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구원자

검은 세단의 초대

by 샤프

새벽, 이준의 자취방.

문화재청의 차단 이후, 이준은 닷새 동안 두문불출하며 키보드만 두드렸다.

공무원을 움직일 수 없다면, 학계의 권위로 압박하는 수밖에 없다.

그는 자신의 LiDAR 분석 결과와 의궤 대조 자료를 완벽한 학술 논문 형태로 다듬었다.

논문 제목: <화성 동북공심돈 하부 구조의 고고학적 불일치와 1970년대 복원 공사의 층위학적 오류에 관한 연구>


투고처: 국내 최고 권위의 역사학 학술지 [한국역사학보] (KCI 등재지).


"내용은 완벽해. 이 데이터는 반박 불가능한 과학이야. 이게 출판되면 여론이 들끓고 김 국장도 더 이상 무시 못 해."

이준은 충혈된 눈으로 [최종 투고] 버튼을 눌렀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승부수였다.



3일 후, 학교 교무실

이준이 던진 회심의 승부수는 최악의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보통 심사에만 두 달이 걸리는 학술지가, 단 3일 만에 '심사 결과' 메일을 보내왔던 것이다.


[판정 결과: 게재 불가 (Reject)]


심사평: "본 투고 논문은 검증되지 않은 사설 데이터(불법 취득한 LiDAR 자료)를 기반으로 하여 연구 윤리를 심각하게 위반하였음. 또한, 국가 공인 기록(1975년 백서)을 부정하는 근거가 빈약하며, 학술적 연구라기보다는 음모론적 가설에 가까움."


단순한 거절이 아니었다. 메일 하단에는 [투고 금지 3년] 패널티까지 적혀 있었다.


답답함과 어이 없음에 이준은 허탈한 한숨을 뱉었다.

이 정도면 온 세상이 작정하고 그를 괴롭히거나, 그가 진짜로 망상에 빠져버런 것이다.

스스로를 향한 의심이 스멀스멀 피어나기 시작했다.


그때, 들려온 소리에 이준은 깜짝 놀랐다.

"쿵"

교무부장이 이준의 자리로 다가와 서류 봉투를 던지듯 내려놓았다.


"서 선생, 자네 대체 밖에서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

교무부장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소리쳤다.

"네?"

"방금 재단 이사회에서 연락 왔어. 자네 재계약 불가 통보야. 이번 학기까지만 하고 짐 싸."


"아니, 부장님! 그게 무슨..."

황당한 통보에 이준은 분노가 치밀었다.

이게 무슨 비인간적인 통보란 말인가.

그런데 분노에 이어 자신을 향한 의심이 사라졌다.

'이렇게까지 한다고....?'


"학회에서 자네 '연구 윤리 위반'으로 징계 건의가 들어왔대. 학교 망신시키지 말고 조용히 나가."

교무부장의 차가운 목소리에 힘이 실려있었다.


이준은 멍하니 서류를 바라보았다.


논문 하나 보냈을 뿐인데, 3일 만에 학계에서 매장당하고 직장까지 잃게 생겼다.


"김 국장... 당신들 대체 어디까지 장악하고 있는 거야..."


이준은 자신이 건드린 것이 단순한 문화재 비리가 아니라, 대한민국 주류 사학계 전체를 관통하는 거대한 '성역(聖域)'임을 깨닫고 전율했다.


"이대로면... 내가 멈추지 못 하잖아.."


비 내리는 학교 정문, 저녁

이준은 박스에 개인 물품을 챙겨 쫓겨나듯 교문을 나섰다.

지금의 이 상황이 너무도 비참하고 무력했다.

자존심도 상하고, 속상했다.

당장 월세는 어쩌지..

월급은 얼마까지 나올까..

친구들과 가족들에게는 어떻게 말하지..

일자리를 구할 수 있을까?

스스로가 부끄러워질 만큼 현실적인 고민이 이어졌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런 일을 겪는 걸까.

나는 진짜 최악이다..

스스로가 가증스럽고 혐오스러웠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쳤을 때 갑자기 후회의 감정이 쏟아졌다.


분노, 수치, 후회, 스스로에 대한 동정...

