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스트- 알베르 카뮈
불행은 뜻하지 않게 찾아온다. 아니, 어쩌면 원래부터 우리 옆에 있었다. 단지 보이지 않았을 뿐. 불행은 뜻하지 않은 시기에 불특정 다수를 덮쳐 일상을 뒤흔든다. 그것은 고통과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다르다. 고통은 부정적이지만 때로는 성장의 동기부여가 된다. 하지만 불행은 필연적으로 개인을 궁지로 몰아넣을 뿐이다. 그렇다면, 언젠가는 맞이해야 할 불행이라면, 우리는 그 불행에 어떻게 대처해나가야 할까.
어느 날 알제리의 한 도시 ‘오랑’에 페스트라는 역병이 퍼진다. 감염된 사람은 온몸에 멍울이 올라오고 고열에 시달린 채 고통스러운 시간을 견디다 7시간에서 5일 이내로 사망한다. 도시로 찾아온 이 저승사자는 선한 자와 악한 자의 목숨을 가리지 않고 앗아간다. 아무런 이유나 인과관계도 없이. 누군가는 이 불행 속에서 어떠한 희망도 발견하지 못한 채 무력해지고, 누군가는 조급하게 인류 구원을 자처하는 영웅이 되고자 한다. 누군가는 묵묵히 성실하게 불행과 싸워나가며, 누군가는 불행을 이용하여 사리사욕을 채운다.
놀라운 건, 소설의 발행 시기가 1947년임에도 불구하고 페스트를 받아들이는 등장인물의 심리 상태나 정부의 방역정책이 현재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과 무척이나 흡사하다는 것이다. 전염된 도시는 봉쇄되고, 바이러스의 변이적 특성 때문에 혈청 개발자들과 바이러스는 서로가 쫓고 쫓기는 관계이다. 감염자 수와 사망자 수 통계는 일주일 단위가 아닌 하루 단위로 발표된다. 숫자가 클수록 민심이 불안해지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시간이 흘러 모두가 불행에 익숙해진다는 점에서 소설과 현재는 많이 닮아있다.
사람들은 점점 더 빈번하게 자기 자신들이 규정해 놓은 위생 수칙을 소홀히 하고, 자기 자신들 몸에 실시하기로 했던 수많은 소독 규칙을 잊어버렸으며, 때로는 전염에 대한 예방 조치조차 취하지 않고 페스트에 걸린 가족들 곁으로 달려가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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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그들은 여전히 거리로 나와 돌아다녔고 카페테라스에 나앉아 있곤 했다.
불행은 모든 이들에게 같은 형태로 다가오지 않는다. 의사 리유는 페스트가 만연한 이 상황에서 해야 할 일이 있는 사람이다. 그가 해야 할 일은, 바로 페스트와 싸우는 것이다. 그는 카스텔 혈청이 변이하는 페스트 균을 죽일 수 있도록 하루 종일 외진을 돌지만 환자를 살리는데 번번이 실패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환자들의 건강을 위해서 묵묵하게, 성실하게 전진해나간다. 작은 희망조차 보이지 않더라도. 그것이 지금의 그가 유일하게 확신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옳은 일이기 때문에.
이 모든 일은 영웅주의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것은 단지 성실성의 문제입니다. 아마 비웃음을 자아낼 생각일지도 모르나 페스트와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성실성입니다.
나는 다만, 이제 다시는 페스트에 전염되지 않으려면 반드시 임무를 다해야 한다는 것을, 그것만이 우리들로 하여금 평화를 되찾을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을, 평화가 아니라면 적어도 떳떳한 죽음을 바랄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리유
불행은 누군가에게 행운이 되기도 한다. 코타르는 페스트가 번지기 전에 밀매사업을 벌이던 범죄자였다. 결국 그는 경찰에 덜미를 잡혀 사업을 말아먹지만, 페스트가 성행하고 나서 소홀해진 감시망을 틈 타 사업을 부흥시켜 떼돈을 번다.
저들이 하는 소리가 들리시죠. 페스트가 가고 나면 이걸 해야지, 저걸 해야지 하는 소리 말입니다. 저들은 가만히 있지 못하고 자신들의 생활을 망치고 있는 것이죠. 저들은 자기들이 얼마나 유리한 입장에 있는지 모르거든요.
-코타르
불행에 익숙해지면 고통에도 무감각해진다. 즉, 더 이상 고통을 느낄 수 없게 된다. 고통을 느낄 수 없다는 건 아픔에 무감각해진다는 의미일 뿐만 아니라 더 이상 희망을 희망하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마치 오랜 시간동안 격리되어 사랑하는 가족들을 만나지 못한 오랑의 주민들이 가족들의 얼굴을 점점 까먹게 되는 것처럼. 그렇게 무뎌지는 것은 문자 그대로 죽음에 한 발짝 더 가까워지는 일일 수 있다.
