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01)

by 이브와 아담

볼 때마다 새롭게 느껴지는 것들이 있다. 책으로는 어린 왕자와 데미안이 그랬고, 영화로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그랬다. 어린 왕자가 ‘관계’에 대해, 데미안이 ‘성장’에 대해 인생의 변곡점마다 색다른 시야를 제공했다면,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지금의 나에게 새로이 보여주는 것은 바로 ‘정체성’이었다. [BBC 선정 21세기 위대한 영화 100선]에서 당당히 4위를 차지할 정도로 유명한 영화인 만큼 어릴 적 학교에서, 아니면 다른 곳에서 우연히 접할 기회가 많았지만 당시에는 그저 한 아이의 좌충우돌 모험담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쩌면 사회초년생 생활을 보낸다고도 할 수 있는 요즘, 이 영화가 주는 메세지는 어릴 적과는 꽤나 다른 깊이로 다가왔다.


이 영화는 ‘이름을 잃어버린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영화 첫 장면, 주인공 치히로의 표정은 뾰로통하다. 부모님 때문에 원치 않는 이사를 가야 해서. 그동안 친하게 지냈던 친구들과 원치 않는 이별을 해야 해서. 이사를 위해 차를 타고 이동하며 그들은 거대한 폐놀이공원들을 보게 된다. 과도한 성장의 부작용. 1980년대 일본 버블경제의 잔재. 당장의 이익에 눈이 멀어 경제불황을 경험해야 했던 치히로의 부모는 다시 이익에 눈이 멀어 낯선 곳으로 향한다. 오직 그들의 딸 치히로만이 아쉬워하는 고향을 뒤로 한 채. 그녀는 아쉬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고향에서의 경험과 추억이 그녀의 정체성을 형성해주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 가족의 이사는 끝없이 이익을 채우려는 욕망에 사로잡혀 정체성을 가끔 포기하기도 하는 우리 모두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었다.


어린이는 여러 가지 체험을 하며 어른으로 성장한다.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그 다음은 오지 않는다. 그걸 표현하고자 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는 아이가 어른으로 성장하기 위한 ‘과정’을 보여주기 위해 판타지를 이용한다. 그는 우화적인 부분을 빌려서, 때로는 등장인물의 특징을 통해서 우리의 세계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루이스 캐럴의 소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토끼굴처럼, 치히로의 가족들은 맛있는 냄새의 근원지를 찾아 홀린 듯 어두운 터널을 통과한다. 마치 인간의 끝없는 욕망을 보여주려는 것처럼, 치히로의 부모님은 주인이 자리를 비운 가게에 앉아 끊임없이 음식을 먹고 돼지가 된다. 부모님을 잃고 홀로 남은 치히로는 부모님을 되찾기 위해, 이 이상한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노동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일터로 대변되는 유바바의 온천탕으로 향한다.

유바바

유바바는 온천탕을 관리하는 마녀이다. 그녀의 온천탕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들은 이름이 없다. 아니, 없다기보단 본명을 뺏긴다. 치히로 역시 온천탕 취업을 위해 계약서를 작성하고 본래의 이름을 뺏긴 채 ‘센’이라는 가명으로 활동한다. 한편 온천탕에서 오래 일한 사람들은 서로 닮아간다. 남자들은 점점 개구리 요괴가 되어가고 여자들은 점점 민달팽이 요괴가 되어간다. 이는 감독이 직장인들을 보며 떠오르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라 한다. 치히로처럼 부모님을 되찾기 위해서, 하쿠처럼 마법을 배우기 위해서, 우리 모두는 소중한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기꺼이 이름(정체성)을 포기하고 온천탕에 취직한다. 유바바의 온천탕은 철저하게 관료적이고 자본주의적인, 개성을 상실한 우리네 사회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여기서 일을 하지 않는 자는 유바바가 모두 동물로 만들어버려.

이름을 잊어버린다면 돌아가는 길을 영영 잃어버리고 말거야. 이름을 잊지 말도록 해. 이름은 소중한 거야.

-하쿠



가오나시

유바바의 온천탕에는 개구리와 민달팽이 직원들만 있는게 아니다. 정해진 틀에 부합하지 못하고 모두의 관심을 받지 못한 채 살아가는 얼굴 없는 요괴, 가오나시도 있다. 그는 소외된 존재였기에 잃어버릴 정체성조차 없었다. 오직 치히로만이 그에게 관심을 가지고 따뜻하게 대했고 가오나시는 치히로 덕분에 온천탕이라는 사회에 들어와 서툰 관계맺기를 시작한다. 그곳에서 절대적인 힘을 차지하는 ‘돈’을 매개로 해서. 온천탕의 모든 직원들, 심지어 유바바까지 그의 돈을 얻기 위해 수많은 공물들을 갖다바친다.


