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소리의 지도

by 샤프

국립고궁박물관 보존과학실

새벽 2시. 항온항습기가 내뿜는 백색 소음만이 감도는 보존과학실.


연구원 한수영이 홀로 연구에 매진 중이었다. 그녀는 긴 머리를 질끈 묶고 돋보기 안경을 쓴 채 18세기 백자 파편의 단면을 맞추고 있었다. 수영은 국내 유일의 '도자기 CT 촬영 전문가'였다.

집요한 구석이 있어서 한 번 열중하면, 작업 중엔 장관이 와도 문을 안 열어줄 만큼 독종이었다.


"에스프레소 투 샷, 설탕 없이, 온도는 85도."

갑자기 쑥 들어온 텀블러가 작업대 빈 곳에 정확히 안착했다. 수영의 핀셋이 멈췄다.

안경을 고쳐 쓴 그녀는 멈칫하며 목소리의 주인공으로 짐작되는 인물을 떠올렸다.


"그리고 이건 네가 좋아하는 성심당 튀김소보로. 대전에서 방금 왔어."


수영이 고개를 들자, 헝클어진 머리에 뿔테 안경을 쓴 서이준이 서 있었다.

퀭한 눈이지만 입가에는 특유의 자신만만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대학 시절 동아리 선배였던 서이준,

학구적이고 자신만만하고, 리더십 있는 모습에 수영이 한 때는 존경했던 선배였다.


"서이준 선배? 학교에서 짤렸다더니 보따리상 하러 왔어?"

수영이 관심 없다는 표정으로 다시 핀셋을 잡으며 말했다.

"수영아, 나랑 도박 하나 하자."

이준은 대뜸 태블릿 PC를 내밀었다.

화면에는 복잡한 3D 와이어프레임 데이터가 떠 있었다.


"오빠, 나 바빠. 이거 청화백자 안료 분석..."

수영은 고개를 저으며 백자 파편에 집중하려고 했다.


"이거 1975년 시멘트 아니야."

이준이 수영의 말을 뚝 자르며 화면의 특정 좌표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수영의 시간을 아껴주려는 듯 빠르게 말을 이었다.

수영은 짜증이 났지만 무슨 말인지 들어보나 보자는 태도로 등받이에 등을 대고 고개를 들었다.


"75년 복원 백서엔 '포틀랜드 시멘트 1종'을 썼다고 되어 있어. 근데 이 스펙트럼 봐. 알루미나(Alumina) 함량이 비정상적으로 높아. 이건 70년대 군사 정권이 지하 벙커 지을 때 쓰던 특수 방폭 콘크리트 배합비야. 문화재 복원에 벙커용 시멘트를 썼다고. 왜일까?"

수영이 안경을 고쳐 쓰며 데이터를 낚아챘다.


보존과학자의 호기심을 정확히 찌르는 포인트였다.

이준은 늘 다른 사람의 관심사를 이용해 흥미를 끄는 재주가 있었다.


"...밀도 값이 30%나 높네. 누군가 50년 전에 데이터를 조작했어. 아니면 그 밑에 핵폭탄이라도 숨겼거나."


이준이 수영의 눈을 응시하며 미소를 지었다.

잠시 뜸을 들인 그가 수영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핵폭탄보다 더 재밌는 거. 정조가 숨긴 1796년의 원본."

이준이 수영의 작업대 위에 걸터앉으며 속삭였다.


수영은 잠시 동안 매력적인 이준의 표정에 매료되었다.

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이준의 말뜻을 헤어리려고 집중했다.

"장비, 예산, 인력 무제한. 박진철 이사장 카드로 네가 사고 싶었던 2억짜리 다분광 카메라도 질러줄게. 나랑 같이 역사를 다시 쓰는 논문'의 제1저자가 될래, 아니면 평생 깨진 그릇이나 붙이고 있을래?"


수영이 헛웃음을 터뜨리며 보안경을 벗었다.

