트'가 지하까지 이어져 있을 거야. 거기가 유일한 '소리의 통로(Sound Channel)'야."



임시 연구실 / 비 내리는 밤 9시

장대비가 창문을 때리는 소리가 연구실의 긴장감을 더했다.

화면 속 시뮬레이션은 이제 단순한 파형 분석이 아니었다. 그것은 거대한 콘크리트 덩어리 속에서 바늘구멍만 한 틈새를 찾아내는 '초정밀 음향 레이 트레이싱(Acoustic Ray Tracing)'이었다.

"찾았다..."

수영의 손이 떨렸다.

화면 속 복잡한 콘크리트 단면도 사이로, 가느다란 녹색 선 하나가 지하까지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있었다.

수영은 조급해졌다.

세상 사람들이 모르는 비밀을 혼자만 알고 있는 사람이 느끼는 감정이었다.

그리고 피곤할 때 꾼 꿈처럼 손에 쥔 이 비밀이 순식간에 사라질까봐.

놓쳐버릴까 불안했다.


"입사각(Angle of Incidence) 수직 87.5도, 수평 12.3도."

수영이 마른침을 삼켰다.

"이 각도로 스피커를 비틀어서 쏘면, 소리가 콜드 조인트를 타고 굴절되면서 지하의 진동판을 '직격'할 수 있어. 오차 범위는 0.1도. 빗나가면 그냥 소음공해야."


"이게 마지막 퍼즐이야."

이준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화면을 응시했다.

화면 하단의 해독률(Decoding Rate) 진행 바가 천천히 차오르고 있었다.


95%...

수영이 숨을죽였다.

96%...

수영이 손톱을 만지작거렸다.

97%...


이제 이 [최종 타격 좌표값]만 파일로 변환해서 저장하면 끝이다.

내일 새벽, 장비를 들고 가서 저 각도대로 스피커만 설치하면 200년의 문이 열린다.

드디어..

200년 전의 비밀이..

몇 십년 전의 비밀이..

세상에 드러날 것이다.


98%...


바로 그 순간이었다.


삐이익-!

삐이익-!

평화롭던 연구실에 찢어질 듯한 경고음이 울려 퍼졌다.

모니터 화면이 붉게 물들며 불길한 팝업창이 떴다.

[WARNING: 외부 접속 감지 - 데이터 미러링 중]


[SYSTEM: 타겟 좌표값이 외부 서버로 전송되고 있습니다.]


"뭐야! 누가 들어왔어!"

수영이 황급히 랜선을 뽑으려 했지만, 화면 속의 녹색 진행 바는 이미 복제되어 사라지고 있었다.


누군가 이들이 고생해서 찾아낸 '바늘구멍의 좌표'를 낚아채 간 것이다.


"안 돼...!"

이준이 책상을 내리쳤다.

좌표를 뺏기면 끝이다.

놈들이 먼저 문을 열고 내용물만 빼돌린 뒤 다시 닫아버릴 것이다.

절망적이었다..

이럴 수는 없어..

어떻게 얻은 기회인데, 이대로 날릴 수는 없었다.





수원 화성 행궁 근처, 임시 연구실 / 밤 9시

장대비가 쏟아졌다. 몇 시간 전 방화벽이 뚫린 후 좌절하던 이준은 수영을 위로하고 있었다.

비록 누군가가 좌표를 훔쳐갔다고 해도 그 좌표가 무엇인지, 해석하는 방법을 알아야 하고, 아직 그들이 콘크리트 안에 숨긴 비밀을 알아낼 수 있는 방법도 모를 것이라고.

무식하게 콘크리트를 드릴로 뚫어댈 거라고.

수영을 위로했다.

"우리가 먼저 찾으면 돼. 아직 그들이 누군지, 무엇을 알고 있고,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잖아."

포기하지 말자며 수영을 다독이던 이준은 수영을 바라보았다.


수영이 예뻐서 수영을 아꼈던 것은 아니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서 수영은 분명 예쁜 얼굴은 아니었다.

하지만, 항상 건강하고 생기가 가득한 얼굴이었다.

눈매와 눈빛이 뚜렸했고, 고집스럽게 생긴 입 모양 역시 활력 있어보였다.

하지만, 이준은 수영이 항상 밝고 성실해서 좋았다.

뒤에서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일들을 묵묵히 해내고, 생색 하나 내지 않는 태도가 특별하게 느껴졌다.

이준 역시 성실한 편이었지만, 항상 힘든 일을 하고 난 후에는 내색을 하는 편이었다.