하지만 가오나시가 찾던 것은 치히로의 따뜻함이었고, 치히로는 ‘이름’을 기억하라는 하쿠의 말을 새겨들었기 때문에 정체성을 상실한 가오나시의 호의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온천탕이라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 많고 외로웠던 가오나시는 배가 터질 정도의 관심을 받으면서도 여전히 타인과의 관계를 갈구하는, 괴물이었다. ‘돈’을 마구 휘둘러 내면의 결핍을 채우려는 욕망은 결코 충족될 수 없었다. 그가 굶주림을 채우기 위해 진정 필요했던 것은 돈으로 산 공허한 관계가 아니라, 내면의 따뜻한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이었다.


치히로와 마찬가지로 본명을 뺏긴 후, 마법을 배워 강해지기 위해 유바바의 밑에서 일했던 하쿠는 그녀의 명령을 따라 제니바라는 마녀의 도장을 훔치다가 죽을 위기에 처한다. 치히로는 제니바의 저주에 걸린 하쿠를 구하기 위해, 가오나시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제니바를 만나러 함께 여정을 떠난다. 그렇게 만나게 된 제니바는 유바바와 달리 소박한 행복과 여유를 즐기며 살아가고 있었다.

제니바

제니바는 유바바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유바바의 쌍둥이 언니였다. 그렇다. 유바바와 제니바는 세계였다. 우리에게 여유를 선물하는 제니바의 세계와 이름을 뺏어가는 유바바의 세계는 결국 같은 곳, 우리들이 살아가는 세상의 모습이었다.

치히로. 좋은 이름이야. 자신의 이름을 소중히 하렴. 부모님의 일도, 하쿠의 일도 너가 스스로 해결할 수밖에 없어. 그게 이 세상의 규칙이야. 마법으로 해결하는 일들은 보람이 없단다.

-제니바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세계와 행복을 주는 세계는 다른 곳이 아니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천국과 지옥은 같은 곳이었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바라보는 세계는 선과 악이 공존하는 곳이었고 (심지어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으며) 삶과 죽음을 분리할 수 없는 곳이었다.


우리 세상의 투영이기도 한 감독의 판타지 속에서 치히로가 배운 것은, 세상의 틀에 구속되지 않는 것이었다. 진정한 성장은 사회가 요구하는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어떤 색깔을 가지고 있는지 발견하는 것이었다. 이름을 잊지 않았던 치히로는 온천탕의 수많은 어른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가오나시의 재력보다 공허한 마음에 눈길을 줄 수 있던 사람이었고, 오염된 강의 신이 풍기는 악취가 심해 모두가 달아나는 와중에도 그의 몸 속에 박힌 쓰레기들을 발견할 줄 알던 사람이었다. 무엇보다도, 기억할 수 없지만 동시에 잊을 수도 없는 자연의 사랑을 기억할 줄 알던 사람이었다.

치히로: 하쿠, 생각났어. 기억은 안 나지만, 엄마한테 들은 얘기야. 내가 어렸을 때 강에 빠진 적이 있는데 그 터에 아파트가 들어섰대. 문득 생각이 났어. 그 강의 이름은, 코하쿠 강이었어. 네 진짜 이름은, 코하쿠야.

하쿠: 고마워, 나도 이제 생각났어. 너가 내 안에 떨어졌던 일을. 신발을 주우려고 했었지?

치히로: 맞아, 네가 날 얕은 곳으로 옮겨 줬었어. 정말 기뻐.

치히로는 일련의 모험들을 통해 사회의 발자취에서 한 발 떨어져 자신의 생각과 느낌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방법을 배우게 되었다. 그녀는 편견, 군중심리에 함몰되지 않고 가오나시에게서 외로움을 보았고, 이익을 좇는 인간 때문에 사라진 자연의 이름을 되찾아 주었다. 치히로가 얻은 것은 통찰력이었다. 그것도 정체성이 생생히 살아있는, 찬란하고 단순하고 논리적으로 반박 불가능한 통찰력이었다. 그런 통찰력을 가진 자라면 혼재된 가치가 난무한 과잉의 세상에서 올바른 중도의 길을 확신하며 살아갈 것이다. 세계의 유바바적인 측면, 제니바적인 측면을 균형있게 취합하는 삶을 살아갈 것이다. 정체성이 확립된 자에게 태양은 외부가 아닌 내부에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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