혼란스러운 감정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신호등 앞에서 짐을 내려놓았다.

주저 앉아 울고 싶었다.

머리에 손을 감싸지고, 허탈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조용히 있을 걸..

후회되었다.


아니,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겠는가..


일단 당장의 생계가 걱정이었다.

곧 여름 방학이 오고, 2학기가 시작되니 교육청의 공고를 뒤져보면 다른 기간제 자리를 구할 수 있을 것이다.


'근데 그게 진짜 내가 원하는 걸까?'


곧 다시 신호등의 초록불이 켜졌다.

이준은 터덜터덜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갔다.

학생들에게 인사도 못 하고 쫒겨나는 이 현실이 너무 비참했다.

무엇보다 비 오는 날, 차도 우산도 없이 정류장에 버려진 현실에 허망했다.


일단 본가로 가서 다음을 생각해보자.


우산도 없이 비를 맞으며 버스 정류장에 서 있는 자신을 누군가 발견할까 부끄러웠다.

'학생들이 보기라도 한다면...'

이제 와 무슨 소용인가.

이 상황에서 자존심을 챙기려는 스스로가 우스웠다.


쏴아아...

이준 앞에 물웅덩이에 있던 물이 튀겼다.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이준으 고개를 들었다.


고급 검은색 세단 한 대가 물을 튀기며 그의 앞에 멈춰 섰다.


내 꼴을 불쌍하게 여긴 누군가 카풀이라도 제안한단 말인가.


뒷좌석 창문이 스르르 내려가고, 은발의 신사가 나타났다.


한 눈에 보기에도 고급스러운 옷을 입고 있었다.

이 상황에 차림새를 눈여겨보는 스스로가 더 싫어졌다.


신사가 중후한 미소를 지으며 이준을 바라보았다.


"서이준 선생님 되십니까? 비가 많이 오는데, 타시죠."

당황한 이준의 표정을 읽은 신사가 덧붙였다.

"제 차가 더 따뜻할 겁니다."


"누구십니까?"

이준이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차 안의 신사를 들여다보았다.

"당신의 그 '반려된 논문'을 아주 흥미롭게 읽은 독자입니다."

이준의 눈이 커졌다.

김 국장 선에서 킬(Kill) 당한 논문을 이 사람이 어떻게 본단 말인가?


"정확히 누구신지 물었습니다만.."


"아이고, 인사가 늦었군요. 화성문화재단 이사장 박진철입니다."


박진철은 차 문을 열어주며 덧붙였다.

"저는 당신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압니다. 그저 이야기를 좀 하고 싶군요. 흥미로울 겁니다"



서울 강남, 화성문화재단 이사장실 / 밤


통유리 너머로 서울의 화려한 야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빗물과 진흙으로 엉망이 된 이준의 몰골은, 티끌 하나 없는 대리석 바닥 위에서 더없이 초라해 보였다.

박진철은 최고급 크리스털 잔에 30년산 위스키를 따랐다. 얼음이 부딪히는 맑은 소리가 넓은 집무실의 정적을 깼다. 그는 잔을 이준에게 건네지 않고, 자신의 손에 든 채 천천히 이준을 훑어보았다. 그의 행동에 기품이 가득했고, 행동 하나 하나가 계산된 듯, 불필요한 동작이 없었다.


박진철의 눈빛이 변했다. 아까 차 안에서 보여주었던 인자한 신사의 가면이 벗겨지고, 먹잇감을 감정하는 냉철한 사업가의 눈빛이 드러났다.

"서이준 선생. 솔직히 말해보죠."

박진철이 한 모금 마신 위스키 잔을 테이블 위에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자네가 쓴 그 논문 말입니다. <화성 동북공심돈 하부 구조의... 오류에 관한 연구>."

그는 마치 더러운 것을 만지듯 손가락 끝으로 테이블 위에 놓인 이준의 투고 논문 사본을 툭툭 쳤다.

"내가 보기엔 삼류 소설 같더군요. 망상에 빠진 한 교사의 발악이랄까."