그는 애써 자신이 만들어낸 성과들이 묻혀지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다.

그렇기에 이번에 도난 당한 데이터로 속이 더 타들어갔다.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자신이 느끼는 고통으로 수영 마저 힘들게 한 걸까.


며칠 동안 고생하느라 수척한 수영의 눈빛은 흐려졌고,

제대로 쉬지 못해 수척해보였다.

문득 죄책감이 들었다.

자신의 집착이 아끼던 후배를 힘들게 한 걸까..

이준은 이사장에게 받은 법인 카드로 수영을 택시를 태워 집에 보냈다.

"너무 무리했어. 가서 좀 쉬어"

이준의 말에 수영은 미소를 지었다.

할 말이 있는 듯 입을 열다가 다시 돌아서서 택시에 올라탔다.



이미 늦은 시간.

잠시 머리를 식히러 편의점에 다녀오던 이준의 발걸음이 뚝 멈췄다.

주머니 속 스마트폰 보안 앱이 찢어질 듯한 경고음을 토해냈기 때문이다.


삐이익-!

삐이익-!


[CRITICAL ALERT: 오프라인 서버 '온라인' 전환 감지]

[WARNING: 비인가 포트를 통해 대용량 데이터 전송 중]

"온라인 전환? 말도 안 돼... 우린 인터넷 선을 다 뽑아놨는데?"


이준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잊고 있었던 사실이 떠올랐다.


이 연구실의 메인 서버는 해킹을 막기 위해 철저한 '망분리(Air-Gap)' 상태였다.


가능한 가설은 하나다.

즉, 놈들은 아까 전의 데이터를 가져가는 데 실패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물리적으로 인터넷이 연결되지 않았는데 데이터가 전송되고 있다는 건 단 하나를 의미했다.


데이터를 빼앗는 걸 실패한 누군가 내부에 침입해 강제로 길을 뚫었다.


"물리 접속? 설마... 직접 들어왔어?"


원격 해킹이 아니었다.

누군가 연구실에 직접 침입해 메인 서버에 빨대를 꽂았다는 뜻이다.

이준은 빗물이 튀는 것도 잊은 채 미친 듯이 골목을 내달렸다.


"안 돼...!"

이준이 연구실 문을 어깨로 쾅 박차고 들어갔다.

하지만 늦었다.

방은 이미 텅 비어 있었다.

열린 창문으로 들이친 비바람에 커튼만이 유령처럼 펄럭이고 있었다.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이준이 얼어붙었다.

지체할 수 없다. 다급하게 책상으로 달려갔다.


[SYSTEM: 외부 미러링 진행률 99%... 전송 완료 임박]

이준의 시선이 책상 위 본체로 향했다.


서버 뒷면, 평소 비어있어야 할 포트에 이준이 꽂아둔 적 없는 새카만 'LTE 통신 동글'이 꽂혀 있었다.

붉은색 LED가 불길하게 깜빡이며, 폐쇄된 서버 속의 데이터를 외부의 누군가에게 실시간으로 쏘아 보내고 있었다.

"이 개자식들이...!"

이준이 다급하게 동글을 뽑아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발로 짓이겼다.

파직- 플라스틱 파편이 튀었다.

모니터의 전송 바가 멈췄지만, 이미 화면에는 [전송 완료]라는 절망적인 메시지가 뜬 직후였다.


놈들은 원격 해킹이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직접 들어와서 빨대를 꽂고 기다린 것이다.

해독이 끝나는 순간을 낚아채기 위해.

이준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바닥을 보았다.

방금 나간 듯 선명한 젖은 우산 자국과 진흙 묻은 발자국.


그리고 키보드 위에는...

놈들이 남긴 조롱 섞인 편지 한 통이 빗물에 젖은 채 놓여 있었다.


[과거를 파헤치는 자, 미래를 보지 못하리라. 여기서 멈추지 않으면 다음은 한수영이다.]



이준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진한 폰트로 인쇄된 커다란 글씨.

이건 단순한 도둑질이 아니었다.


보란 듯이 흔적을 남기고, 수영의 이름까지 거론하며 협박하는 대담함.


이건 명백히 김 국장의 짓이었다.

놈은 처음부터 연구를 방해하려 했고, 이제는 수영까지 건드리려 한다.


"감히... 수영이를?

이성의 끈이 툭, 끊어졌다

이준은 꽂혀 있던 USB 동글을 주먹으로 내리쳐 부숴버리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어디로 갈지는 이미 너무 명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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