확실히 수영의 흥미를 끄는 제안이었다.


"선배는 진짜... 사람 미치게 하는 재주만 늘어서 왔네."

"그래서 콜?"

"콜. 대신 카메라 렌즈는 라이카(Leica) 커스텀이야."




이준과 수영은 모니터에 띄워진 동북공심돈의 LiDAR(레이저 스캔) 3D 단면도를 보고 있었다.

1975년에 타설된 두꺼운 콘크리트 바닥층이 붉게 표시되어 있다.

수영이 팔짱을 끼며 말했다.

"오빠, 복잡하게 갈 거 있어? 저기 콘크리트 바닥 밑에 공간이 비어 있다는 거잖아. 그냥 포크레인이나 대형 코어 드릴 가져가서 바닥을 뚫어버리면 그만 아냐?"

이준이 고개를 저으며 단면도의 한 부분을 확대했다.

"그랬다간 안에 있는 건 다 가루가 돼."

"왜?"

"이 콘크리트 타설 방식을 봐. '플로팅 공법(Floating Method)'이야. 바닥에 밀착시킨 게 아니라, 벽체에 철근을 박아서 공중에 띄운 채로 굳혔어. 마치 뚜껑처럼."

이준의 손가락이 콘크리트 아래의 텅 빈 공간을 가리켰다.


"언제 건축학도가 된 거야?"

수영의 물음에 이준이 어깨를 들썩였다.

"너도 알잖아. 나 한 번 파면.."

"끝까지 파지"

수영이 혀를 내두르며 말을 가로챘다.


"만약 저 콘크리트를 위에서 힘으로 깨부수려고 하면, 그 충격과 파편이 고스란히 아래로 쏟아져. 200년 된 목재 상자나 종이 문서? 드릴 진동만 닿아도 바스라져 버려."

"아... 물리적으로 부수는 순간 내용은 파괴된다?"

"정확해. 박진철의 아버지, 박정훈 국장도 그걸 알았던 거야. 그래서 1975년 당시에도 내용을 확인 못 하고 그냥 덮어버린 거지. 억지로 열려다간 '국보 파괴범'이 되니까."

이준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이건 '금고'야, 수영아. 금고 털 때 다이너마이트 쓰는 건 하수나 하는 짓이지. 진짜 기술자는 '비밀번호'를 찾아."

"그 비밀번호가 뭔지 모르잖아."

"힌트는 건물의 '형태'에 있어."

이준이 동북공심돈의 전체 실루엣을 화면에 띄웠다.

달팽이관처럼 둥글게 말려 올라가는 나선형 구조.


"이 건물, 이상하게 생기지 않았어? 적을 감시하는 망루라면서 창문은 좁고, 내부는 텅 비어 있어. 바람이 불면 웅웅거리며 울리는 구조야."

수영이 눈을 깜빡였다.

"울린다... 공명?"

"그래. 정약용은 기하학의 대가였어. 그가 굳이 시공하기 어려운 나선형 구조를 택한 건, 기능적인 이유가 있어서야. 이 건물은 거대한 청각적 장치(Acoustic Device)야."

이준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결론지었다.


"드릴 같은 '하드 키(Hard Key)'는 안 먹혀. 내부에 물리적 타격을 주지 않고 잠금장치를 풀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진동'과 '주파수'. 즉, '소프트 키(Soft Key)'가 필요해."


수영은 의문이 가득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러니까.. 그 키가 뭐냐고. 그 키를 대체 어디서 찾냐고..."

어려운 문제의 답을 모르는 아이가 정답을 구걸하는 표정으로 이준을 바라봤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게 있어. 월요일까지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와. 시간은 새벽 6시. 그때만 가능해."

수수께끼 같은 이준의 말에 수영은 그 생각이 뭔지 궁금했지만, 몰려오는 피곤함에 묻기보다 기다리기를 선택하며 돌아섰다.



