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로미티 여행 후 다음날 일찍 베니스로 떠났습니다.
베니스 본섬에 있는 숙박시설은 노후화된 편이라고 하여 메스트레 기차역 근처에 숙소를 잡고 이동하기로 했습니다.
메스트레역에서 다른 관광객들과 함께 버스에 몸을 싣고 몇 정거정만 가다 보면 멀리 베니스 본섬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설레는 마음으로 베니스 버스정류장에 하차하게 되면 여기서부터는 오직 두 발과 배로만 이동이 가능합니다.
자동차 경적 소리와 오토바이 소음 대신에 보트의 모터 소리와 곤돌라의 배 젓는 소리만 흐릅니다.
이탈리아 속에서 자신만의 색깔로 살아가는 또 다른 나라처럼 느껴집니다.
아침에 흐렸던 하늘이 맑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구름 한 점 없이 깨끗한 하늘 아래 베니스의 선명한 풍경이 드러나면 왜 수많은 관광객들이 이곳을 오려고 하는지 단번에 이해됩니다.
베니스의 낯설고 아름다운 풍광을 보고 있으면 이 도시가 사람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어느 날 갑자기 바다에서 솟아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작은 운하를 가로지르는 다리들을 계속 걷다 보면 어느 순간 넓은 폭의 운하와 마주치게 됩니다.
베니스 본섬을 가로지르는 이 커다란 운하를 커널 그란데라고 부릅니다. 유명한 리알토 다리가 위치한 곳도 바로 이 커널 그란데입니다.
무역으로 번성했던 베니스에서는 오래전부터 커널 그란데를 통해 세계 각지의 무역품들을 실은 상선들이 왕래하곤 했습니다.
지금은 세계 각지의 관광객들을 부지런히 실어 나르는 수상버스, 수상택시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첫 일정으로 베니스 아카데미아 미술관에 들렀습니다.
성 히에로니무스를 그린 작품을 이탈리아 미술관에서 자주 볼 수 있습니다. 히에로니무스 성인은 히브리어로 된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한 인물로 전해집니다. 광야를 떠돌다 가시 박힌 사자를 만나 가시를 뽑아주자 그를 따라다녔다는 일화가 전해져 그를 그린 그림에는 사자가 함께 나오곤 합니다.
이 작품에도 왼쪽 하단에 사자가 살짝 그려져 있어 성 히에로니무스를 그린 작품임을 바로 알 수 있습니다.
베니스 출신의 유명 화가 틴토레토의 작품도 볼 수 있는데 성경 속 동물을 창조하는 이야기를 그린 이 작품엔 마치 동물도감을 보는 듯 다양한 동물들의 모습을 묘사해 놨습니다.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펼쳐져 있는 것 같은 그림이 보입니다. 혼잡스러운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살벌한 지옥의 풍경들이 펼쳐져 있습니다. 악마와 괴물, 죽음과 고통이 혼란스럽게 그림 속에 펼쳐져 있습니다. 기괴한 풍경에서 작가의 독특한 상상력이 느껴지는 한편 당대 사람들은 지옥에 대한 공포가 크면 클수록 더욱더 종교적인 가르침에 따라 살아가려고 했을 것 같습니다.
미술관을 걷다 보면 아이들의 다양한 표정들을 그린 작품도 있습니다.
심통 난 얼굴, 심술궂은 얼굴, 천진한 얼굴이 한 작품에 그려져 있는데 아이들의 표정과 감정들이 생생하게 담겨 있는 작품들은 언제나 재미있습니다. 어른의 표정들과는 다른 귀여운 매력들이 있습니다.
다음 일정으로 방문한 곳은 두칼레 궁전입니다. 베니스는 공화국이었기 때문에 왕정이 이루어진 곳은 아닙니다.
왕이 살았던 궁전이 아니고 베니스의 최고 통수권자가 있던 곳이었기 때문에 베니스 총독궁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오랜 시간 중개 무역으로 번성했던 베니스는 넘치는 부를 과시하기 위해 두칼레 궁전을 웅장하고 화려하게 지었습니다.
정교하고 섬세한 건축물의 조각 장식들을 보면 베니스의 유능한 장인과 예술가들이 총독궁의 부름을 받고 작업을 했을거라 짐작됩니다.
베니스 총독궁은 내부를 화려한 금으로 장식했습니다. 화려한 내부 장식들은 총독궁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베니스의 부강함을 단번에 느끼게 해 주었을 것입니다.
이제는 그 화려했던 흔적을 세계 각국의 관광객들이 눈과 카메라 렌즈에 담아 가고 있습니다.
한때 지중해를 장악하고 중개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쌓아가던 해상도시 국가의 영광은 신대륙 발견과 지중해 해상무역의 쇠퇴와 함께 점차 침체의 길을 가게 됩니다.
벽과 천장에 장식된 금 장식들에는 무역으로 번창했던 과거의 영광이 그려져 있지만 그 영광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퇴색되었습니다.
