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도치 않은 상처
살면서 견디기 싫은 것 중 하나는, 내 의도가 상대방에게 왜곡된 영향을 미치는 것을 가만히 지켜볼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는 것이다. 의사소통은 애초에 완벽하지 않기에 우리는 수많은 오해들을 안고 살아간다. ‘가만히 있어’ 라는 말이 누군가에겐 숨을 돌리라는 휴식의 의미로 다가오지만, 누군가에겐 자존심을 깎아내리는 의미로 다가올 수 있는 것처럼. 우리는 몹시도 다르기에 서로가 서로를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마치 이룰 수 없는 꿈과도 같다. 때로는 우리가 만든 환경이 서로를 더 의심하게 만들기도 한다. 언론과 여론이 형성하는 특정 집단에 대한 편견과 근거없는 혐오는 그 어떤 선한 공동체도 악해 보이게 만드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마음에서 발사된 ‘의도’라는 총알은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종종 표적에 적중하지 못한다. 그래서 때로는 소통 자체가 불편하게 다가올 때가 있다. 의도치 않게 누군가를 상처줄 수 있고, 의도치 않게 누군가로부터 상처받을 수 있기 때문에. 통신 수단의 발달로 우리 모두는 한층 더 가까워지고 더 많은 걸 공유하게 된 동시에, 오해의 여지와 상처받을 상황에 더 많이 노출되었다. 그래서 소통의 기회가 늘어났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이 오히려 마음의 문을 닫고 살아간다. 그리고 그것에 익숙해진 나머지, 낯선 이에게 인사를 건네고 미소짓는 것조차 이상해 보이는 효과를 일으킨다. 물론 일반화하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언젠가 처음 보는 누군가에게 인사를 건넨 후 답례를 받는 것이 아니라 ‘쟤 뭐지’ 류의 눈빛을 받은 적이 있기 때문에, 그가 아마 여백이 없는 관계에 지친건 아니었을까 조심스레 생각했을 뿐이다. 아니면 그냥 내가 싫었을지도:) 현 코로나 상황에만 거리두기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 적절한 거리두기가 필요하다.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는, ‘이해와 존중’이라는 이름의 거리두기가.
때로 타인을 보며 떠오르는 생각들을 절대화하는 사람들이 있다. ‘안 봐도 비디오야’, ‘불 보듯 뻔해’, ‘쟨 저런 애야’, 수없이 되새기고 판단하며 마음 속 혼란을 정리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확실한건, 비디오는 봐야 아는 것이고 뻔한 불은 없다는 것이다. 모두에게는 ‘의외’의 모습이 있다. 그것이 반사적으로 나온 것이던, 감춰진 본모습이 드러난 것이던. 누군가를 섣불리 판단하는 것은 스스로의 생각을 고정관념의 감옥에 가두는 것이다. 그리고 감옥에 갇힌 생각으로 상대방을 본다는 것은, 상대방의 가능성을 무시하겠다는 다짐과 같다. 고정관념의 눈빛을 받는 사람은 쉽게 움츠러들기에. 하지만 우리는 그 눈빛에 지레 겁먹을 필요가 없다. 그 눈빛은 제아무리 강렬하더라도 모든 걸 꿰뚫어 보는 진실의 눈빛이 아니다. 자기 생각대로만 보겠다는 허영과 자만의 눈빛이다.
우리가 타인의 특정 모습을 싫어하는 것은, 그 모습에서 스스로를 발견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대체로 동의한다. 우린 때로 자신에게 결핍된 부분을 동경하고, 가지고 있는 것을 못마땅히 여기곤 하니. 편견, 의존을 싫어하는 나의 마음 속엔 분명히 편견, 의존의 욕구가 데칼코마니처럼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실로 그렇다. 해결하기 힘들 정도로 머릿속이 혼란스러울 때, 편견의 힘을 빌려서라도 질서를 만들고 싶다는 충동을 느낀다. 그 질서가 울퉁불퉁하다 한들, 불안을 달래줄 수 있다면야 무엇을 마다하겠는가. 하지만 편견은 세상을 보는 시야를 편협하게 만들기에, 나 역시 편견 섞인 시선을 받기 싫어하기에 결국 편견을 내재화하는 나 스스로가 가끔 미운 것이다.
의존도 마찬가지다. 뭐든지 혼자 힘으로 해결하고 싶어하는 나의 무식한 고집이 무색하게, 가끔은 도움의 손길을 구걸하는 스스로를 발견하곤 한다. 물론 그 손길을 갈구하는 내 행동이 의지에서 비롯되었다기보단 본능에서 비롯되었을 때가 더 많았던 것 같지만. 의존한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책임을 짊어지게 하는 일이기에 신중해야 한다. 의존의 관계가 다 나쁜 것은 아니다.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관계인 사랑 역시 의존의 관계라고 생각한다. 단지 의존을 통해 서로가 상호 발전할 수 있는 관계가 있는 것이고, 서로가 서로를 불행으로 이끌고 갈 관계가 있을 뿐이다. 우리가 신중해야 할 지점이 바로 이곳에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의존해야 한다면, 누군가에게 책임을 짊어지게 한다면, 그 책임이 상대방의 삶을 더 환하게 밝힐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우리 마음 속에 내재되어있는 이러한 모순들과 서로의 이질성 덕분에 우리는 종종 상처받고, 외롭고, 불만족스럽다. 우리는 언어라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 소통이라는 발전을 이루었지만 피할 수 없는 오해의 가시덩굴을 안고 살아간다. 마치 장전된 총을 가지고 태어난 것처럼, 우리도 모른 사이에 총알은 발사되고 누군가는 반드시 그 총알에 맞는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공통된 합의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누군가의 성공은 누군가의 질투가 되고, 누군가의 행복은 누군가의 불행이 된다. 누군가의 실패는 누군가의 기회가 되고, 누군가의 열정은 누군가의 부담이 된다. 그렇게 우리는 타인의 마음에 의도치 않은 구멍을 낸다.
우리는 과연 ‘손에 손잡고 벽을 넘어서’ 하나가 될 수 있을까?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하나가 되고 싶다는 기대는 곧 욕심이다. 하나가 되고 싶다는 기대는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아니라 스스로의 마음 속에 떠오르는 이상향의 모습으로 바라보는 것이며, 서로의 다른 점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하나가 되고 싶다는 마음가짐은 그 자체만으로도 서툴고 충동적인 가속이다. 방아쇠를 섣불리 당겨 상대방의 마음에 구멍을 내는 일이다.
우리가 하나가 되진 못해도 서로의 구멍을 메워주는 존재가 될 수 있다면 좋을텐데. 깨진 마음의 조각들 중 서로의 구멍에 맞는 모양을 찾아 마치 퍼즐 맞추듯이 당신 마음의 구멍에 끼워넣어 줄 수 있다면, 그 조각들로 말미암아 당신의 아린 마음을 토닥여 줄 수 있다면, 우리는 전보다 더 온전해질 수 있을텐데. 마음의 구멍이 어떻게 생겼는지 관찰하는 것이야말로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려는 시선이며, 서로를 한 걸음 더 이해해보려는 시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