국립고궁박물관 지하 수장고

이준과 수영은 어둠 속에서 푸른빛을 발하는 모니터 앞에 서 있었다.


그들 앞에는 재단의 힘으로 특별 반출된 국보급 유물, 김홍도의 <화성능행도 병풍> 8폭이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화성능행도 병풍>은 65cmX150cm 크기의 작품 8점을 여덟 폭의 병풍으로 만든 작품으로, 어마어마한 규모의 작품이었다. 정조가 김득신, 최득현, 이인문, 김홍도 등 당대 최고의 화원들을 대거 동원해서 그린 작품으로 알려져있다. 이런 귀한 가치를 지닌 작품을 가져올 수 있다니. 재단의 힘은 어디까지인가..

이준은 내심 놀랐다.


"이 작품, 자세히 본 적 있어?"

이준의 물음에 수영은 고개를 저었다.

"총 몇 명의 인물이 등장하는 줄 알아?"

수영이 뚱한 표정으로 이준을 바라보자, 이준이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말을 이었다.

"7349명의 사람, 1400여 필의 말.. 중국의 고소번화도에는 4800명의 사람이 등장하는데, 그 수준을 훨씬 뛰어넘지."

"화성능행도에 대한 지식을 자랑하고자 나를 부른 건 아닐 테고."

수영은 이준의 역사적 지식과 박학다식함을 좋아하지만, 저렇게 무작정 지식을 자랑하는 태도는 스스로 작아지게 느껴져 별로였다.

"정조가 어머니의 회갑연 겸 백성들을 위해 베풀었던 잔치의 장면도 있고, 화성 성곽을 배경으로 한 그림과, 화성 성곽과 행궁 등도 그려놓을 만큼 정조가 중요시했을 작품이야. 그래서 비밀이 있다면, 여기에 비밀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내 예상이 맞다면"

"비밀이라면, 어떤 비밀?"


이준은 재킷 안주머니에서 낡은 영인본(복사본) 서적 한 권을 꺼내 수영에게 내밀었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인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 수원 화성의 모든 건축 과정을 못 하나까지 기록했다는 완벽한 보고서였다.

"수영아, 의궤가 왜 위대한지 알아?"

"그야... 못 개수부터 인부들 품삯까지 다 적혀 있으니까?"

"맞아. 조선의 기록 정신이지. 그런데 말이야..."

이준이 책장을 넘겨 [동북공심돈 도설(도면)] 페이지를 펼쳤다.

그가 유독 집착하던 것이었다.

"이것 봐. 이상하지 않아?"

수영이 도면을 들여다보았다.

"뭐가? 평범한 나선형 구조잖아."

"너무 단순해."

이준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정약용은 기중기를 만들어서 돌을 들어 올린 천재 공학자야. 그런 사람이 설계한 감시탑의 내부 도면이, 마치 대충 그린 약도처럼 텅 비어 있어. 벽돌의 개수, 하중 계산, 내부 공명에 대한 언급이 단 한 줄도 없어. 다른 건물들은 기와 장수까지 적어놨으면서."


이준이 페이지를 탁, 덮으며 말했다.


"기록이 완벽할수록, 누락된 하나는 더 크게 비명을 지르는 법이야. 정약용은 일부러 비워둔 거야. 글로 남기면 적들에게 들키니까."

"그럼 설계도가 없는데 어떻게 찾겠다는 거야?"

이준이 빙긋 웃으며 스마트폰으로 사진 한 장을 띄웠다. 정조가 다산 정약용에게 보낸 비밀 어찰(편지) 첩이었다.


"기록할 수 없는 것은 그려야 하고, 보이지 않는 것은 들어야 한다. (書不尽言, 言不尽意)"

"정조는 다산에게 '글로 다 할 수 없는 말은 그림으로 남기라'고 했어. 당시 화성 축조의 모든 과정을 지켜본 유일한 '눈'이 누구였을까?"