두칼레 궁전의 화려한 천장 장식(좌), 두칼레 궁전 창문으로 보이는 베니스의 모습(우) 두칼레 궁전 집무실 쪽에 베니스를 대표하는 화가 틴토레토의 천국이 한쪽 벽면에 그려져 있습니다.
이 작품은 세계에서 가장 큰 캔버스화라고 전해집니다.
틴토레토의 <천국>르네상스 시대에는 회화 작품들이 벽면에 회반죽을 발라 안료를 착색시키는 프레스코 기법으로 많이 그려졌습니다.
하지만 베니스는 습한 기후 탓에 벽면에 회반죽을 발라 안료를 착색시키는 프레스코 기법을 사용하기 적절하지 못했고 대신 캔버스에 유화로 그림을 그린 작품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틴토레토의 이 작품도 베니스의 기후 탓에 캔버스에 그려진 작품입니다.
압도적인 규모의 <천국> 작품을 보면 당시 베니스의 위엄과 권력이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등장인물이 많아 한 눈에 보기에 정신 없을수도 있지만, 종교적으로 의미 있는 인물과 사건을 웅장한 규모로 그려놓는 것이 당대에는 신앙심을 고취시키고 신 앞에 겸손해지는 좋은 방식이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베니스 메인 광장인 산 마르코 광장에 왔습니다.
광장은 수많은 관광객과 새들로 붐빕니다.
산 마르코 대성당과 두칼레 궁전이 있는 이 대형 광장엔 늘 수많은 관광객들로 넘쳐나고 관광객만큼 많은 비둘기와 갈매기들이 광장을 분주히 날아다닙니다.
탁 트인 광장을 보고 있으면 유럽의 광장 중심 문화를 확실히 느낄 수 있습니다.
국가적인 행사나 종교적인 집회가 있게 되면 이곳 광장에 모여 행사를 주최하고 많은 시민들이 모였다고 합니다.
그때는 큰 행사 때문에 사람이 가득했다면 지금은 과거의 흔적을 찾는 관광객들로 사람이 가득합니다.
수백 년 전이나 지금이나 이곳 산 마르코 광장은 변함없이 사람들로 가득하고 한결같이 활기찹니다.
두칼레 궁전 옆에는 범죄인들을 가둬두는 감옥이 있었는데, 궁전과 감옥을 연결하는 다리가 있습니다.
감옥으로 들어가는 수감자들이 이 다리를 지나면서 '이제 다시는 이 아름다운 베니스 풍광을 보지 못하겠지'라며 탄식한 데에서 그 이름이 유래했다고 하는 '탄식의 다리'입니다.
탄식의 다리를 지나는 수감자의 시선으로 본다면 이렇게 베니스의 모습이 담기게 됩니다.
왜 감옥으로 가는 수감자들이 아쉬움의 탄식을 했을지 알 만할 것 같습니다. 빛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깜깜하고 차가운 감옥으로 들어가기 전 햇살에 반짝이는 베니스 풍경을 보게 된다면 탄식의 감정이 극대화되었을 것입니다.
해가 저물어가는 시간에 맞춰 다시 커널 그란데에 오면 베니스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 나타납니다.
저물어가는 해가 아쉬움을 표현하는 듯 수상도시 베니스를 붉게 채색합니다.
베니스는 세상 어디에도 없을 도시라고 합니다.
수상 도시라서 낭만이 있다는 측면도 있지만, 사실 이곳은 생활이 척박한 갯벌 지대를 개간하여 집을 올린 곳입니다.
수많은 노동력이 투입되어 돌을 붓고 말뚝을 세워 이 도시를 만들어 낸 땀과 눈물의 도시이기도 합니다.
척박한 지리적 환경에 살다 보니 농업이 아니라 무역업에 일찌감치 뛰어들 수밖에 없었고, 그 덕분에 한때는 최고의 해상무역국가로 발돋움하기도 했습니다. 그 수많은 영광은 신대륙 발견과 함께 지리적 이점의 쇠퇴로 이어졌고, 과거의 영광은 기억 속에 남겨졌습니다.
하지만 그 해상국가의 모습은 여전히 이곳 베니스에 남아있어 수많은 관광객들에게 그 역사를 노래합니다.
베니스의 매력은 단순히 물 위에 지어진 도시라는 사실이 아니라 지리적 환경을 극복하고 이용하여 번성했던 과거가 있고, 그 영광 또한 시간의 흐름과 함께 퇴색되었다는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수백 년 전에 그려진 베니스의 지도와 현재 베니스의 지도는 거의 큰 차이가 없다고 합니다.
그 오랜 시간 동안 도시의 모습이 거의 그대로 유지된 덕분에 드라마틱한 베니스의 역사가 풍경 속에 생생히 남아있습니다.
역사적 흔적이 많이 남아 있는 이탈리아로의 여행은 단순한 지리적 이동이 아니라 과거로의 시간여행이기도 합니다. 베니스는 잠시 타임머신을 타고 온 기분이 들게 만드는 그런 도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