이준의 눈썹이 꿈틀했다. 젖은 옷 때문에 느끼던 한기가 순식간에 뜨거운 분노로 바뀌었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틀린 말입니까? 학계에선 퇴출당했고, 학교에선 쫓겨났고. 가진 거라곤 픽셀 몇 개 깨진 불확실한 데이터와 집착뿐이지 않습니까. 김 국장 같은 송사리한테 당해서 길바닥에 나앉은 주제에."

박진철의 말투는 정중했지만, 내용은 이준의 가장 아픈 밑바닥을 후벼파는 칼날이었다. 그는 이준의 반응을 즐기듯 느긋하게 소파 등받이에 기대앉았다.

이준은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이 사람이 나를 구해주려던 게 아니었나? 그냥 비참한 꼴을 구경하고 조롱하려던 건가?

모멸감이 치밀어 올랐지만, 이준은 감정에 휘둘리지 않으려 입술을 깨물었다.

여기서 화를 내면 정말 삼류가 되는 것이다.

이준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빛이 박진철의 차가운 시선과 정면으로 부딪쳤다. 핏발 선 눈이었지만, 비굴함은 없었다.

"이사님께선 예술품 보는 눈은 높으실지 몰라도, 역사를 보는 눈은 까막눈이시군요."

박진철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예상치 못한 반격이었다.

"제 논문의 데이터는 '픽셀'이 아니라 '팩트'입니다. 김 국장이 겁을 먹고 덮으려 했다는 사실 자체가 제 가설이 진실이라는 가장 강력한 증거 아닙니까?"

이준은 젖은 몸을 일으켜 테이블 앞으로 성큼 다가갔다. 그는 허락도 없이 박진철의 책상 위에 있는 최고급 태블릿 PC를 집어 들었다.

"뭐 하는 짓인가!"

박진철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날카로운 감정이 실렸다.

"망상인지 아닌지, 직접 보여드리죠."

이준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자신의 클라우드 서버에 접속해 LiDAR 원본 데이터를 화면에 띄웠다. 그리고 붉게 표시된 '0.3m의 오차 구간'을 박진철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이 붉은색 데이터가 보이십니까? 이게 1796년의 진실이 비명을 지르고 있는 소리입니다. 그 시절 권력자들이 시멘트로 처발라 질식시킨 역사의 숨소리라고요! 이걸 보고도 소설이라고 하신다면, 당신도 겁쟁이일 뿐입니다."

이준의 기세는 대단했다. 쫓겨난 기간제 교사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자신의 학설을 증명하려는 광기 어린 학자의 모습만이 남아 있었다.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박진철은 태블릿 화면과 이준의 이글거리는 눈동자를 번갈아 보았다.

잠시 후, 박진철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번졌다.

"하하하! 좋아, 아주 좋아."

박진철이 손뼉을 쳤다.

"겁쟁이라... 감히 내 면전에서 그런 말을 한 사람은 자네가 처음이야. 그릇이 다르군."

박진철의 눈빛이 다시 부드럽게, 하지만 더 깊은 탐욕을 담아 변했다. 그는 이준이 가진 그 '확신'과 '독기'가 마음에 들었다. 저 정도 미친놈이어야 50년 묵은 콘크리트를 뚫을 수 있다.

"사과하지, 서 선생. 자네의 그 '미친개' 같은 근성을 시험해보고 싶었네. 순순히 꼬리를 내리면 그냥 돈이나 쥐여주고 보내려 했거든."

박진철은 그제야 이준에게 새 위스키 잔을 꺼내 술을 따랐다.

"그 독기, 잃지 말게. 내가 자네에게 원하는 건 바로 그거야."

박진철은 잠시 생각에 잠겨있다 입을 열었다.

"김성훈 국장 그 사람, 전형적인 보신주의 관료야."

박진철이 혀를 차며 말했다.


"자기 선배들이 75년에 저지른 부실공사가 드러날까 봐 겁먹은 겁니다. 그들은 진실보다 자기 연금이 더 중요한 작자들이지. 자네 논문을 킬(Kill)하라고 압력을 넣은 것도 김 국장일 걸."

이준은 위스키 잔을 꽉 쥐었다.

짐작은 했지만 확인사살을 당하니 분노가 치밀었다.