"설마..."

"응. 당시 도화서의 수장이자 정조의 눈과 귀였던 남자. 단원 김홍도."

이준이 수영을 보며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정약용이 설계를 하고, 김홍도가 매뉴얼을 숨겼어. 텍스트(의궤)가 침묵하고 있다면, 답은 이미지(그림) 속에 있어. 그게 내가 김홍도의 병풍을 봐야 하는 이유야."

"그래서 이 병풍을 보자고 한 거구나."

수영은 혀를 내두르며 김홍도의 <화성능행도 병풍> 앞에 섰다.


역사적 사료의 '누락'을 간파하고, 그 공백을 메울 단서로 당대 최고의 화가를 지목한 이준의 통찰력에 소름이 돋았다.


이준은 수영의 꼼꼼함과 연구원으로서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 연구에 수영이 꼭 필요했다. 수영에게 진심을 담아 부탁했다.

"부탁해. 이 작품을 분석해줘."

수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시작해. 적외선 스캔 모드. 레이어 분리."

수영의 손놀림에 따라 모니터 화면 속 그림이 픽셀 단위로 해체되었다.

육안으로는 볼 수 없었던 김홍도의 붓터치 순서, 덧칠한 흔적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잠깐."

이준이 심각한 표정으로 모니터 앞으로 바짝 다가갔다.

그의 눈빛이 먹이를 노리는 맹수처럼 변했다.


"수영아, 이 그림... 김홍도가 그린 거 맞아?"

그의 직감이 뭔가 이상함을 감지했다.

이건.. 김홍도의 스타일과 뭔가가 달랐다.

뭘까..

무엇이 다를까.

어떻게 표현할지 고민하다가 이준이 깨달음을 얻고 탄성을 질렀다.

"붓질이 너무 거칠어."


"무슨 소리야? 진품 맞아. 탄소 연대 측정까지 끝났어."

수영이 어이 없다는 표정으로 이준의 말을 가로챘다.

"아니, 기술적인 거 말고. '감정'이 달라."


감정이라니. 지나치게 감성적이다.

하지만, 수영은 이준의 다음 말이 궁금했다.

이준이 화면 속 군중들을 가리켰다.

"김홍도는 '풍속화의 신'이야. 지나가는 강아지 꼬리에도 표정을 담는 사람이라고. 그런데 여기 구경 나온 수천 명의 백성들... 다들 행복해 보이지? 왕을 보며 환호하고."

이준의 손가락이 병풍의 가장 구석, 춤추는 아이인 '무동'에게 멈췄다.


수영은 헉 하고 소리를 내고 말았다.

그렇다. 그 아이, 무동에게는....

다른 군중과 다른 점이 있었다.

그 차이점 때문에 유독 더 특별하게 보였다.

큰 그림, 수많은 사람들 속에 숨어져 있는 트릭.


"근데 얘만 눈이 죽어 있어."

이준이 가리킨 무동을 따라 수영이 화면을 확대했다.

춤을 추는 역동적인 동작과 달리, 아이의 동공은 초점이 없었다.

게다가 시선이 왕의 행차를 향하지 않고, 엉뚱하게도 구석에 놓인 '책거리(책 그림) 병풍'을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었다.

"이건 실수가 아니야. '지시'야."

"지시라면?"

"왕의 지시"

이준이 미소를 띠며 말했다.

잠깐 동안 수영은 이준의 매력적인 미소에 매료될 뻔 했다.

대학교 졸업 후 동기들과 선배들 입에 오르내리던 이준이었다.

워낙 한국사를 덕질하다시피 관심이 많고 천재적인 이준이었기에 과에서 항상 중심이 되었던 인물이다.

특히나 잘생긴 외모와 당당한 성격까지 한 몫했다.

유독 이준은 동아리 직속 후배였던 수영을 잘 챙겨주었고,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수영은 이준과 투닥거리면서도 내심 자부심을 가졌다.

