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을 대하는 마음
로마 남부지역을 여행하는 경우 이동의 불편함 때문에 카프리 섬은 여정에서 제외하는 경우가 많다. 날씨의 제약을 받는 페리로 이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굳이 카프리를 행선지에 넣은 이유는 그곳이 섬이기 때문이다.
섬은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어 육지와 단절되어 있다. 이 고립감은 묘한 해방감을 준다. 물리적으로 육지와 떨어져 있다는 사실이 숨가쁘게 흘러가는 세상을 차단시켜 주는 느낌이다. 비록 나의 손은 한국의 최신 뉴스들을 검색하고 지인들과 연락을 주고 받을 수 있지만 타국의 섬에 와 있다는 느낌이 색다른 해방감을 안겨준다. 타의에 의한 고립은 외로움이지만, 자의에 의한 일시적 고립은 해방감을 안겨준다. 카프리 섬을 방문한 이유도 보다 큰 해방감을 느끼기 위해서였다.
직선거리로 8,000km가 넘는 이탈리아까지 여행을 왔는데 얼마나 더 해방감을 느껴야 하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럽 대륙에 있다는 느낌보다는 지중해의 어느 섬에 와 있다는 느낌이 아무래도 설렘을 더 높여준다. 이왕에 멀리 온 여행이라면 해방감과 기대감을 높여줄 수 있는 곳을 일정에 넣고 싶었다. 그래서 이 곳 카프리섬에 왔다.
낮의 카프리 시내는 아말피 코스트의 유명 관광지들처럼 관광객들로 붐비고 활력이 넘치는 공간이다.
수많은 기념품점과 레스토랑들이 관광객들에게 손짓하고 대도시 번화가에서나 볼 법한 명품샵들도 꽤 많이 보인다. 하지만 밤의 카프리는 낮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대도시처럼 환한 유흥의 밤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시내 일부를 제외하곤 어둡고 차분한 섬의 얼굴이 드러난다. 낮의 번잡스러움이 닦여나가면 밤의 고요한 공기가 밀려든다.
하나 둘 상점의 불이 꺼지고 손님들을 맞이하던 가게 주인과 직원들은 서둘러 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한다. 내가 이곳에서 해방감을 느끼고 즐거운 시간들을 보내는 동안 섬 곳곳에 늘어서 있는 수많은 상점과 식당 안의 직원들은 고단하고 정신없는 일상을 보냈을 것이다. 내가 섬에서 해방감을 느끼는 동안 그들은 섬이 가져다 주는 고립감 때문에 무료함을 느꼈을지 모른다.
어둠이 내려 고요해진 카프리섬은 이 곳 카프리 사람들에겐 심심하게 반복되는 일상일 수 있다. 같은 공간일지라도 그 의미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우리가 마주하는 장소는 늘 상대적이다.
내가 해방감과 설렘을 느끼는 여행지가 누군가에게는 평범한 일상일 수 있다. 반면 내가 지루한일상을 보내는 장소가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설렘 가득한 여행지일 수 있다.
내가 매일 출근하며 마주하는 회사 앞 광화문 광장과 경복궁이 누군가에는 소중한 휴가를 써가며 꼭 한번 오고 싶어했던 공간일지 모른다. 내가 퇴근 후 서둘러 벗어나고 싶어하던 공간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전통한복을 차려 입고 예쁜 여행사진들을 남기는 공간일 수 있다. 공간 자체가 중요하다기 보다는 그 공간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마음이 중요하다.
덕지덕지 일상의 상처와 때가 묻은 공간인지, 혹은 여행의 설렘에 취해 잠시 들렀다 가는 공간인지에 따라 같은 장소도 전혀 다르게 느껴질 수 있다. 객관적으로 어떤 공간인지 보다는 그 공간과 우리의 관계, 그 공간을 대하는 나의 마음이 공간에 대한 감정을 완성한다.
그렇다고 일상을 여행처럼 즐기겠다거나, 앞으론 굳이 여행을 가지 않겠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우리의 일상은 삶의 고단함이 너무나 깊게 눌려있어 새로운 감정을 느끼기 쉽지 않다.
수많은 발자국이 남겨진 눈길을 걸을 때는 별다른 감흥이 들지 않지만, 갓 내린 소복한 눈밭 위에 처음 발을 내디딜 땐 설렘이 가득해진다. 우리의 일상은 눈길에 찍힌 수많은 발자국 위의 또 다른 걸음이지만, 여행은 갓 내린 눈밭 위 새로운 발걸음이다.
우리의 일상엔 하루하루의 고단함이라는 발자국이 너무나 많이 남겨져 있다. 설렘과 새로운 감정을 느끼기엔 찍혀있는 발자국들이 너무 많다. 우리가 새로움과 설렘을 느끼기 위해서는 아무도 발자국을 남기지 않은 새하얀 눈밭이 필요하다. 그 낯선 공간을 딛는 순간의 설렘을 위해 우리는 여행을 떠난다. 나도 그런 새로움과 설렘을 느끼기 위해 휴가를 내고 어디론가 다시 여행을 갈 것 같다. 일상이 주지 못하는 새로움과 설렘을 위해 또 떠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