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집은 고쳤으니 물 안 샐 거야. 2층은 알아서 해~

by 망원여행자

2010년, 나는 서울 구로구에 내 인생 첫 집을 마련했다. 4층짜리 빌라의 2층. 내 명의로 된 등기부등본을 손에 쥔 날, 나는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 기쁨은 유통기한이 짧은 우유처럼 금세 상해버렸다. 세탁실 천장 한쪽이 조금씩 젖어 드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나는 남에게 아쉬운 소리 하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하는 극내향인이다. 어린 시절, 강원도 홍천 우리 집 마당 뒤에는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쓰는 빨래터가 있었다. 어느 무더운 여름날, 나는 부모님이 심어놓은 텃밭 오이를 하나 따서 아삭하며 베어 물고 있었다. 그때 빨래하러 오던 동네 할머니가 나를 보더니 냅다 소리를 질렀다.


"아니, 어린 놈의 자식이 남의 집 오이를 홀랑 훔쳐 먹고 있네!"


분명 내 집 마당에서 우리 집 오이를 먹고 있었건만, 나는 "이거 우리 집 오이예요!"라는 말 한마디를 못 했다. 억울함보다 갈등 상황 자체가 공포였다. 나는 먹던 오이를 쥔 채 헐레벌떡 방 안으로 도망쳐 들어갔다. 그런 내가, 3층 노인의 문을 두드리는 것은 에베레스트를 맨몸으로 등반하는 것만큼이나 가혹한 일이었다.


Gemini_Generated_Image_vc5awqvc5awqvc5a.png


결국 세탁실 천장은 고여 있던 물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쩍 갈라지며 무너져 내렸다. 노인은 천장이 무너지고 나서야 마지못해 자기 집 배관을 수리했다. 하지만 사과는 없었다.


"내 집은 수리 다 했으니 이제 물 안 샐 거야. 무너진 세탁실은 알아서 수리해. 이웃끼리 좋은 게 좋은 거지?"


나는 인테리어 업체를 불러 수리를 마쳤고, 70만 원이라는 영수증을 들고 노인을 찾아갔다. 당시 우리 부부에게 그 돈은 부모님께 매달 보내드리는 소중한 용돈이자, 몇 달을 아껴야 모을 수 있는 귀한 생활비였다. 하지만 노인의 반응은 가관이었다.


"그냥 놔뒀으면 말라서 다시 붙었을 수도 있을 텐데, 왜 사람을 불러서 돈을 쓰고 나한테 내라고 해? 난 돈 없으니까 마음대로 해!"


'놔두면 말라서 붙는다'는 기괴한 논리 앞에 나는 다시 홍천의 그 소년이 되었다. 입을 뗐으나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고, 등 뒤로는 식은땀이 흘렀다. 결국 아내의 만류로 사비로 수리비를 감당하며 참기로 했지만, 내 가슴 속엔 시커먼 응어리가 남았다. 갈등을 직면할 용기가 없어 '착한 사람'이라는 가면 뒤로 숨어버린 대가였다.


그날 이후, 나는 비 오는 날 새벽이면 혼자 거실에 앉아 어두운 창밖을 내다보며 기괴한 상상에 빠지곤 했다. 주먹만 한 돌멩이를 들고 나가 저 무책임한 3층 노인의 창문에 힘껏 내던지는 상상. 와장창 소리를 내며 깨진 유리창 너머로 당황해하는 노인의 얼굴을 보는 비겁하고도 간절한 복수극.


홍천의 순진했던 오이 소년은 그렇게 괴물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때의 비겁한 회피가 내 안에 분노라는 괴물을 키워냈다는 사실을, 나는 2년 뒤 화장실 천장에서 다시 물방울이 떨어지던 그날 뼈저리게 깨닫게 된다.


(3화에서 계속)

수요일 연재
이전 01화화장실 천장에서 누런색 물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