물론 그것이 수영이 동아리 일을 잘 처리하고, 성실하게 공부를 하기 때문임을 알고 있었지만, 늘 학교에서 관심을 갖는 이준과 가까웠던 점은 수영에게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모두들 졸업 후 이준의 행방을 궁금해했다.

그런 그가 지방에서 고등학교 기간제 교사를 하고 있는 점에 모두가 의아해했지만, 수영은 이준이 무언가 뜻이 있으리라 짐작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고 학계에서 이준의 이름을 듣지 못하자, 이렇다 할 성과를 이뤄내지 못한 그가 내심 안타까웠다.

가진 재능에 비해 운이 안 따라주는 사람.

수영은 그렇게 이준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그가 수영에게 함께 일할 것을 제안한 것이다.

무엇일까. 어떤 의중일까.

수영은 이준이 하는 일이라면, 믿고 돕고 싶었다.

설령, 쓸데 없는 음모론에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랄지라도.

그것이 어떤가.

역사 동아리에 진심이었던, 꿈 많던 대학생으로 돌아가는 듯한 기분에 설렜다.


정신 차리자. 이건 일이야.

수영은 스스로 나무라며 무동에 집중했다.


이준은 무동이 보고 있는 책거리 그림을 살폈다. 겉보기엔 평범한 정물화였지만, 책의 제목들이 마치 물에 젖은 듯 뭉개져 있었다.

"수영아, 시뮬레이션 돌려봐. 무동의 눈높이와 시선 각도. 대략 우측 15도, 하방 30도."

이준이 진지하게 지시했다.

"각도? 왜?"

"김홍도는 당시 연경(베이징)을 다녀온 사신들에게 서양의 화법을 전해 들었어. 이건 '왜상(Anamorphosis)' 기법이야."

이준이 자신의 안경을 벗어 수영에게 씌워주며 화면을 가리켰다.

"역사는 정면에서만 보면 안 보여, 수영아. 비스듬히, 삐딱하게 봐야 진실이 보이지. 16세기 홀바인의 그림처럼, 측면에서 봐야만 진짜 형상이 드러나는 트릭을 심어둔 거야."

수영이 반신반의하며 3D 뷰포트를 비틀었다.

화면이 15도 기울어지자, 뭉개져 있던 검은 얼룩들이 마법처럼 길게 늘어지며 서로 연결되었다.


흐릿했던 얼룩이 선명한 격자무늬 기호로 변했다.


"세상에..."

수영의 입이 벌어졌다.


잠시 동안 정적이 생겼다.

눈을 의심하며 머리 속에 들어온 정보를 해석하려고 애썼다.

"이거... 글자가 아니잖아?"

수영이 놀라움에 소리쳤다.

익숙한 것이었다.

학창 시절 음악 시간에 보던 것.

이준 역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정간보(井間譜). 세종대왕이 창안한 동양 최초의 유량악보."




"악보라니... 그럼 노래를 불러야 문이 열린다는 거야? 무슨 판타지 영화처럼?"

수영의 질문에 이준은 고개를 저으며 화이트보드 앞으로 걸어갔다.

마커를 쥔 그의 손이 춤추듯 움직였다.

그는 노래라는 글자를 써놓고 그 옆에 X를 표시했다.

"아니. 정약용은 실학자야. 추상적인 '노래'를 열쇠로 썼을 리 없어. 그는 모든 현상을 수치화했던 조선의 엔지니어였다고. 정확한 '물리적 주파수'가 필요해."

이준은 수영에게 손짓했다.

"수영아, XRF(X선 형광 분석기)로 저 책 그림 안료 좀 찍어봐. 내 감이 맞다면, 저건 평범한 먹이 아닐 거야."

수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홀린 듯이 이준의 지시에 따랐다.

지지직- 분석기를 갖다 대자 성분 그래프가 미친 듯이 치솟았다.

