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 프리즈: 우주가 끝없이 팽창해 엔트로피가 극도로 높아져 모든 입자가 붕괴하고, 평균 온도가 점점 내려가 열죽음에 도달해 결국 모든 것이 멈춰버린다는, 현재 가장 지지받고 있는 우주 종말 시나리오.
최초에 한 점이 있었다. 그 점은 갑자기 폭발했고 불타는 하늘이 되었다. 폭발은 완벽한 질서였던 한 점을 혼돈으로 바꿔 놓았고 그 찬란한 혼돈은 폭발과 결합이라는 성장통을 겪으며 아름다운 별과 행성을 조각해냈다. 그 과정은 지금도 진행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진행될 것이다. 태초의 폭발이 그 효력을 다할 때까지. 우주가 차디차게 식어 팽창을 멈출 때까지.
우주는 팽창한다. 그리고 그 팽창의 흐름 속에는 하나의 법칙이 숨어있다. 바로 엔트로피의 법칙. 우주의 흐름은 필연적으로 혼돈을 향해 있다는 것. 태초의 점은 완벽한 질서였다. 하지만 미상의 힘에 의해 그 질서는 무너져 펄떡이는 뜨거운 혼돈이 되었고, 우주 공간이 팽창하며 천천히 식어가고 있었다. 마치 생명처럼.
생명. 또 다른 빅뱅. 갓난아이가 출생하여 빛을 인식한다. 아이는 어머니의 질서정연한 뱃속에서 나와 세상의 혼돈을 마주하고 목젖이 터져라 울부짖는다. 그 울음이 불확실성에 대한 불안의 눈물일지, 자유의지를 향한 기쁨의 외침일지 알 길은 없다. 하지만 온기를 품은 그 아담한 기적을 보며 우리는 본능적으로 알아차린다. 네가 바로 ‘사랑’이었구나. 아이는 폭발과 결합이라는 우주의 성장통을 마음으로 겪으며 어린이로, 청소년으로, 성인으로 성장한다.
어느 날 아이는 깨닫는다. 삶은 질서에서 혼돈으로 흘러가는 엔트로피의 파도라는 것을. 교육을 받지 않으면 사회의 질서로부터 도태된다. 음식물을 오랫동안 방치해두면 상한다. 깨끗한 방을 가만히 내버려두면 어느새 먼지가 쌓여 지저분해진다. 끈끈할 것만 같던 인간관계는 종종 오해와 의심으로 점철된 녹슨 사슬이 된다. 벅찬 결의를 다지며 시작된 조직은 점차 여러 사건들에 의해 와해된다. 화목하던 가정은 때로 입장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점점 멀어진다. 사실 우리가 기대했던 모든 일들은 계획대로 잘 풀리지 않는다. 바로 이 엔트로피의 경향 때문에.
세상에 남기는 발자국이 많아질수록 마주하는 혼돈도 짙어져, 아이는 나름의 질서를 만들어낸다. 우주가 중력을 통해 별, 행성, 은하를 만들어 질서를 정립하는 것처럼. 만들어낸 질서들이 조화를 이룬다면 적정 거리를 유지하는 행성과 위성처럼 궤도를 따라 오랫동안 함께할 것이며, 그렇지 못한다면 서로의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부딪혀 파괴될 것이다.
아이는 자신이 만든 별과 행성들이 자꾸 부딪히고 파괴되는 모습을 보며 서서히 지쳐간다. 폭발의 섬광은 그의 눈을 지지고 있다. 그는 우주를 유영하는 부서진 별의 파편과 먼지들 사이에 숨어 잡히지도 않는 실패의 조각들을 원망하며 흐느낀다. 그 흐느낌은 뜨거운 출생의 울음과는 다르다. 그것은 수많은 후회와 고요한 분노가 담긴 고독하고 차가운 울음이다. 마음속의 빅 프리즈가 삶의 열정을, 눈물의 온도를 빼앗고 있었다.
눈물이 앞을 가려 아이는 보지 못했다. 별이 되지 못한 채 우주를 유영하는 성운 덩어리들이 서서히 결합하는 모습을. 중력은 기어코 파편과 먼지들을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눈물을 그친 아이는 깨달았다. 우리를 다시 일어서게 만드는 것은 다름 아닌 사랑이었다고. 태초에 우리 안에 있었지만 잊혀졌던 그 사랑이, 그 중력이 우리의 모든 발버둥을 의미있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별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파편과 먼지들이 필요했다. 실패의 기반이 필요했다. 답은 결국 우리 안에 있던 것이다. 삶의 모든 조각들을 하나로 끌어당길 사랑만 있다면 우리는 몇 번이고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별이 스스로 광채를 내는 그날까지 계속해서 창조와 파괴를 반복해야만 했다. 이를 악물고 단단해져야만 했다. 빛을 담는 그릇이 되기 위해.
하지만 언젠가는 빅 프리즈가 찾아올 것이다. 마음속의 열정과 기대, 낭만과 사랑이 차갑게 식어버릴 날이 올 것이다. 반복의 고통을 견뎌 희망의 광채를 삼켰던 그 아이마저 엔트로피의 파도 앞에서는 찬란히 빛날 수 없다. 특이점을 통과하면 모든 움직임이 멈출 것이기에. 심지어 시간마저도. 서로를 끌어당기는 중력은 사라질 것이고 우주는 그야말로 사랑이 증발된 공간, 차갑게 식어버린 시체가 될 것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중력은 여전히 가동 중이다. 우주의 시스템은 천체들로 수놓아진 멋진 밤하늘을 아직도 그려내고 있다. 빅 프리즈 따위 생각해보지도 않았다는 듯이. 그래서 중력이 만드는 질서의 의지는, 사랑이 다듬는 생(生)의 의지는 우주에서 발견할 수 있는 모든 아름다움보다 더욱 아름답다. 한없이 황량한 우주 속 외로움의 조각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랑을 조각해 기어코 어둠을 밝히기에. 마치 신생아처럼.
힘든 날에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자. 중력이 만들어낸 기적의 풍경화를 감상해보자. 그리고 눈을 감고 느껴보자. 우리 발 밑에 존재하는 동일한 기적을. 엔트로피의 파도를 거슬러 우리를 단단히 붙잡고 있는 그 힘을. 우리의 모든 발버둥을 응원하고 있는 그 사랑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