하지만 신이 마음을 고쳐먹었는지 페스트는 종식되고 해방이 찾아온다. 불행이 모두에게 동일한 의미로 다가오지 않았듯, 해방도 모두에게 동일한 의미로 다가오지 않았다. 대부분의 시민들은 그리워했던, 어쩌면 잊고 살았던 가족들을 다시 만나 기뻐할 수 있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희망을 놓지 않고 그것을 동력 삼아 페스트와 싸웠던 리유는 기뻐할 수 없었다. 페스트가 종식하는 와중에 아내가 페스트로 사망한 것이다. 오랑 시 주민들이 목놓아 외치는 해방의 함성이, 리유에게는 역설적이게도 슬픈 추모의 장송가가 되었다. 한편 코타르에게는 페스트로부터의 해방이 곧 불행의 시작이었다. 지옥이라는 놀이터에서 맘껏 뛰놀 수 없게 된 그는 불만을 총기 난사로 표출하여 경찰에 잡혀간다.
우리를 무기력하게, 죽음에 한 발짝 가까워지게 만드는 것은 비단 페스트뿐만이 아니다.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좌절, 실망, 우울 모두 우리를 생기 잃게 만드는 일이며 삶에 회의감을 느끼게 만드는 일이다. 불행이야말로 우리 삶의 바이러스이다.
페스트 환자가 되는 것은 피곤한 일이지만, 페스트 환자가 되지 않으려는 것은 더욱 피곤한 일이에요. 그래서 모든 사람이 피곤해 보이는 거예요. 오늘날에는 누구나 어느 정도는 페스트 환자예요.
우리는 이 불행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대의를 위해 스스로의 희망을 포기했음에도 어떠한 보상도 받지 못한 채 아내의 죽음을 추모하게 된 리유는 어떻게 그 불행에 대처했을까?
신앙의 맹목성 만으로는 페스트를 해결하기가 어렵습니다. 이것이 신성을 모독하는 태도일지는 몰라도, 인간의 구원은 저에게는 너무 거창한 단어입니다. 제가 관심 갖는 것은 오로지 인간의 건강입니다.
-리유
바로 자신의 직분을 다하는 것이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불행 앞에서 신께 기도한다. 마음의 위안을 찾기 위해. 하지만 내면의 안정은 결코 우리를 둘러싼 환경의 안정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페스트예요. 페스트를 이겨냈다고요.’ 하면서 난리를 치죠. 좀 더 봐주다간 훈장이라도 달라고 할 판이죠. 그러나 페스트가 대체 무엇입니까? 바로 인생이에요. 그뿐이죠.
페스트의 종식 이후, 내면의 안정만으로 만족했던 오랑의 시민들은 페스트로부터의 해방을 외쳤지만, 리유는 알고 있었다. 페스트균은 결코 죽거나 사라지지 않으며 끈질기게 살아남아 언젠가는 이 행복한 도시에 또 공포를 심으리라는 것을.
한편 작가 알베르 카뮈는 자신의 직분을 다하지 못한 사람들 또한 보듬어준다. 그는 페스트와 맞서 싸우지 못한 채 오매불망 가족들을 그리워하고 슬퍼하는 것 역시 숭고한 일이라는 것을 일깨워준다.
서로를 힘껏 껴안은 채 정신없이 마주 보고 있는 사람들이 그들이 바라던 바를 손에 넣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자기 힘으로 얻을 수 있는 것만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적어도 가끔씩은 기쁨이라는 게 찾아와서 사랑만으로 만족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보람을 주는 것은 정당한 일이었다.
이 세상에는 스스로의 행복을 쟁취해 주위를 희망으로 밝게 빛내는 사람, 진실을 위해 스스로의 행복을 포기하고 기꺼이 어둠 속으로 들어갈 줄 아는 사람 모두가 필요하다. 우리 모두는 반드시 필요한 존재이다.
현재 코로나 바이러스가 4차 대유행 조짐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근래 700~800명대의 확진자가 매일같이 발생하고 있다. 사실 이제는 확진자 수가 늘어도, 줄어도 별 감흥이 없다. 무감각해진 것일까. 사실 언제 어디서 갑자기 코로나가 터질지 모르기 때문에 확진자 추세를 예측하는 것은 이제 큰 의미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매일같이 마스크를 착용하고 점점 단절되어가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때로는 원망스럽게 느껴질 때가 있지만, 이 책의 말마따나 불행은 원래부터 우리 곁에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코로나 바이러스 역시 동물을 대상으로는 꽤 오래전부터 존재했다고 한다. 다만 이번 변이 바이러스가 인간이라는 종에게 추가적인 피해를 입혔을 뿐이다. 피해 정도가 좀 과하긴 하지만. 불행 역시 눈에 보이지 않았을 뿐, 항상 우리 곁에 존재했다. 그러니 갑자기 찾아온 불행에 절망하지 말자. 불행을 만나기 전과 후의 우리는 여전히 강하고 온전하다.