이준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왜 저한테 이런 얘기를 해주시는 겁니까?"


박진철이 씁쓸한 미소를 띠며 이준을 응시했다.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정적이 숨 막힐 만큼 무겁고 버겁게 느껴졌다.


"75년에 화성 복원을 주도한 박정훈이라는 국장있었어요."

그와 척을 진 사람일까?

"저는 그 사람의 아들입니다."

박진철이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사장님..이요?"

이준은 놀란 표정을 최대한 숨기며 박진철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박진철은 창밖의 어둠을 응시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마치 그의 목소리는 성량이 크고 과장되어 있어서 연기 톤처럼 느껴졌다.

"그래서입니다, 서 선생. 자식 된 도리로, 아버지가 남긴 과오를 내 손으로 바로잡고 싶습니다. 아버지는 군인 출신이라 역사를 잘 모르셨어요. 그저 위에서 시키는 대로 빨리빨리 덮는 게 능사였겠지요."

"아.."

이준의 벌어진 입으로 탄성이 흘러놨다.

박진철의 온화했던 미소는 순식간에 증발했고,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나는 다릅니다."

박진철이 이준의 손을 덮석 잡았다.

힘 있고 신뢰가 가는 손이었다.


"나는 진실을 원합니다. 그 지하에 무엇이 묻혔는지, 당신이 밝혀주면 좋겠습니다. 필요한 모든 돈, 최첨단 장비, 그리고 김 국장의 방해를 막을 법적 보호까지... 내가 전부 지원하겠습니다."

이준은 순간 박진철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걸 보았다.

몸에 전율이 일었다.

박진철은 테이블 서랍에서 [재단 수석 연구원 위촉 계약서]와 [법인카드]를 꺼내 이준 앞으로 밀었다.

"연봉은 현재 교사 월급의 5배. 그리고 1796년 원본에 접근할 수 있는 '1급 열람 권한'을 주겠네.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든, 청와대 기록보관소든, 자네가 원하면 어디든 열릴 거야."

벼랑 끝에 몰린 이준에게, 그리고 방금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증명해낸 그에게 이것은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이준은 잠시 망설이다가, 박진철이 따라준 독한 위스키를 단숨에 들이켰다. 타는 듯한 액체가 식도를 타고 내려갔다.

"조건이 있습니다."

이준이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말해보게."

"제 연구에 어떤 간섭도 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발굴된 모든 진실은 세상에 공개해야 합니다. 당신 아버지가 한 짓까지 전부."

박진철은 잠깐 고민에 빠져있다가, 이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나는 진실을 원한다고 했잖나. 자식 된 도리로 아버지의 과오를 바로잡고 싶을 뿐이야."

벼랑 끝에 몰린 이준에게 이것은 단순한 제안이 아니었다.

자신을 비참한 현실에서 구원해줄,

썩어빠진 세상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알아봐 준 구원의 손길이었다.


게다가 월급의 5배라니.

애초에 돈 따위는 자신의 가치관에 없다고 못 박은 이준에게도 자본주의의 유혹이 크게 다가왔다.


고민할 필요가 있을까.

그런데, 나에게 왜..

나 따위에게 왜...

침을 꼴깍 삼켰다.

그동안 자신의 연구 성과에 대해 손가락질하며 무시했던 사람들의 얼굴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이준은 긴장한 나머지 위스키 잔에 남은 얼음을 입에 넣고 아그작 씹어 부쉈다.

자신의 꿈을 이룰 기회가 찾아온 걸까.


이준은 떨리는 손으로 펜을 들었다. 계약서에 서명하는 펜촉 소리가 유난히 날카롭게 정적을 갈랐다.

"감사합니다... 이사장님. 반드시, 밝혀내겠습니다."

이준이 계약서에 서명했다.

잉크가 종이에 스며드는 모습이 마치 덫에 걸린 짐승의 피처럼 검붉게 느껴졌다.


"서명은 하지만 자네 눈빛은 여전히 나를 장사치로 보고 있군."

박진철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긴, 문화재 재단 이사장이란 작자가 뒤로는 밀수품이나 사들인다는 소문, 자네도 들었겠지?"


이준은 부정하지 않았다.

