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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aun SHK Jan 21. 2019

<콜래트럴> - 대도시의 비정함

줄거리

LA의 택시기사 맥스(제이미 폭스 분)는 리무진 회사를 차리는 것이 꿈입니다. 하지만 매사 용기와 결단력이 부족하여 조용한 소시민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바퀴처럼 돌아가는 그의 삶이 드라마틱하게 달라질 일은 없어 보입니다. 그는 우연히 빈센트(톰 크루즈 분)라는 남자를 태운 뒤 하룻밤 동안 개인 기사가 되는 조건으로 700달러를 제안 받습니다. 하룻밤 동안의 운전으로 벌 수 있는 돈보다 더 많은 금액입니다.

맥스가 할 일은 빈센트의 목적지 다섯 군데를 들른 뒤 마지막으로 LA공항으로 가기만 하면 됩니다. 맥스에게는 운수좋은 날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첫 번째 목적지에서 대기하던 중 택시 위로 시체가 떨어지는 참사가 벌어집니다. 태연히 건물에서 걸어나와 시체를 치우는 빈센트를 보고 맥스는 그가 살인청부업자임을 알게 됩니다.

빈센트는 의뢰인으로부터 요청받은 5명을 하룻밤 사이에 모두 살해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중입니다. 그리고 맥스는 운 없게 빈센트를 태우고 말았습니다. 맥스는 이 숨막히는 상황을 무사히 벗어날 수 있을까요.


대도시의 밤


마이클 만은 대도시의 처연함을 가장 잘 그려내는 감독 중 하나입니다. 영화 히트, 콜래트럴, 마이애미 바이스로 이어지는 그의 작품 속에서, 대도시의 야경은 서글프게 느껴집니다.

별빛처럼 화려한 인공조명들이 밤을 밝히고 있지만, 그에 대비되어 거리와 골목의 쓸쓸함은 한층 더 배가 됩니다. 범죄영화의 분위기를 대도시의 야경과 어둠을 통해 가장 인상깊게 표현해내는 감독이 아닐까 싶습니다. 콜래트럴은 이런 감독의 역량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작품입니다. 바쁘고 정신없는 LA의 낮이 지나가면 어둠과 함께 새로운 도시의 모습이 펼쳐집니다.

칠흑 같은 어둠이 드리워진 골목길, 처연하게 빛을 드리운 도시의 가로등들, 요란한 음악이 흘러나오는 클럽과 술집, 그리고 빛을 밝히며 도로를 지나가는 차량들이 밤의 도시를 수 놓습니다.  


빈센트의 대사


주인공 빈센트는 살인청부업자입니다. 고객의 의뢰를 받고 대상을 확실하게 처단하는 일을 하죠. 영화에서 빈센트는 밤사이 5명의 대상자들을 제거해 달라는 의뢰를 받습니다. 그리고 그 임무를 편안하게 수행하고 종국엔 책임을 덮어씌우기 위해 택시기사 한 명을 점찍습니다. 바로 택시기사 맥스입니다. 빈센트가 킬러라는 것을 알고 충격에 빠진 맥스에게 빈센트는 태연히 계약이행을 촉구합니다. 자기를 정해진 곳까지 잘 데려다 주면 된다는 것이죠.


첫 번째 대상을 살해한 후, 다음 대상자를 향해 이동하는 빈센트에게 맥스가 묻습니다. 왜 모르는 사람들을 죽이느냐고, 그러자 빈센트는 대답합니다. 그러면 내가 그 사람들을 알고난 후 죽였어야 하냐고. 그러면서 또 덧붙입니다. 60억명 중에 한 명 죽은 것이 무슨 대수냐, 르완다에서는 내전으로 수만명의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는데 당신은 관심 가져본 적이 있느냐고 말입니다.


물론 이런 논거들은 (합법과 불법의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논리적으로 빈센트의 살인을 정당화시키지 못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하는 내전이 있는 것도 사실이고 지금 이 시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은 사실이지만 어떤 현상이 존재한다는 이유로 현상에 대한 원인기여를 해도 좋다는 논리는 성립될 수 없습니다. 마치 강과 바다가 이미 더러우니 폐수를 무단방류해도 상관없다는 이야기나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빈센트의 대사는 현대사회의 극단적인 개인화, 파편화, 비인간화에 대해 곱씹어보게 합니다. 대도시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웃이 어떻게 죽는지 알지 못합니다. 일본에서는 90년대 이후부터 고독사(임종을 지켜주는 사람이 없이 홀로 죽음을 맞는 경우를 지칭하는 신조어)가 많아져 사회적 문제가 되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도 독거노인이 사망한지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발견되었다는 기사가 나오곤 합니다. 홀로 살다가 사망한 사람이 부패된 냄새를 맡은 이웃의 신고로 몇 달만에 발견되었다는 뉴스도 종종 보도됩니다.


대도시 속의 우리


현대의 대도시는 수많은 사람들이 밀집되어 살아갑니다. 출퇴근 대중교통에서는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사람이 붐비기도 하고, 주말에 번화가를 걸을 때는 행여나 어깨가 부딪히지 않을까 이리저리 피해가며 길을 걸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렇게 스쳐가는 사람들 중에서 친밀감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인구밀집도와 친밀감 형성욕구는 역설적이게도 반대되는 성향을 지니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만약 우리가 30분을 걸어가야 겨우 이웃을 방문할 수 있는 곳에 산다면 어떨까. 오고가며 만나는 사람들과 가볍게 인사하고 반가운 마음에 먼저 이야기 하고 싶어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마음이 잘 맞다면 좋은 친구로 지내고 싶어질 것입니다.

반대로 빽빽한 건물 숲에서 사람들에 이리저리 치이는 우리는 어떨까요. 바로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주치는 사람이 너무 많다보니 친밀한 관계를 형성해 나가고 싶은 마음보다 나만의 영역을 확보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해집니다. 내 옆집의 사람, 윗집의 사람들과 가볍게 산책하고 맥주 한 캔 하는 것보다는 나만의 안전한 요새를 구축하는 것이 더 중요하게 느껴집니다.

우리는 도시 속에서 점점 소외되어 갑니다. 사람들 속에서 점점 더 외로워지고 있습니다. 어쩌면 대도시가 감내해야 할 숙명인지도 모릅니다. 현대도시에는 높은 인구 밀집도로 인해 인구과잉이라는 문제가 나타납니다. 인구과잉은 역설적이게도 인간의 소외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적당한 삶의 영역이 확보되지 못하여 불쾌감을 느끼고 충돌을 일으키는 경우가 잦습니다. 현대인들은 일상에서 부딪히는 사람들을 극복해야 할 경쟁자나 장애물로 보거나 때로는 잠재적인 위협대상으로 느낄 때도 있습니다.

빈센트의 대사들은 한편으로는 섬뜩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현대인과 대도시에 대해 냉정히 생각해 보게 만듭니다. 그의 마지막 대사는 특히 대도시의 비정함을 집약적으로 드러내 줍니다.  'LA지하철에 탄 한 남자가 죽는다고,  누가 알아주기나 할까?'


영화는 우리 각자의 존재가 이웃에게 어떤 의미일지, 우리 이웃들은 나에게 또 어떤 의미일지 생각해 보게 만듭니다. 현대사회가 나아가는 지금의 방향성을 다시 돌릴 수는 없겠지만, 대도시의 처연함과 비정함은 조금 더 줄어드길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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