"Fe... Fe3O4? 자철석(Magnetite)?"

수영이 경악했다.

"다른 건 다 식물성 먹인데, 이 악보 부분에만 자석 가루를 갈아 넣었어. 오빠 말대로야. 이건 소리의 진동에 반응하도록 설계된 '자성 잉크(Magnetic Ink)'야."

수영의 말에 이준이 뛸 듯이 기뻐했다.

그는 학자로서의 순수한 열정이 타오르는 기분을 느꼈다.

"빙고. 자철석은 특정 파장의 진동에 공명하면 미세한 전류를 발생시키지."

이준은 화이트보드에 12가지 색을 적어 내려갔다.


"자철석이 칠해진 책들의 색깔 순서를 봐. 청색 - 황색 - 적색."

"그게 무슨 의미인데?"

"조선 성종 때 편찬된 <악학궤범>. 거기에 12율명(음계)의 색상 코드가 있어. 청색은 임종(林鐘), 적색은 남려(南呂)...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이 황색."

이준이 칠판을 탁! 하고 쳤다.


[황종(黃鐘)]


"황종이야. 조선 음악의 기준음이자, 길이와 부피를 재는 도량형의 절대 기준.

왕의 목소리이자 우주의 중심을 뜻하는 음이지."

이준은 공학용 계산기가 아닌,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데이터를 읊기 시작했다.


"세종대왕이 정비한 '황종척(黃鐘尺)'의 길이... 당시 기록에 따르면 기장알 100개를 늘어놓은 길이. 환산하면 약 34.6cm. 이걸 관(Pipe)의 길이로 잡고, 섭씨 15도에서의 공기 중 음속 340m/s를 파장 공식(v=fλ)에 대입하면..."


이준이 수식을 써 내려가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그는 지금 역사학자가 아니라 물리학자였다.

수영은 입을 벌리고 화이트보드를 응시했다.

"열린 관(Open pipe)의 기본 진동수 공식 f = v/2L..."

[계산 결과: 256.4Hz]


"256.4헤르츠."

수영이 중얼거렸다.

"현대 음계의 '중간 도(C4)'와 거의 비슷해."

"정확히는 '자연의 소리'라고 불리는 주파수지. 하지만 더 중요한 건 동북공심돈의 구조야."


이준은 동북공심돈의 단면도를 화면에 띄웠다.

나선형으로 꼬여 올라가는 독특한 벽돌 구조.

일명 '소라각'.


"우린 이걸 단순히 적을 감시하는 망루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정약용에게 이건 거대한 악기였던 거야. 소라 껍데기처럼 소리를 안으로 모아서 증폭시키는 '헬름홀츠 공명기(Helmholtz Resonator)'!"

이준은 수영을 돌아보며 확신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 그 눈빛은 섹시할 정도로 지적이었다.


"열쇠 구멍 따윈 없어, 수영아. 256.4Hz의 황종음. 이 정확한 주파수로 건물 전체를 공명(Resonance)시켜야만 해. 그 진동이 바닥의 자철석 장치를 깨우고, 50톤짜리 돌문을 밀어낼 거야."

수영은 멍하니 이준을 바라보았다. 인문학적 상상력을 과학적 팩트로 증명해 내는 이 남자.

대학 시절, 그녀가 왜 이 선배를 동경했었는지 다시금 기억이 났다.


"선배... 진짜 재수 없게 섹시하네."

수영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뭐?"

"아니야. 칭찬은 문 열고 나서 해. 스피커 구해야겠네? 그냥 앰프 말고, '지향성 음향 대포'급으로."

"그건 네 전문이잖아. 연구소에 있는 비파괴 검사용 초음파 발진기, 오늘 밤에 좀 훔치자."


두 사람은 어두운 연구실에서 서로를 마주 보며 공범자의 미소를 지었다.

김홍도의 그림 속 무동이, 마치 그들을 보고 윙크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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