박진철은 집무실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책장으로 다가갔다. 그가 특정 책을 건드리자, 책장이 스르르 움직이며 비밀 수장고가 드러났다. 그 안에는 금괴나 현금다발이 아닌, 낡은 도면통과 릴 테이프, 빛바랜 사진들이 가득했다.


"이게... 다 뭡니까?"

이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언뜻 봐도 박물관에 있어야 할 등급의 사료들이었다.


"정부가 '불편하다'는 이유로 폐기하려 했던 기록들일세. 내가 뒷돈을 써서 빼돌렸지."


"자네, 3년 전에 학회에서 제명당할 뻔했던 그 문제의 소논문을 기억하나?"

이준의 어깨가 움찔했다.

그것은 그에게 금기어와 같았다.

<화성성역의궤의 이면: 정조의 의도적 기록 누락과 방어 전략에 관한 고찰>.


당시 학계의 반응은 냉담하다 못해 적대적이었다.

'세계기록유산인 의궤(儀軌)의 완벽성을 의심하다니',

'사료 비판이 아니라 소설을 쓴다'는 비난이 쏟아졌고, 결국 이준은 강단에서 쫓겨나다시피 했다.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학회지에도 실리지 못하고 폐기된 원고입니다."


박진철은 책상 서랍에서 붉은 펜으로 메모가 가득한 이준의 원고 사본을 꺼내 놓았다.


"내가 그 학회 세미나에 있었네. 저 뒤편 구석에서 자네 발표를 들었지."

박진철이 원고의 한 페이지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다른 교수들은 자네가 미쳤다고 했지만, 나는 이 문장에서 무릎을 쳤어.

'완벽한 기록이란 없다. 가장 치밀한 기록일수록, 가장 큰 비밀을 숨기기 위한 위장막일 수 있다.'"


이준은 멍하니 박진철을 바라보았다.

그 문장은 자신이 역사학자로서 가진 신념의 핵심이었다. 모두가 활자화된 <의궤>를 성경처럼 떠받들 때, 이준만이 행간에 숨겨진 침묵을 읽어내려 했다.


"남들은 기록된 것만 보지. '돌을 몇 개 썼다', '쌀이 몇 섬 들었다'... 하지만 자네는 '기록되지 않은 공백'을 보더군. 왜 특정 날짜의 공사 기록만 빠져 있는지, 왜 설계도와 실제 건물의 치수가 미세하게 다른지."


박진철이 몸을 앞으로 숙이며 이준의 눈을 깊이 들여다보았다.


"내가 사업을 하면서 배운 게 뭔지 아나? 진짜 중요한 계약 조건은 계약서에 적혀 있지 않다는 거야. 역사도 마찬가지지. 승리한 왕이 남긴 기록을 곧이곧대로 믿는 놈들은 바보야. 자네처럼 지워진 흔적을 의심하는 놈이 진짜지."


이준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치솟았다.

그토록 외로웠다.

'실증사학'이라는 미명 아래, 눈앞의 사료만 앵무새처럼 읊어대는 교수들 사이에서 이준은 늘 이방인이었다. 그런데 이 자본가는 자신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서이준 선생. 나는 고리타분한 학자 따위는 필요 없어. 의궤에 적힌 글자 너머, 정조가 진짜 감추고 싶어 했던 그 '공백'을 찾아낼 눈이 필요해.“



"증명해 보게. 자네를 쫓아낸 그 늙은 교수들이 틀렸고, 기록을 의심한 자네가 옳았다는 걸. 내가 그 판을 깔아주지."

이준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것은 단순한 고용 제안이 아니었다. 학자로서 사망 선고를 받았던 자신에게 내려진 부활의 기회였다. '이 사람은... 역사의 본질을 알고 있어. 나와 같은 눈을 가졌어.'


"이사장님..."

이준의 경계심이 완전히 허물어졌다. 학자로서의 갈증을 해소해 준 유일한 이해자 앞에서, 그는 고개를 숙였다.


박진철은 이준이 서명한 계약서를 받아들며 미소를 지었다.


이사장이 떠나는 순간까지 이준은 감격에 겨워 허리를 90도로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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